그들은 왜 ‘권’을 쏘았나
  • 안철흥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0.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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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권노갑 퇴진론’ 파동으로 신·구 대결 본격화…“제3기 권력 쟁탈전 막 올랐다”
‘일단 불발로 끝난 쿠데타, 그러나 성패는 아직 판가름 나지 않았다.’ 이번 권노갑 퇴진 파동을 지켜본 한 초선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선도투는 정동영 최고위원이 맡았다. 정위원은 12월2일 청와대에서 열린 최고위원 만찬에서 당정 쇄신을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권노갑 최고위원이 물러나야 한다고 못박았다. DJ 정권 최고의 실세, 민주당의 버팀목임을 자임해온 권위원을 향한 정면 도전. 이는 한 중진 의원의 말마따나 정권 교체 이후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이었다.

쿠데타 징후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길게는 총선 직후부터, 짧게는 8월 전당대회 때부터 분출되기 시작한 민주당 안의 당정 쇄신 움직임은 전당대회 직후 당직 개편 요구로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이재정·정범구·김성호 등 초·재선 의원 13명은 9월15일 지도부 총사퇴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했고, 9월18일 최고위원 워크숍에서 김근태·정동영 최고위원이 당정 쇄신을 강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정기국회가 시작되면서 이런 움직임은 겉보기에 잠복했지만, 물밑에서는 여전히 활발했다. 초선 ‘반란파’ 의원들은 정기국회 중에도 한두 번 모임을 가졌고, 10월1일에는 안면도로 부부 동반 엠티를 다녀오는 등 결속력을 다졌다. 두 최고위원의 물밑 움직임도 활발했다. 김근태 위원은 국민정치연구회 회원들과 만나 당 개혁안을 놓고 의견 조율을 시작했다. 정동영 위원도 초·재선 의원들로부터 당내 여론을 듣는 작업에 들어갔다.

개혁파의 움직임이 다시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검찰 수뇌부 탄핵안 파동 때부터였다. 여야가 마찰을 빚는 과정에서 당 지도부의 무능이 다시 한번 드러났고, 11월20일에는 한화갑 최고위원이 당정 관계 쇄신을 주장하며 개혁파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당을 장악하고 있던 구 동교동계는 요지부동이었다. 권최고위원은 11월21일 당정쇄신론에 대해 “내년에나 보자”라고 쐐기를 박기도 했다.

그런데도 당정 쇄신 목소리가 수그러들지 않자, 마침내 김대통령이 청와대로 최고위원들을 불러 당내 여론을 직접 듣겠다고 밝히기에 이르렀다. 자연스레 거사일이 정해진 셈이다.

쿠데타 전야. 몇 갈래로 나뉘어 진행되던 개혁파의 움직임도 부산해졌다. 이미 초·재선 의원 40여명을 접촉하면서 여론을 청취한 정동영 위원은 대통령에게 보고할 고강도 당 개혁안의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 칩거에 들어갔다. 초선 의원들도 12월1일 여의도 63빌딩에 있는 한 음식점에서 비밀 회동했다. 이 날 참석한 사람은 김태홍 이호웅 이재정 심재권 정장선 이종걸 정범구 최용규 김성호 임종석 문석호 의원이다.
이런 비판에 대해 권위원측은 억울하다고 말한다. 권고문의 최측근인 이훈평 의원은 유언비어를 가지고 공격하는 것은 비겁하다면서 “1주일에 두어 번 당에 나오는 것밖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정국 타개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라고 항변했다. 돈 문제는 한보 사건을 계기로 깨끗해졌고, 인사 개입 문제는 과거 고생했던 사람들을 챙겨주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했다는 시각이다.

권노갑 퇴진 요구가 확산된 직후 권위원측은 반격을 시도했다. 권노갑 퇴진 분위기로 흐르던 형세를 친권파 대 반권파 간의 권력 투쟁으로 바꾼 것이다. 그래야만 권위원이 살 길이 생긴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같은 권위원측의 전략은 일단 주효했다. 당정쇄신론으로부터 시작된 이번 민주당 사태가 권노갑 퇴진론-양갑 갈등에 이어 친권파 대 반권파의 대결 양상으로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 당정 쇄신을 요구하던 목소리는 권력 투쟁 소용돌이에 묻혀 버렸다. 김근태 최고위원이 사건 초기 “당정 쇄신 주장을 사람의 문제로 한정할 경우에 본질이 흐려질 우려가 있다”라고 권위원 퇴진 요구를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김영환 의원도 “대통령에게 조용히 결단할 시간을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권노갑 퇴진 요구가 권력 투쟁으로 비화하자 개혁파 의원들은 내심 당혹스런 모습이 역력하다. 개혁파 사이에서는 이번 일을 둘러싸고 입장이 갈라지는 징후마저 보이고 있다. 김근태 최고위원을 비롯한 장영달·심재권·이재정·이호웅·이창복 의원이 신중론을 펴고 있는 반면, ‘쿠데타의 주역’ 정동영 최고위원을 비롯한 김태홍·김성호·최용규·정범구·장성민 의원은 원칙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권위원의 퇴진 수위에 대해서도 의원들의 생각이 다르다. 정동영 위원은 권위원만 물러나면 2선에서 어떤 역할을 하든 관계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소장파의 한 의원은 권위원이 완전히 정계를 은퇴하고 외국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사태의 모습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번 민주당 사태는 신구 대결이며, 제1기 김중권 체제, 제2기 권노갑 체제에 이어 제3기 권력을 장악하려는 투쟁이다. 구파에는 권노갑 위원을 비롯한 구 동교동계가 포진하고 있다. 신파에는 한화갑 위원을 비롯한 동교동계 신파와 김근태·정동영 등 개혁파 최고위원, 초·재선 그룹을 중심으로 한 소장 개혁파가 합류했다. 개혁파의 한 의원은 “양쪽의 갈등이 해소된 게 아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DJ의 노르웨이행을 수행하고 있는 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시사점을 얻을 수도 있다. 권노갑 위원은 빠진 반면, 한승헌 변호사·최장집 교수·한완상 전 부총리가 DJ를 수행했다. 이들은 모두 한화갑 최고위원을 비롯한 당정쇄신파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사람들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1주일 간에 걸친 DJ의 노르웨이 장고(長考)가 어떻게 매듭지어질지 민주당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들은 당 개혁안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이들 사이에서 권최고위원의 거취를 두고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합의를 이끌어내지는 못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김태홍 의원이 이 날 나온 의견들을 취합한 개인 문건을 작성한 뒤 총재특보인 이호웅 의원을 통해 김대통령에게 전했다.

이로써 정동영 의원의 폭탄 발언에 이어 김태홍 의원의 지원 사격이 감행되었고, 4일 오후 이 사실이 당내에 알려지면서 민주당은 창당 이래 최대 분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정동영 최고위원과 초선 의원들이 제기한 당정 쇄신 방안은 모두 권노갑 최고위원 2선 후퇴를 핵심으로 삼고 있다. 한 개혁파 초선 의원은 “대야 관계는 꼬이기만 하는데, 지도부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봉합만 하려 한다. 지도부에 이런 불만을 털어놔도 먹히지를 않는다. 그러다 보니 지도부 교체만으로는 안되고, 사실상 당을 좌지우지하는 권위원을 퇴진시키는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라고 말했다.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는 지도부 개편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동교동계의 좌장’ ‘영원한 2인자’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권위원은 DJ 밑에서 조직과 자금을 맡아 왔다. 그 때문에 온갖 궂은일은 그의 차지였고, 비리 의혹에도 여러 차례 거론되곤 했다. 많은 사람이 그를 두고 떠올리는 ‘어두운 이미지’는 그가 그동안 맡아온 역할과도 관련이 크다. 야당 시절 그는 온갖 수난을 겪었지만, 현정권이 들어서고 나서도 운세는 그리 좋지 못했다. 그가 퇴출 위기에 몰린 것은 이번으로 벌써 세 번째다.

첫 번째 위기는 정권 초반에 있었다. 한보 비리와 관련되어 구속되었다가 1998년 8·15 특사로 풀려난 권위원은,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유배 생활’을 했다. 그는 몇 차례 귀국하려고 시도했으나 김중권 비서실장을 비롯한 신주류의 집중 견제로 뜻을 꺾고는 했다.

두 번째 위기는 총선 때 왔다. 이번에는 시민단체로부터였다. 2000년 1월24일 총선시민연대가 발표한 공천 부적격자 명단 66명에 포함된 것이다. 1997년 한보 정태수 회장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 낙천 대상으로 선정된 이유였다. 권위원은 표적 수사로 사법 처리된 사항이며, 정치 자금을 뇌물이라고 규정하면 그로부터 자유로울 정치인이 아무도 없다고 항변했지만, 여론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는 결국 2월8일 총선 불출마 선언을 했다.

현정부 들어서만 두 번 위기를 맞았지만, 그는 그때마다 극복했다. 그는 1999년 중반 동교동계 전면배치론에 힘입어 당에 복귀했다. 첫 번째 위기에서 탈출한 것이다. 이어 1999년 11월 김중권 비서실장이 물러나면서 명실상부한 2인자로 복귀했다.

두 번째 위기 극복은 더 극적이었다. 퇴출 위기에 몰렸지만, 그는 역으로 자신을 버림으로써 난제였던 중진 물갈이를 해치우는 역량을 발휘했다. 결국 국창근·양성철·조홍규 의원이 하나 둘 불출마 선언 대열에 동참했고, 이들은 일오회를 만들어 민주당의 선거운동을 뒤에서 열심히 도왔다. 일오회 회원 중 상당수는 총선 후 정부 산하단체 임원으로 임명되었다. 권고문이 당내외 인사에서 전횡을 부리고 있다는 비난을 듣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8·30 전당대회를 계기로 그는 명실상부한 2인자 자리에 복귀했다. 그러나 동교동이 전면에 나선 올해 내내 정국은 파란의 연속이었고, 민주당 지도부는 정국 장악에 실패했다. 국회법 날치기 사태, 윤철상 의원 발언 파문, 검찰 수뇌부 탄핵안 상정에 이은 여야 격돌 등 연이은 국회 파행을 거치면서 의원들 사이에는 당 지도부의 무능을 질책하는 여론이 높아 갔다. 그러나 이런 당내 여론은 김옥두 총장에 의해 번번이 무시되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김총장에 의해 언로가 막히니까 권위원을 제거하자는 여론이 일어난 것’이라고 해석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번에 찾아온 권위원의 세 번째 위기는 이전 두 차례 위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첫 번째 위기가 당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신구 갈등이었고, 두 번째 위기가 시민단체에 의한 문제 제기였다면, 이번 위기는 당내에서 정면으로 권위원의 역할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훨씬 심각하다.

한 개혁파 초선 의원은 “당에는 돈이 없는데 사조직에는 돈이 넘쳐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라면서, 권위원을 비롯한 구 동교동계가 정치 자금을 독점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다른 초선 의원은 “상임위에서 호남 편중 인사에 대한 야당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애썼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도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 많다. 그러면 변호하면서도 힘이 빠지는 것 아니냐”라면서 권위원의 인사 전횡을 비판했다. 이밖에도 초선 의원들의 불만은 끝없이 이어진다. ‘의원들을 바지저고리로 만들어놓고 단결하자고만 외친다’ ‘당직 맡기를 부끄러워하는 당이 우리 당이다’ ‘몇몇 지도부 사람 때문에 도덕적이며 개혁적인 정책들이 비아냥을 받고 있다. 본인들은 그걸 모른다’ 등등.

심지어 한 초선 의원은 “김현철은 롯데호텔에 매일 앉아 있었다. 권위원은 신라호텔에 날마다 간다. 뭐가 다른가”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총선 때 권위원으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던 한 소장파 의원은 지난 추석 때 고민 끝에 권위원 집에 찾아가기를 포기했다. “찾아가는 것이 괜히 부끄러웠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 정도로 권위원은 당내 초·재선 의원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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