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논개’ 권노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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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0.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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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갈이 ‘살신 성인’… “다음 역할은 신진 후보 지원”
“권노갑 고문은 ‘논개’다.” 동교동계 좌장인 권노갑 고문의 불출마 성명서가 당에 도착하던 날 민주당의 한 주요 당직자는 이렇게 말했다. 권고문의 불출마 선언이 다른 당내 중진들의 불출마를 이끌어내기 위한 DJ의 뜻이 반영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 말이다.

그렇지만 물갈이 대상으로 지목된 의원들에게 권고문은 ‘논개’보다는 ‘저승 사자’와 같았던 모양이다. 권고문이 불출마 성명을 발표하자마자 물갈이 대상으로 오르내리던 해당 중진들과 호남 지역 의원들은 초긴장 상태에 들어갔다. 권고문의 전화를 일부러 피하는 의원들도 있었고, 일부 의원들은 아예 핸드폰을 음성 녹음으로 돌려놓기도 했다. 권고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느냐고 묻는 것이 의원들의 안부 인사가 되기도 했다.

권고문은 설 연휴 기간에 사흘 동안 광주 인근 골프장에 머무르며 불출마 의지를 다잡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때부터 그는 호남 지역 의원들을 하나둘 만나며 불출마를 설득했다. 조홍규 의원 등 호남 지역 의원 몇몇이 이때 권고문을 만났다. 설이 지난 후 권고문은 2월8일 불출마 성명을 발표했고, 이후 본격적인 ‘활약’을 시작했다. 그는 서울 북부의 송추 인근에 머무르면서 당내 중진과 호남 의원들은 직접 만나 교통 정리를 했다.2월9일에는 김상현 고문, 10일에는 김봉호 국회부의장을 만나 설득했고, 11일에는 김인곤·손세일·이 협 의원 등이, 12일에는 이강래 전 정무수석, 유인학·김병오 전 의원 등이 권고문을 면담했다.

그 결과 조순승·국창근·김성곤·김진배·채영석 의원 등 5명이 2월13일 기자회견을 하고 16대 총선에 불출마 의사를 밝혔다. 김인곤 의원도 2월12일 지구당 당직자들과 만나 총선 불출마 입장을 밝혔다.

권고문으로부터 통보받은 의원들의 태도도 각각이었다. 한 의원은 “식사 중 권고문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밥이 넘어가지 않더라”고 했다. 왜 내가 물갈이되어야 하느냐고 항의하는 의원들도 많았다. 한 중진은 권고문을 만난 날 저녁 여의도의 술집에 앉아 있다가 기자들에게 목격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권고문의 설득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편이었다고 권고문의 측근은 전했다. 먼저 살신 성인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큰 후유증은 없었다는 말이다.

16대 총선에 불출마 선언을 했지만 동교동계 좌장으로서 권고문의 역할은 줄어들지 않으리라는 것이 주변의 관측이다. “권고문은 프로 정치인이다. 프로에게는 배지가 있고 없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 주변 인사의 말이다.

권고문은 공천이 끝나는 대로 신진 인사들에게 정치 비법을 전수하는 역할을 맡을 계획이다. 지구당 이양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하고 정치 경험이 없는 신진 인사들에게 필요한 온갖 지원을 하는 병참 기지 역할을 맡을 것이라는 것이 측근들이 말하는 권고문의 향후 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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