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우외환에 흔들리는 권부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0.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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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甲 전쟁’ 이후 위 상 실추… 당권 과점 ·정치력 부재로 ‘자승자박’
지난 9월28일 오후 민주당 김옥두 사무총장은 자신과 권노갑·한화갑 최고위원이 점심을 함께 했다고 공개했다. 지난 6월28일 비슷한 회동을 가진 지 꼭 3개월 만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회동 명분은 하나, 동교동의 화해와 단합이다. 그러나 당내에서는 두 모임 모두 권위원측이 주도했다는 점을 들어, 동교동계 주류의 위상 회복을 위한 몸부림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동교동계가 위기 의식을 느낄 만한 징후는 이미 여러 차례 있었다. 최고위원, 초·재선 의원 할 것 없이 동교동의 전횡을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는 9월25일 서영훈 대표가 동교동계의 두 축인 권노갑·한화갑 두 사람을 대표실로 불러 ‘이 당은 동교동당이 아니다’라는 훈계조의 말을 하기도 했다. 민주당의 대주주인 동교동계로서는 당혹스러울 만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동교동계를 동요시킨 최대 원인은 권노갑·한화갑 두 ‘형제’의 갈등과 그로 인한 권위원의 위상 실추이다. 동교동계는 흔히 자신들을 ‘충성심으로 뭉친 형제’라고 말한다. 권위원은 자서전 <누군가에게 버팀목이 되는 삶이 아름답다>에서 동교동계의 우애를 이렇게 묘사했다.

‘동교동 캠프는 강한 유대감과 결속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대감은 인간적인 신뢰가 전제되지 않고는 형성될 수 없습니다. 오랜 세월 김대중 총재를 모시고 동고동락해 오는 가운데 생겨난 끈끈한 인간적 신뢰가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서양 속담이 있는데, 이만큼 동교동 캠프에 어울리는 말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우리 동교동 동지들은 말 그대로 눈물로 맺어진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온갖 탄압과 고립을 통해 형성된 이런 원초적인 연대 의식은 DJ를 대통령으로 밀어올린 힘이기도 했다. 그런데 권력을 쥔 지 2년 반 만에 이들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권·한 두 사람은 동교동의 양대 주축. 이 둘의 갈등은 동교동계로 하여금 상도동계가 남긴 타산지석의 교훈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있다.

현재 민주당에서 동교동계로 분류될 수 있는 의원은 30명 정도. 권노갑·한화갑 최고위원, 김옥두 총장, 최재승·설 훈·윤철상 의원과 남궁진 청와대 정무수석이 이른바 가신 7인방으로 불린다. 여기에 배기선·배기운 의원을 더한 가신 그룹이 동교동계의 최대 핵심 인물들이다. DJ의 동교동 집에서 공고동락했던 이들이 바로 좁은 의미에서의 동교동계다.

이들 다음으로 당에서 DJ를 보좌했던 비서 출신 그룹을 꼽을 수 있다. 정동채·문희상·이 협·김태식·장성민·이강래·전갑길 의원이 비서 출신 동교동계 의원으로 분류된다. 당료 출신으로는 한광옥·김영배·박광태·안동선·이훈평·조재환·이윤수·김충조·정균환·김방림 의원이 꼽힌다.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장관과 김경재 의원은 미국 망명 시절 DJ를 모신 인연으로 동교동계에 합류한 ‘미주파’이다. 이들은 모두 넓은 의미의 동교동계라고 할 수 있다.
현재는 권위원과 한위원이 동급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원래 동교동계 서열로는 권위원이 좌장이고, 한위원은 합류 순서로만 본다면 ‘넘버3’에 불과하다.

둘은 그 동안 맡은 역할의 중량감에서도 차이가 난다. 권위원은 1960년대부터 공식 직함을 가지고 DJ를 보좌했다. 권위원은 특유의 친화력과 너른 발로 단시일 내에 김대통령의 최측근이 되었다. 활동적이고 저돌적인 성향이 대권을 꿈꾸던 DJ의 눈에 든 셈이다. 그런 신임을 바탕으로 권위원은 승승장구했다. 1985년 공천을 받고도 DJ의 만류 한마디에 총선 출마를 포기할 정도로 충성심을 보인 권위원은 1988년 13대 총선에서 동교동 가신 가운데 1순위로 금배지를 달았다.

반면 한위원은 1980년에 가서야 정책전문위원이라는 공식 타이틀을 얻을 정도로 ‘출세’가 늦었다. 한위원은 그때까지 겨우 외곽 조직 관리, 정책과 공보 업무 등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1988년 DJ는 동교동 3인방에게 똑같은 기회를 주었다. 권노갑에게 목포 출마를, 김옥두에게 전국구를, 한화갑에게는 신안 출마를 권했다. 그러나 한화갑과 김옥두는 1978년 받은 실형으로 피선거권이 없다는 선관위의 유권 해석에 따라 중도 하차하고 말았다.

한위원의 한 측근은 “한위원이 13대 국회에 진출하지 못한 것이 권위원과의 격차를 벌려 놓았으며 그 틈새를 메운 것이 한광옥씨였다”라고 술회했다. 그는 또 한화갑 위원이 13대에 진출했더라면 그때 벌써 동교동은 양갑 체제로 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위원도 이 점을 통감하고 있다. 그는 집권 초에 나온 <대통령을 만든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출마 좌절은) 정치적으로 나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후유증을 남기고 있다’라고 썼다.

1세대 3인방이 동교동으로 합류한 것은 1960년대. 권위원은 1963년, 김총장은 1965년, 한위원은 1967년부터 동교동 생활을 시작했다. 6, 7대 총선,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신과 서울의 봄을 겪으면서 이들은 온갖 고초를 겪었지만, 한번도 동교동을 떠나지 않았다. 동교동계인 한 의원은 “이들 3인과 DJ는 그 고난의 시기를 함께 보내면서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로 발전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1세대는 실무적인 개인 비서 역할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DJ의 정치 동반자들은 김상현·예춘호·박영록·양순직·최영근·김녹영 씨 등 전·현직 의원들이었다.
동교동계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85년 김대중씨가 미국에서 귀국한 다음부터이다. 귀국 직후 꾸려진 첫 비서진이 권노갑·김옥두·한화갑·설 훈·배기선·이석현 여섯 사람이다. 이석현 전 의원은 당시를 “1세대 3인은 올드 브라더, 새로 참여한 우리들은 영 브라더라고 불렸다”라고 기억했다. 1986년에는 민추협 전문위원이던 남궁진 현 정무수석이 합류했고, 1987년에 김홍일 의원의 경희대 선배인 최재승 의원이 동교동에 들어왔다. 수행팀의 일원이었던 윤철상 의원도 이때부터 비서로 새출발했다. 이로써 현재의 동교동계가 완성되었다.

동교동계는 국내의 여러 정치 계파 가운데 가장 많이 탄압을 받아온 집단이다. 이런 외부의 탄압은 동교동계에게 특유의 응집력을 갖게 한 반면, 외부 인사들에게는 동교동을 가까이할 수 없게 만들었다. 탄압을 받다 보니 간혹 배신자가 나오기도 했고, 충성심이 검증된 사람이 아니면 신뢰하지 않는 풍토를 낳기도 했다. 이런 탓에 동교동계는 자의 반 타의 반 고립되었고, 그것이 나중에는 배타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고 동교동계의 한 의원은 분석했다. 과거 소수파 시절에는 강점이었던 이런 성향이 평민당 이후 동교동계가 당내 주류로 자리 잡게 되면서부터는 족쇄로 작용하게 되었다.

가령 상도동계에는 범상도동계라는 말이 없다. 영입된 인사들이 그냥 상도동계, 혹은 민주계라는 이름으로 흡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교동계는 끊임 없는 영입을 통해 당의 외연을 넓히면서도, 영입 인사들을 동교동계 안으로 흡수하는 데에는 인색했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범동교동계나 영입파일 뿐이었다. 이는 동교동계가 집권 이후 당내에서는 권력을 과점하는 집단으로, 국민에게는 낡은 정치 세력으로 치부되는 결과를 자초했다.

실제로 동교동계의 당권 과점 현상은 집권 이후 당 3역의 면면을 살펴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당의 중추인 사무총장은 정균환-한화갑-김옥두 의원이 맡았다. 지금껏 비동교동 인사가 맡아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원내총무를 맡은 인사도 박상천-한화갑-손세일-박상천-정균환 의원 등이었다. 유일하게 정책위의장만 동교동계가 없다. 김원길-장영철-임채정-이재정-이해찬 의원 등 집권 이후 역대 정책위의장은 모두 비동교동계 인사이다. 당3역을 제외하면 가장 핵심 당직인 기조실장도 설 훈-정동채-최재승-정동채 순으로 동교동계 세 사람이 돌아가면서 맡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주요 당직을 동교동이 독식하는 현상은 집권 2년 반 동안 계속되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동교동계의 한 의원은 “총재의 의향을 정확히 읽고 따를 수 있는 측근이 주요 당직을 맡을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초·재선 의원들은 동교동계가 당을 장악해 당이 집권당 구실을 못한 채 정체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동교동계의 또 다른 약점으로 흔히 정치력 부재가 거론된다. 이는 DJ의 용인술에서 말미암은 측면도 크다. 상도동계는 역할보다는 위계로 짜인 조직이었다. YS가 총사령관이라면 김동영·최형우 전 의원은 군단장, 김덕룡 의원은 사단장 임무를 부여받는 식이었다. 따라서 상도동계 가신들은 모두 다 ‘작은 YS’로서 독자 행동이 허용되었고, 상도동의 급속한 분화에는 이런 측면이 크게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반면 DJ는 철저하게 가신들을 분할 통치하는 스타일이었다. 예를 들어 권노갑에게는 조직과 자금을, 한화갑에게는 외부 관계와 정책을, 김옥두에게는 경호와 비서 역할을 맡기는 식이었다. 동교동계 가신들은 자기가 맡은 역할 범위를 벗어나 본 일이 없다. 이것이 패밀리의 결속에 큰 힘이 된 것도 사실이지만, 독자적인 대중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데는 약점으로 작용했다.
흔히 현재 정국이 파행을 겪는 큰 이유 중의 하나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정치력 부재를 꼽는다. 그러나 동교동계도 이같은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견이 많다. 정치인이라기보다는 비서로 키워진 동교동계 핵심들은 어떤 권한도 행사하지 못했고, 창조적인 정치력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모두 청와대만 쳐다볼 뿐이다.
동교동계의 정치력 부재는 이들의 현실 정치 경험이 짧기 때문이기도 하다. 좌장인 권위원이 국회에 들어간 것이 13대 때인 1988년. 한의원이나 김총장은 이제 3선이다. 선수로만 본다면 당내 중견일 뿐이다. 이는 다선 의원이 즐비했던 민주계와 다른 점이다. 당내 일부에서 김상현 전 의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민정계라는 라이벌과 겨루었던 민주계와 달리 당내에 대항마가 없다는 점도 동교동계의 불운이다. 민정계와 합당해서 민자당을 꾸린 다음 집권했던 상도동계는 상대적으로 더 보수적인 민정계 덕분에 끝까지 당내 개혁 세력의 상징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동교동계는 평민당 이후 대항마를 갖지 못한 채 스스로 정체해 버렸다.

그러나 동교동계의 가장 큰 불운은 집권 초기 개혁의 주체로서 확실한 역할을 할 기회를 스스로 놓쳐 버렸다는 점이다.

율곡 이 이는 집권자의 유형을 창업형·수성형·경장(更張)형(개혁형)으로 구분한 뒤 각각 유형에 따라 집권자가 쓸 수 있는 인재의 종류도 달라진다고 적었다. 즉 창업형 집권자는 믿을 수 있는 측근들을 전진 배치해야 하고, 수성형 집권자는 테크너크랫 중심으로 가야 하며, 경장형 집권자는 초기에는 측근들을 전면 배치해서 개혁을 하고, 후반기에는 테크너크랫을 배치해서 나라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동교동계인 문희상 의원에 따르면 현정부는 경장형에 속한다. 즉 초기에 측근들이 개혁의 주체가 되어 과감한 개혁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초기에 테크너크랫 중심으로 가면서 과감한 개혁을 못했고, 결국 민심을 잃고 말았다. 문의원은 “나중에야 동교동의 전진 배치 얘기가 나왔으나 순서가 뒤바뀌었다”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런 점에서 1997년 대선 직전 동교동계 가신 7인이 ‘임명직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야말로 동교동계 비극의 출발점일 수도 있다. 그들은 집권 초기에 개혁 주체로 전면에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막았다. 문민 정부 시절 상도동계의 전횡이 부른 파국을 과도하게 의식한 DJ도 이들을 당에 묶어놓기에 바빴다. 그러다가 국정이 뒤얽힌 다음에야 동교동계 전면 배치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동교동계는 개혁성도 역동성도 다 잃어버린 보수적인 집단이 되고 말았다. 오히려 국민들에게 동교동계는 권력형 비리 의혹에 시달리거나, 산하 기관에 낙하산 인사를 투입하고, 개혁파 의원들의 당내 민주화 의지를 꺾는 수구적인 이미지로 비치고 있다.

이런 동교동계 상층부의 이미지 실추는 이미 동교동계 안에서도 비판받고 있다. 동교동계의 한 전직 의원은 “초심으로 돌아가서 대통령을 불편하지 않게 해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초·재선 의원 모임을 이끌고 있는 한 의원도 “동교동계는 이미 개혁의 주체가 아니다. 이제 동교동계의 유일한 몫은 2선에서 자중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나서야 할 때 나서지 못하고, 물러서야 할 때 물러서지 못하고 있는 것, 이것이 동교동계의 비극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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