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탈당하고 정치권 확 바꿔라”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0.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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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미디어리서치 공동 ‘21세기 한국 정치’ 여론조사
‘바꿔라.’ 정치권을 향해 국민들이 외치는 말이다. 뭘 바꾸라고? 자식과 마누라만 빼고 모두 바꾸라고 한 기업인이 한 말을 패러디한다면 ‘도덕성은 살리고 나머지는 다 바꿔라’쯤 될까. 대통령은 탈당해서 초당적인 국정 책임자로 옷을 바꾸어 입고, 여야 정당은 과감히 물갈이해서 인물을 확 바꾼 다음, 우리 정치를 좀더 개혁적인 모습으로 바꾸어 보자. <시사저널 designtimesp=10226>이 여론조사 전문 기관인 미디어리서치와 공동으로 전국의 성인 남녀 1,000명을 조사한 결과, 21세기를 맞는 우리 국민들은 정치권을 향해 이런 화두를 던지고 있었다.

국민들은 우선 김대중 대통령부터 ‘정치권 바꾸기’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신당에 어떤 형식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대해 국민 다수는 ‘탈당해서 대통령 직에만 충실하는 것이 좋다’(63.7%)고 답했다. ‘명예총재를 맡아 2선으로 후퇴하는 것이 좋다’(14.2%)는 응답까지 더한다면 국민 10명 중 8명은 김대중 대통령이 정쟁의 일선에서 물러나 대통령 직에만 충실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 대학을 나온 20∼30대 젊은층에서 이런 욕구가 절대적으로 높게(72.4%) 나타났다.
당적 이탈 요구, 대통령 불신 표시는 아닌 듯

국민의 뜻이 대통령 불신에 있지 않음은 다른 여론조사 결과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최근 한 신문의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68%가 DJ의 국정 운영에 대해 잘했다고 평가했다. 주요 정치 지도자들의 ‘역할 평가’를 조사한 다른 신문의 여론조사에서도 DJ는 김종필 총리나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다. 즉 국민들은 정국 혼란을 두고 대통령이 임무 수행에 실패했다고 보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왜 DJ에게 당적 이탈을 요구하는가.

정치학자 ㅅ씨(고려대 강사)는 ‘대통령 스스로 구시대 정치를 청산하고 21세기 정치의 틀을 만드는 데 밑거름이 되어 달라는 뜻이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이 정쟁에 발목을 잡힌 나머지 정상적인 국정 운영마저 차질이 빚어지지 않을까 국민들이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민심을 해석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당적을 떠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민주신당 김민석 대변인은 <시사저널 designtimesp=10237>의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대통령이 정파를 초월했으면 하는 기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조사 결과에 대해 이해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대통령 책임제 국가에서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맡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민주신당 이재정 총무위원장도 “정치학 이론으로도 대통령의 당적 이탈 요구는 맞지 않다”라고 말했다. “진보적 정치인을 바란다” 가장 많아

물론 ‘대통령제에서 책임 정치를 위해 민주신당 총재를 맡아야 한다’는 여론도 11.6%를 차지했다. 이같이 응답한 사람들은 농·임·어업 종사자(26.7%), 광주·전라 지역 주민(29.3%), 민주신당 후보 지지층(24.5%)에서 많았다. 물론 이들이 정치학 이론에 밝아서 이렇게 응답한 것은 아니다(12쪽 상자 기사 참조).

대통령 당적 이탈에 이어 국민들이 두 번째로 정치권에 ‘바꾸기’를 요구하는 대상은 현역 정치인들이다. 국민들은 4월 총선에서 지지 후보를 결정하는 잣대로 전문성(28.4%)이나 개혁성(20.0%)보다 참신성(39.8%)을 먼저 꼽았다. 참신성이라는 말처럼 애매한 말도 없다. ‘현재와는 다른 인물’ ‘무조건 새로운 인물’ 외에는 담긴 내용물이 없다. 그런데도 국민들이 참신성을 첫째 조건으로 꼽은 이유는 무척 간단하다. 현재의 정치인들이 싫다는 것뿐이다.

이런 국민들의 정서는 정당 지지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한나라당(18.7%)이나 민주신당(18.4%) 모두 20%도 안 되는 지지율로 도토리 키재기를 하고 있는 데 반해 지지 정당이 없다는 의견은 56.4%에 이르고 있다(국민회의 지지율은 민주신당 지지율 조사로 대체했음). 그러나 무당파가 많다는 것이 정치에 대한 무관심의 척도가 되지는 않는다. 국민 10명 중 8명(78.8%)은 4월 총선에서 투표하겠다고 응답했다. 다가오는 총선에서 국민 스스로 정치권 바꾸기를 어떻게 매듭지을지 두고볼 일이다(18~19쪽 딸린 기사 참조).

‘DJ 당적 이탈’ ‘현역 의원 물갈이’에 이어 국민들이 세 번째로 바꾸기 대상으로 삼은 것은 보수적인 정치 현실이다.

‘21세기 정치 지도자의 바람직한 정치적 성향’을 묻는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절반 정도(47.6%)가 ‘진보’적인 정치 지도자를 원한다고 답했다. 20∼30대는 물론 40대 이상도 가장 많은 수가 ‘진보’를 꼽았으며, 이런 응답자에는 직업·학력·지역이 고르게 망라되었다. 한나라당 지지자(56.7%)와 민주신당 지지자(51.1%)는 물론 자민련 지지자들(48.9%)까지 이 대열에 동참했다.

심지어 ‘자신의 정치적 성향은 어디에 속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가장 많은 36.6%가 ‘진보에 속한다’고 말했으며, ‘중도’나 ‘보수’라고 자신의 성향을 밝힌 사람들에서도 각각 26.5%와 26.7%가 21세기에는 진보적인 정치 지도자가 나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응답했다. 이런 답변이 나온 것은 ‘진보’라는 개념을 이념적인 측면보다는 ‘변화와 개혁’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임혁백 교수(고려대·정치학)는 “진보나 보수를 과거의 잣대로 보아서는 안된다”라면서,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의식이 진보적인 정치인이 출현하기를 기대하는 형태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신과 전문의 백상창 박사(정신분석정치학회 회장)도 우리 정치 전반에 대해 느끼는 유권자들의 불안과 불신이 이런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면서 ‘진보’란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갈망’이라고 해석했다.

정치인 첫째 자질로 ‘개혁성·도덕성’ 꼽아

그러나 변화와 개혁에 대한 국민의 바람이 아직까지는 뚜렷한 귀착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시사저널 designtimesp=10256>은 정치 지도자의 바람직한 정치적 지향을 묻는 설문의 답변 항목으로 ‘진보·중도좌파·중도·중도우파·보수’ 등 다섯 가치를 주었다. 그 결과 주관적 해석이 가능한 ‘진보’ 항목에는 많이 응답한 반면 이념적 색깔이 상대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중도좌파’ 항목에는 7.5%만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이 점은 정당 지지도에서 진보 성향인 민주노동당 지지율이 2.0%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더불어 아직까지 우리 사회의 이념적 지형이 다양해지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진보적인 정치 지도자를 원하면서도 중도좌파는 수용하지 못하는 국민 정서에 대해서 정치학자 ㅅ씨는 “우리 사회에는 아직까지 정책적인 이념 정당이 없기 때문에 국민들도 추상적인 개혁만 원할 뿐 구체적인 개혁의 주체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풀이했다. 그는 민주노동당이 부진한 데 대해서도 이 정당이 과거의 이념적 틀에 얽매여서 다양한 정책적 욕구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반면 ‘21세기 정치인이 갖추어야 할 자질’을 물은 것에 ‘개혁성과 도덕성’(52.8%)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가장 많았다는 점에서 국민들이 원하는 ‘진보’의 정치적 실체를 유추해볼 수 있다. 새 천년에도 정치인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로 ‘경제 전문성’(28.3%)이나 ‘정보화 수준’(7.7%)보다 ‘개혁성과 도덕성’이 꼽히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정치의 어두운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임혁백 교수는 이에 대해 투명성은 20세기의 과제라면서, 국민들이 21세기 정치인이 갖추어야 할 자질로 여전히 투명성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 우리 정치가 20세기 과제조차 완수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즉 정치적 기교를 부리기 전에 기본기부터 더 닦으라는 국민들의 충고인 셈이다.

<시사저널 designtimesp=10263>은 이밖에도 국민들의 정치 관심도 전반에 대해 조사했다. 그 결과 신문·잡지·방송의 정치 관련 소식을 거의 매일 꼼꼼히 보고 있다는 사람은 23.3%에 그쳤으며, 자기 지역 국회의원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는 응답자가 38.1%로 나타나 우리 국민들의 평소 정치 관심도는 낮은 편이었다. 정치 관심도는 40대 이상 기성 세대보다 20∼30대 젊은층에서 더 낮게 나타났으며, 특히 20대 대학생들의 정치 관심도가 가장 낮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런 정치 무관심이 정치 참여 무관심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응답자의 다수(60.3%)가 자신의 한 표가 정치에 영향을 미친다고 응답했으며, 78.8%가 4월 총선에서 투표에 참가하겠다고 밝혔다. 즉 과반수 응답자가 정치 참여를 의미 있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비율은 20∼30대 젊은층에서 40대 이상 층보다 약간 낮은 53∼54%대를 기록하고 있다(20대와 30대의 투표 참가 의사는 77.3%와 74.8%). 그러나 젊은층일수록 시민단체 회원으로 가입(20대의 39.7%)하거나 선거운동 감시 활동에 참여하겠다(20대의 29.2%)는 등 직접적인 정치 참여 의사를 밝히는 사람이 많아 젊은이가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기존 통념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힘들다.

젊은층, 정치 참여에 적극적

이 밖에도 20∼30대 젊은이들은 마음에 드는 정치인의 선거운동을 하겠다(30대의 11.7%), 특정 정당의 당원으로 가입하겠다(30대의 5.1%), 마음에 드는 정치인에게 후원금을 내겠다(30대의 4.7%) 항목에서 기성 세대보다 적극적인 응답률을 보였다. 정치 참여 방법으로는 20대가 시민단체 가입이나 선거 감시 활동 등 간접적인 방법을 선호하는 데 반해, 30대는 선거운동·정당 가입·후원금 내기 등 직접적인 정치 활동을 원하는 비율이 높았다. 이는 1980년대에 20대를 보낸 30대들의 정치 의식이 20대들보다 더 적극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개인의 평소 지역 감정 유무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별로 없다(32.6%), 전혀 없다(25.8%) 등 ‘없다’고 응답한 사람이 57.8%였지만, 41.8%는 ‘있다’고 밝혔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면 나이 별로는 30대(44.5%)와 40대(48.4%)의 지역 감정 정서가 강했으며, 직업 별로는 자영업자(53.0%), 학력 별로는 중졸 이하(43.5%)에서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높았다. 이렇듯 지역 감정이 여전히 정치적 선택을 좌우하는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지역 문제 해결이 정치 개혁의 시급한 과제라는 점이 다시 한번 확인된 셈이다.
이는, 세기가 바뀌었으니 현재의 정국 파행은 이제 그만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난 2년 동안 김대통령은 경제를 회복시키고 남북 관계를 개선하는 등 업적을 쌓았지만, 국내 정치 분야만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소수 정권의 한계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권 내부에서 불거져 나온 여러 실책들이 정치 개혁의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옷로비 사건·파업 유도 파문·언론 문건 사건에서 천용택 전 국정원장의 발언 파문까지 하루도 정쟁이 잦아들 날이 없었다. 물론 배후에는 신주류 등 대통령 측근 인사들의 실책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 귀책 사유는 DJ의 인사 정책 실패로까지 거슬러올라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내 정치 파행으로 말미암은 국정 혼란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본 국민들이 DJ에게 국내 정치에 대한 욕심을 거두고 대통령 직에만 전념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의 ‘당적 이탈’ 요구가 대통령 개인에 대한 불신을 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 정국이 불안해진 가장 큰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대통령 측근’(26.7%)에게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가장 높게 나온 것을 보더라도 그렇다. ‘대통령 책임’(9.4%)이라고 말한 국민의 수는 ‘공동 여당의 책임’(13.2%), ‘여야 모두의 책임’(11.0%)이라고 말한 비율에 이어 네 번째였다. 이는 ‘야당인 한나라당 책임’(9.3%)이라는 대답과 비슷한 수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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