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교사자 대한 민국을 고발한다”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0.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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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파 첩보원들의 ‘버림받은 일생’ 추적/감언이설로 꾀어 사지에 몰아넣고
지난 10월21일 서울지검에는 눈에 띄는 고소장이 접수되었다. 피고소 대상이 국방부·국회·헌법재판소로 기재된 이 고소장을 쓴 사람은 한 북파 첩보대원이다. 한국전쟁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국가의 부름을 받아 북파되어 첩보 활동을 하다가 7천7백26명이 희생된 것은 국가에 의한 ‘살인 행위’였으므로 그 진상과 위법 행위를 조사해 달라는 요지이다. 검찰청 담당자가 다소 황당한 표정으로 접수한 이 고소장에는 그러나 북파 첩보원들이 정부에 품고 있는 배신감과 소외감이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한국첩보전전몰장병추모사업회 회장 자격으로 30여 회원들과 뜻을 모아 고소장을 냈다는 육군첩보대(HID) 1기생 출신 박부서씨(70)는 이렇게 말했다. “북파 첩보원 문제를 해결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인 이상 국가는 살인 교사자였고, 우리는 살인범이나 다름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우리가 북한에 들어가 벌인 모든 행위가 범죄일 수밖에 없다고 보고, 나 자신부터 검찰에 자수해 모든 범죄 사실을 털어놓을 작정이다.”

남북한 사이에 냉전 체제가 허물어지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북파 첩보원의 실상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지난 9월 초 남파 공작원을 포함한 비전향 장기수들이 북송된 이후, 그동안 입을 굳게 다물어온 생존 북파 첩보원들이 이제는 자기들의 명예를 되찾을 차례라고 생각해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최근 민주당 김성호 의원이 공개한 북파 첩보원 희생자 수는 7천7백26명이다. 이들 중 5천5백76명이 한국전쟁 때부터 1959년까지, 나머지 2천1백50명이 1960년부터 1970년대 초반에 북파되었다.
<시사저널>은 1950년대 북파 첩보원들과 1960년대 이후 첩보원들을 두루 만나 베일에 가린 대북 첩보전의 실상을 살펴보고, 살아 남은 첩보대원들의 고통을 들여다보았다.

한국군이 북한에 무장 공작원을 파견하려고 처음으로 만든 부대는 육군첩보대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육군본부 정보국 공작과를 확대해 만든 육군첩보대는 1952년 10월28일 제1교육대를 창설하면서 본격적으로 북파 무장 첩보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당시 육군첩보대는 직할대인 제1교육대 외에도 36지구대(속초) 18지구대(부산) 27지구대(인천) 45지구대(춘천) 등 여러 지대를 거느리며 각 군단과 사단에 북파 요원들을 파견했다. 1955년에 36지구대원으로 들어가 40년간 대북 첩보전을 수행하고 1992년 12월30일 문관으로 전역한 이규호씨(70)는 육군첩보대의 초창기 활동을 이렇게 설명했다.

“36지구대는 동해안을 통해, 27지구대는 서해안을 통해 북한에 침투해 무장 공작 활동을 수행했다. 부산에 주둔한 18지구대는 무장 공작원을 양성해 각 군부대에 보내는 기능을 맡았다. 36지구대는 휴전 후 1970년대까지 원산·통천·고성으로 침투해 각종 무장 공작 활동을 수행했다.” 그에 따르면 종전 후에도 이들 36지구대원들이 활발하게 침투 공작을 벌이자 북한은 인민군 4개 사단을 원산에서 고성 북방 통일전망대 앞까지 그물망처럼 배치해 철통 경계를 폈다고 한다. 인민군이 이들을 ‘물찌’라고 부르며 집중 방어하는 바람에 수많은 대원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희생된 첩보대원 1백60여명의 위패는 지금까지 양양에 있는 영혈사에 봉안되어 있다. 이들은 주로 밤에 해상으로 침투해 군사 시설을 폭파하고 인민군 장교를 납치해오는 등 맹활약했다. 대표적인 성과가 1954년 5월15일 김윤탁 소대장이 이끄는 대원 5명이 장전항에 침투해 지프로 이동하던 인민군 대좌(김대영)를 납치해온 일이다. 이 공로로 당시 김동석 36지구대장은 을지 무공훈장을 받았고, 이승만 대통령이 부대를 직접 방문해 격려했다고 한다. 36지구대는 아직까지 속초에 남아 활동하고 있다. 이 부대 출신 첩보원들은 속초에 36동지회라는 친목회를 꾸리고 매월 한번씩 모이는데, 1955년부터 최근까지 전역한 사람이 모두 회원이다. 이씨는 “우리가 모이는 것을 정보사가 좋지 않게 보지만, 남북한 정상이 만나는 시점에서 이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적절한 예우를 해주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육군첩보대 직할대인 제1교육대는 서울 정릉에 있는 청수장과 옥류장에서 1953년 6월까지 3개 기수에 걸쳐 첩보원 약 8백명을 양성했다. 교육생들은 16주 동안 공작원 양성 교육을 받고 동서 해안을 통해 북한에 침투했다. 1기생 1백50여명은 황해도 해주 앞 용매도와 진남포 앞 취라도에 침투해 공작 활동을 수행했다. 2기생은 평안북도 묘향산 일대에 공수 낙하해 활동하다가 거의 전멸했다. 3기생은 1954년 김석환 대위가 인솔해 원산 앞 여도에 침투해 상륙하려다 인민군의 공격을 받고 전멸했다.

1960년까지 북파 첩보 활동을 벌인 육군첩보대 대원들은 주로 월남한 이북 출신이었다. 이들은 북파 직전 대위에서부터 이등중사까지 임시 계급장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들이 군인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급장은 휴지조각이나 다름없었다. 침투 후 희생된 대원들은 군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립 묘지에 가지 못했고, 부상자들도 상이 군인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지 못했다. 현재 군당국이 공식 확인한 이 기간의 희생자 5천5백여명은 서울 우이동 군부대 안에 마련한 충령각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대북 첩보전은 1960년대 들어 그 틀이 대폭 바뀌었다. 우선 1961년에 육군첩보대는 AIU로 명칭이 바뀌었다. AIU는 그 전 시기와 달리 공작원 물색과 포섭에서부터 훈련·침투 방식에 이르기까지 체계화하고 보안을 유지하는 데 신경을 썼다. 1950년대 후반까지가 주로 월남자를 포섭 대상으로 삼았다면, 이 시기에 들어서는 전쟁 고아·깡패·양아치·소매치기 들이 포섭 대상이었다. 이 시기의 북파 첩보원 양성은 1968년 발생한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을 분기점으로 그 전 시기와 크게 차이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즉 1961∼1967년에는 첩보원을 개별적으로 모집해 단독 침투시키는 공작에 치우쳐 있었다. 그러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의 과학적인 무장 게릴라전이 기승을 부리자 AIU도 여기에 대응해 대규모 침투 공작으로 대응했다.

포섭 대상자에게는 주로 평생을 보장하겠다고 호언하며 접근했다. 철저히 1 대 1 면담을 통해 1주일에 네 번씩 만난 후 계약서를 쓰고 채용했다. 계약서에는 6개월간 교육받은 뒤 북파 활동을 완수하고 생환하면 국가가 보장할 내용이 들어 있었다. 군대 제대증과 평생 연금, 성과급(개인택시 구입비), 사회에 적응할 직장(경찰특공대 등), 사망시 가족 생계 등을 책임지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대부분 지켜지지 않았다.

서울 홍제동에서 건물관리업을 하고 있는 김종복씨(58)도 그렇게 물색조에 포섭되어 1964년 2월 북파 활동을 한 대원이다. 김씨는 당시 청량리를 무대로 폭력 조직 ‘세븐클럽’을 결성해 집단 패싸움을 벌였다가 수배되었다고 한다. “1963년 12월 하순 동대문 근처의 한 다방에 앉아 있는데 낯선 사람이 접근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한번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밑도끝도 없는 제안을 했다. 북파 활동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간첩으로 알고 신고하려다가 거꾸로 내가 얽혀들고 말았다.” 그는 4일 동안 물색조와 면담한 후 군용 지프를 타고 포천군에 있는 군부대 근처 안가로 가서 침투 교육 과정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씨는 당초 장기 침투를 지원했었다. 장기 침투란 북한에 자진 월북인 것처럼 위장하고 들어가 첩보 활동을 벌이는 것을 말한다. 30kg짜리 배낭을 메고 산악을 달리는 훈련에서부터 아군 부대를 상대로 기밀을 절취하는 모의 훈련, 침투할 북한 지역 상세 지도를 보고 접근하는 훈련 등 다양한 지옥 훈련을 받던 도중 그는 뜻밖의 사고로 단기 침투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국내 훈련을 마친 후 오키나와에 있는 첩보원 양성 교육소에 가서 전문 교육을 받기로 되어 있었지만 탄약고 소대장을 폭행했다가 우리와 탄약고 병사들 간에 총격전이 벌어져 군이 발칵 뒤집혔다. 결국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교육받기 시작한 지 2개월 20일 만인 1964년 2월23일 나에게 북파 명령이 떨어졌다.”

그 날 김씨는 인민군복 차림으로 위장한 후 10일치 식량을 배낭에 넣고 민정수색대의 안내를 받아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단신으로 평강까지 침투한 그는 밤에 산에 은신처를 파고 매복하다가 낮에 인민군 박격포 연대를 박살했다고 한다. 원래 문서 절취반으로 인민군 부대 문서를 빼오는 임무를 받았지만 쓰레기통의 문서를 뒤져 오는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북파 3일 만에 귀환하던 도중 그는 인민군이 매설한 목각 지뢰를 밟고 쓰러졌다. 왼쪽 턱이 날아가고, 발목을 크게 다친 그는 필사적으로 군사분계선까지 기어온 후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민정수색대에 발견되어 수도육군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5개월간 치료를 받은 후 보상금 50만원만 받고 쫓겨났다. 그날 이후 북파 사실을 어디에 하소연하지도 못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다는 김씨는 “나는 운이 좋은 경우이다. 대부분 북파자는 사망했지만 정부는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더 조직적인 대북 침투 공작은 1966년부터 1972년까지 실시되었다고 한다. AIU는 이때부터 물색조를 통해 모은 첩보원 대상자들을 집단 훈련해 북파했다. 1967년에는 AIU 1기생으로 불리는 80여명이 첩보원 양성 교육을 받았다. 이들 가운데 현재 생존자는 20명이 채 안되는데, 대부분 북파후 사망·실종했다는 것이 생존 대원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목장 출신’이라고 불렀다. 청계산에서 3개월 훈련을 받고 전방 각 부대에 파견되어 북파 활동을 벌였는데, 당시 대한 축산연구소가 청계산에 있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또 다른 집단 교육은 속초에서 실시되었는데 이곳을 거쳐나온 첩보원들은 스스로를 ‘개발단 출신’이라고 부른다.

물색조가 점찍은 북파 대상자가 계약에 응하면 남산 야외음악당·용산 노동회관 등지에 모여 ‘동북산업사’(AIU 가명) 버스를 타고 정보사 대기소로 넘어갔다. 여기서 머리 깎고 옷을 갈아입은 후 밤길을 달려 속초로 향했다고 한다. 속초에 있는 훈련소에서 6개월 훈련을 마치면 인천대·문산대·전곡대·양구대·속초대·운천대 등 예하 부대에 배치된다. 인천대와 속초대는 해상 침투 부대였고, 나머지는 육로 침투 부대였다. 당시 개발단 소속이었던 한 북파 대원은 훈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훈련 과목은 30여 개였다. 산악행군·돌연사격·폭파·납치·절취·촬영·생존학·무성무기 사용·적성 화기 사용·은신술·독도법·포승법·잠복호 구축·임기응변·시한폭탄 제조술 등이다.”

서울 상계동에 사는 김정식씨(63)는 AIU 1기 출신 특수 첩보원이다. 열아홉 살에 서울 시내에서 우연히 접촉한 물색조원에게 넘어가 첩보원 교육을 지원했다는 김씨는 1967년 말부터 이듬해 봄까지 정보사 안가와 청계산에서 4개월 동안 특수 훈련을 받았다. 정보사 안가에서는 동료 대원 80명 전원이 함께 교육 받았지만, 청계산으로 옮겨서는 5~6명씩 조를 나누어 다른 조원은 알 수 없도록 격리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는 납치조였는데 김신조 일당이 내려오던 무렵 이에 대응해 군사분계선을 넘어가 인민군 장교를 납치해 오는 일이 주임무여서 특수 공작원이라 불렀다. 춘천지구대로 배치되어 1968년 1월부터 10월까지 여러 차례 군사분계선을 넘어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북파되어 납치 임무를 수행하고 오던 도중 인민군과 교전해 옆구리와 왼팔에 관통상을 입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

당시 공로로 충무무공훈장을 받은 김씨는 1971년 전역했다. 북파 첩보원 중 드물게 군번과 국가유공자예우(상이 5급)를 받은 김씨는 특히 1971년에 북파된 동료 및 후배 대원들이 집단으로 희생되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정부와 군당국은 우리들의 존재를 시인도 부인도 않고 있다. 나는 원혼이 된 수많은 공작원과, 악전고투 끝에 살아 남았지만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동지들의 명예 회복과 보상을 위해 남은 여생을 바칠 각오이다.” 그는 이를 위해 1970년대 AIU 출신 생존자들과 연락해 이들과 함께 국회에서 증언하겠다고 밝혔다.

1960~1970년대에 활동하다 생존한 북파 첩보원 중 상당수는 북파 경험이 남은 인생을 망가뜨렸다고 호소한다. 활동할 때는 최고의 애국자라고 치켜세우며 일반 사회에서 써먹을 수 없는 온갖 특수 훈련을 시킨 뒤 그대로 내보냄으로써 사회에서 할 일이라고는 ‘배운 도둑질’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당국이 이들을 해고하면서 재교육이나 취업 알선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동안 국익을 내세우며 보안 준수를 요구하는 정부의 뜻에 따랐지만 이제는 더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이다. 자기들이 조국을 위해 희생한 만큼 조국도 이를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이처럼 북파 공작원들이 입을 열기 시작하자 군당국은 난처한 표정이다. 국방부는 최근 북파 첩보원 문제에 대해 ‘자유 수호를 위해 위국 헌신한 분들의 숭고한 희생 정신을 잊지 않고 있으며 이 분들에 대한 국가의 본분과 도리를 다하겠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북파 공작원의 실체를 공식 인정하는 것이 국익에 어긋난다는 국방부의 입장은 확고하다. 음지에서 조용한 보상이나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북파 첩보원들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처사라고 반발한다. 북파 첩보전에 대한 공식 인정과 예우를 기피할 경우 실종자 유족과 부상자·생존자가 힘을 합쳐 거리로 나서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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