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익장' 정주영 여전히 힘 세다
  • 張榮熙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9.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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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력 있는 경제인 1위, 지목률 무려 86%… 이건희 주춤, 김우중 추락
평양 목련관에서는 9월29일 때아닌 현대그룹 사가가 울려퍼졌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과 <고향의 봄>도 터져 나왔다. 현대그룹 방북단 일행과 북한 인사들 사이에 노래 자랑이 벌어진 이 자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에게 ‘최상의 배려’를 하기 위해 마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마저도 ‘최고의 한국 기업인’으로 떠받드는 정주영 명예회장(84·공식 직함은 현대건설 대표이사 명예회장). 그는 한국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기업인이다. 이같은 사실은 이번 여론조사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종합 평가에서 대통령 다음으로 영향력이 큰 인물로 지목되었으며, 경제인 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1등이었다. 지목률이 무려 86.2%(3인 복수 응답).

이 결과에 대한 현대그룹의 반응은 이랬다. “한국 경제의 산 증인이라는 사실 외에도 그가 필생의 업으로 여기는 대북 사업이 국민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은 것 같다. 대북 사업은 민족 사업이자 평화 사업 아니냐.”

과연 한국인들은 그의 올해 행적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 6월에 소떼를 몰고 방북해 큰 일을 낼 것이라는 예감을 갖게 만들었던 터라 그의 최근 대북 사업 성과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현대 신화’를 일군 정명예회장은 이미 창업 반 세기를 지켜본 기업인이다. ‘정주영 경영학’은 대학(숭실대 등) 강단에 섰다. 20세기를 화려하게 마감할 경제인 가운데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주영. 그가 21세기에 또 어떤 신화를 만들어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수년간 1위 지키던 이건희 2위로 밀려

‘경쟁자’가 너무 선전하는 바람에, 최근 수년간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57·공식 직함은 삼성전자 대표이사 회장)은 2위로 밀려났다. 이회장이 워낙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아 국민에게 큰 인상을 남길 계기가 없어 불리하던 차에, 바람 잘 날 없이 삼성그룹을 흔든 ‘악재’가 그의 평판에 손상을 주었을 것이다. 변칙 증여 문제가 도덕성 시비를, 자동차 사업 실패가 사회 일각에서 ‘실패한 경영인 퇴진’ 1호로 지목될 만큼 부정적 반향을 불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영향력은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위이기는 하지만 지목률이 74.1%(3인 복수 응답)로 매우 높으며, 종합 순위에서도 6위의 영향력을 갖고 있다. 그는 특히 언론인·행정 관료·법조인 들로부터 한국의 대표 기업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회장이 가진 이런 영향력은 한국 사회에서 삼성그룹의 영향력을 웅변한다고 볼 수 있지만, 동시에 2세 경영인인 그의 경영 능력도 평가되고 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는 87년에 경영권을 넘겨받은 ‘가장 오래된’ 2세 경영자이다.

이회장은 94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 보자’는 신경영을 기치로 내걸어 사람들의 시선을 삼성에 붙들어매는 데 성공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의 경영 화두는 과감한 구조 조정을 통한 경쟁력 제고와 질 경영.

올해 조사에서 두드러진 변화는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63)의 위상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세 번째 영향력 있는 기업인(지목률 28.9%)으로 꼽혀 재계에 일정한 지분을 갖고 있는 경영자로 평가되었지만, 영향력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대우그룹이 사실상 해체되었고, 그 또한 이미 대우그룹 회장 지위를 잃었을 뿐더러, 12개 주요 계열사에 대한 워크아웃(기업 개선 작업) 계획이 마련되는 11월6일께는 그가 그토록 간청하는 대우자동차 경영자 지위도 잃을 공산이 크다. 이미 그는 ‘재계 총리’인 전경련 회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죽도록 일만 한’ 그에게 이런 현실은 가혹하게도 비치지만, 그의 패착이 한국 경제에 큰 주름을 지웠다는 점에서 그는 면책될 수 없다. 그에게로 쏠리는 마지막 관심은 그가 마지막 소망이라고 말한 ‘명예로운 퇴진’을 할 것인가에 있다.

기업인의 영향력, 그룹 위상과 정비례

기업인에 대한 영향력 평가가 소속 그룹의 위상과 정비례한다는 사실도 이번 조사에서 두드러진다. LG그룹 구본무 회장(54)이 현대·삼성·대우에 이어 4위를 차지한 것이다. 95년 2월 구자경 회장(74)으로부터 경영 바통을 이어받은 구회장은 외유내강의 경영자로 정평이 나 있다. 구회장이 그가 대표이사 회장으로 있는 전자·화학 이사회에 빠짐없이 참석해 책임 경영을 실천하는 사실에 좋은 점수를 주는 경영 전문가도 적지 않다.

흥미로운 것은 구자경 명예회장이 5등을 차지했다는 사실이다. LG그룹의 영향력을 드러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매주 월·수 요일 회사에 나가지만 공익 사업 업무를 챙기는 데 그치고 그룹 경영은 전적으로 아들에게 맡겼다. 고향 친구나 재계 원로 들과 곤지암 골프장에 모습을 보이거나, 충남 성환에 있는 연암축산원예전문대학 실습 농장에서 난 재배로 소일한다.

손길승 SK그룹 회장(58)이 6등을 차지한 것은 ‘이변’이다. 그가 전문 경영인이기 때문이다. SK그룹은 지난해 최종현 회장이 작고하자 아들인 최태원 (주)SK 회장에게 대권을 물려주지 않고 손회장에게 바통을 넘겼다. 관행과 다른 선택이었다.

현정권이 전문 경영인 체제를 유도하는 기류를 탄 것이지만, 손회장이 그룹내 신망이 두텁고 경영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면 6위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근 한국경영학회가 ‘5대 그룹 최초의 전문 경영인 회장으로 한국형 기업 문화의 새 장을 열고 견실한 기업 경영으로 재계의 모범이 된 점을 높이 평가’한다는 이유로 그에게 경영자 대상을 준 것은 밖에서도 그를 평가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손회장은 그의 경영 솜씨를 언제까지 보일 수 있을까. 2∼3년내 회장 자리를 내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지만, 그가 한국의 최고 경영자 반열에 당당히 오른 것은 틀림없다.

정몽구(61)·정몽헌(51) 현대그룹 공동회장이 나란히 7∼8위를 차지한 것도 이채롭다. 정몽구 회장은 현대자동차·기아자동차 대표이사 회장으로 자동차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그는 차기 전경련 회장으로도 유력하다. 정몽헌 회장은 전자·건설 부문을 챙기며 대북 사업에도 몰두하고 있다.

사실상 후계 구도가 마무리된 현대그룹에서 ‘몽구 회장이 국내 현대의 대표 얼굴을, 몽헌 회장은 대외 업무를 총괄’하는 것으로 역할을 분담하고 있다. 이쯤되면 누가 포스트 왕회장인지를 가리려는 시도는 무의미한 것 아닐까?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63)은 여성 경제인의 대표 주자로서 이번 조사에서 10위권 안에 들었다. 7월 여성경제인연합회 창설을 주도하고 9월 국민회의 신당 창당 발기인 공동 대표가 되는 등 최근 부쩍 장회장을 주목하게 하는 ‘뉴스’가 생성된 것도 그의 영향력을 높이는 데 보탬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들은 기업인에게 부러움과 질시라는 두 가지 정서를 갖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막강한 영향력 집단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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