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대폭 교체, 수도권 386 세대 전진 배치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0.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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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 의석 확보에 위기 느낀 DJ 최후 승부수… 호남 후보 대폭 교체, 386 세대 수도권 전진 배치
공천 심사가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면서 민주당의 총선 구상이 전모를 드러내고 있다. 민주당은 예상대로 호남 지역 현역 의원들을 대폭 물갈이하기로 했다. 또한 수도권에 학생운동 출신 386 세대들을 전진 배치했다. 당선 가능성이 있는 인사는 공천 신청 여부와 관계없이 총동원되고 있다. 이와 함께 ‘안정론’으로 대표되던 민주당의 총선 전략이 바뀔 조짐도 보이고 있다. ‘개혁 노선’을 전면에 내세워 한나라당이나 자민련의 보수 색깔과 확실한 차별성을 보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퍼지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의 목표는 하나로 모아진다. ‘수도권에서 60석을 확보하라.’ 당에 내려진 DJ의 특명이다. 민주당 이재정 정책위의장은 당의 모든 총선 전략이 수도권 승리를 위해 맞춰지고 있다면서 “다른 당과의 차별성을 위해 과감한 공천 물갈이를 한 다음 개혁 노선을 확실히 내세우게 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민주당이 수도권 승부에 당의 운명을 걸 수밖에 없는 사정은 자명하다. 민주당이 내건 이번 총선의 목표 의석 수는 1백20석. 비례대표로 당선이 가능한 의석이 20여 석 정도라고 볼 때 지역구에서 100석 정도를 얻어야 한다. 현재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에서 민주당이 당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곳은 40여 곳. 호남 29석은 석권이 가능하다고 보고, 영남권에서는 힘든 싸움을 예상하고 있다. 충청권 24곳 중에서 5∼6석 정도, 강원도 9곳 중에서 절반 정도는 무난히 얻으리라는 것이 자체 판단이다. 이럴 경우에도 목표인 1백20석을 채우기 위해서는 수도권에서 60여석 정도를 얻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현재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의 전체 의석 수는 97석. 이중 3분의 2 이상을 챙겨야 제16대 국회의 안정적인 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이 민주당의 계산이다. 호남 물갈이로 국민들의 정치권 개편 여론에 호응하고, 386 세대를 앞세워 개혁몰이를 시도하는 것 모두 수도권 표밭 공략을 위한 사전 포석이다.

처음엔 혼선… 낙천운동 만나자 ‘급류’

마무리되고 있는 공천 심사 결과를 보면 호남은 최소한 현역 의원 50% 이상이 물갈이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광주에서 조홍규(광산)·이길재(북구 을) 의원 등 3명 정도가, 전남은 김봉호(해남·진도)·김성곤(여수)·국창근(곡성·담양·장성)·조순승(순천)·김인곤(함평·영광)·정호선(나주) 의원 등 8∼9명 정도가, 전북에서는 채영석(군산)·김진배(부안) 의원 등 3∼4명 정도가 확실한 물갈이 대상으로 꼽히고 있다. 동교동계인 윤철상 의원(정읍)은 지역구를 포기하고 비례대표로 가기로 결정되었다.

장을병 공천심사위원장은 이런 대폭 물갈이에 대해 ‘공천 혁명’이라고 표현했다. 김민석 총재비서실장은 “호남 공천의 파급 효과가 수도권에 미칠 것이다”라면서 호남 물갈이가 수도권 민심 얻기에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전망했다.

호남 공천의 특징이 대규모 물갈이라면 수도권의 특징은 학생운동 출신 386 세대들을 전진 배치하는 것이다. 이인영(비례, 전대협 의장)·임종석(성동, 전 전대협 의장)·허인회(동대문 을, 전 고려대 총학생회장)·김윤태(마포 갑, 전 고려대 총학생회장)·김성호(강서 을, 전 <한겨레 designtimesp=9948> 기자)·이철상(관악 갑, 전 서울대 총학생회장)·우상호(서대문 갑·전 연세대 총학생회장) 씨가 서울 지역에서 공천이 내정되었다.

그러나 공천 물갈이는 막판으로 치달으면서 혼돈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2월15일 발표될 것으로 보였던 공천 결과는 몇몇 변수가 돌출하면서 2∼3일 늦추어졌다.

호남 물갈이는 당초 예상되던 60% 선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몇몇 낙천 검토 대상 의원들이 무소속 출마를 공언하며 끝까지 버텨 살아났고, 일부는 ‘대안 부재’ 등의 이유로 막판에 구제되기도 했다. 의정 활동 성적은 시원치 않으나 충성심이 강한 몇몇 의원이 구제되기도 했다. 호남 물갈이가 이처럼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자 당내에서는 호남 물갈이의 순도를 의심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은 사상 최대의 물갈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위안을 삼고 있다.

애초에 대거 물갈이될 것으로 예상되었던 수도권 중진들도 김상현 고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구제되는 쪽으로 조정되고 있다. 이종찬(종로)·정대철(중구) 전 의원이 대안 부재를 이유로 회생하였고, 김영배 전 총재권한대행(양천 을)은 무난히 공천을 받았다. 여론조사 결과가 나쁘게 나와 끝까지 애를 먹던 조세형 전 총재권한대행(광명)도 본인이 지역구 출마를 강력히 원했다. 그러나 이들 중진 중 당선 가능성이 낮은 몇몇은 앞으로도 신상에 변동이 생길 가능성이 여전히 있다. 공천이 확정된 다음에라도 대안이 나타날 경우 바꿀 수 있다는 것이 DJ의 생각이라고 한 고위 당직자는 전했다.

연초 개각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장관 직을 유임할 것으로 점쳐지던 이상룡 전 노동부장관(춘천)과 남궁석 전 정보통신부장관(용인)은 갑자기 차출되었다. 개각을 단행한 지 얼마 안되어 또다시 내각에 손댄다는 비판을 무릅쓰고 이들을 차출한 것에서도 총선 승리를 위한 DJ의 집념을 읽을 수 있다. 공천 신청을 하지 않았던 이철상(관악 갑, 전 서울대 총학생회장), 서상록(강남 을, 전 삼미그룹 부회장), 박병윤(시흥, <한국일보 designtimesp=9957> 부회장) 씨 등이 막판에 떠오른 것도 민주당의 수도권 승부 의지를 보여주는 지표들이다. 당선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차출하라. 이것이 DJ의 뜻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또한 민주당의 초조함을 드러내는 지표들이기도 하다. 민주당의 초조함은 386 세대들을 비롯한 신진 인사들의 공천 대상 지역이 수시로 바뀌고 있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애초 비례대표로 얘기되다가 최근 구로 갑으로 내정된 것으로 알려졌던 이인영씨는 다시 비례대표 얘기가 나오고 있다. 젊은 국제금융 전문가로 영입된 이승엽씨는 안양 동안 갑에서 서울 동작 갑이나 노원 갑으로 이동될 것으로 알려졌고, 최인호 변호사는 일산 을에서 서울 강동 을로 바뀐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김윤태씨는 강동 갑에서 마포 갑으로 바뀌었고, 김성호씨는 강동 을에서 강서 을로 조정되었다. 이밖에도 오영식·양재원·이종걸·장성민·함승희 씨 등의 지역구가 수시로 바뀌는 등 혼돈 양상을 겪고 있다.

이에 대해 당내에서조차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한 당직자는 “당이 여론조사 결과를 너무 맹신하는 것 아니냐”라고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호남 지역 공천에 대해서도 ‘총선 이후의 레임덕을 예방한다는 차원에서 너무 충성도 위주로 공천이 이뤄지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당초 계획한 대로 ‘공천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에는 대부분이 공감하고 있다.

이는 DJ가 공천 과정을 처음부터 일일이 챙겼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 민주당의 중론이다. 이번 공천의 기본 잣대는 여론조사와 직접적인 지역 실사 작업이었다. 이런 작업을 토대로 한 대폭적인 인물 개편은 이미 작년 말 자민련과의 통합이 무산되면서부터 준비되었다. DJ는 지난해 말 공식적인 당 기구와는 별도로 ㅈ·ㅈ·ㄱ 의원 등이 주축이 된 이른바 ‘마포팀’를 구성토록 했고, 여기서 사전에 치밀한 총선 전략과 공천 대상자의 실사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결과가 수시로 DJ에게 직보되었고, DJ는 이를 토대로 당의 공천 심사 작업을 철저하게 감독했다고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귀띔했다.

그러나 대폭적인 물갈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당내의 반발이 계속되었고, 민주당 핵심부는 이런 반발을 어떻게 뚫을 것인가를 놓고 논란을 벌이기도 했다. 수도권 선거를 위해 전략적으로 영입했던 386 세대들에 대한 여론이 높지 않게 나왔던 것도 민주당 지도부를 당혹스럽게 했다. 1월 초 잠시 물갈이 신중론이 퍼지기도 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래서 민주당 창당준비위의 조직책 선정위원장을 맡았던 정균환 총재 특보단장은 ‘호남 현역 의원들에 대한 물갈이는 신중하게 하겠다’는 말을 계속 흘렸다. 한때 수도권에서 386 세대들이 거의 공천받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총선시민연대가 낙천 대상 의원 명단을 발표하면서부터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국민들의 물갈이 욕구가 일시에 분출되었고, 이는 당내의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이어 공천 심사가 한창 진행되던 2월7일 <한국일보 designtimesp=9968>에 호남 의원들에 대한 당 내부 여론조사 결과가 보도되면서 물갈이 분위기는 급류를 탔다.

선거 기치, 안정론에서 개혁론으로 선회

총대는 동교동이 직접 멨다. 총선시민연대 명단에 포함되었던 동교동계 좌장 권노갑 고문은 2월8일 16대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다음 당내 중진들과 호남의 탈락 의원들을 설득하고, 불출마 선언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맡았다. 한화갑 전 총장과 김옥두 사무총장도 권고문과 수시로 연락하며 보조를 맞추었다. 최재승 의원은 386 세대들을 수도권에 전면 배치하겠다고 언론에 흘리면서 분위기를 잡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민주당은 이번 공천에서 전국적으로 30% 이상의 현역 의원을 교체했다. 국민들의 기존 정치인 교체 열망에 최대한 부응했다는 것이 민주당의 자체 판단이다.

그런 가운데 ‘안정론’ 대 ‘견제론’의 대결 양상으로 전개되리라고 예상되던 총선 구도에 변화가 일 조짐이 보이고 있다. 애초 민주당이 내건 총선 이슈는 안정론으로 요약된다. 개혁을 위해서는 안정 의석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동채 대표비서실장은 “정치 개혁·경제 안정·복지 증진을 이루겠다는 것이 우리 당의 목표이다. 이를 위해서도 안정 의석을 확보해야 한다고 국민들에게 설득할 것이다”라고 안정론의 내용을 풀어서 설명했다. 그러나 문제는 안정론이 한나라당의 견제론에 비해 경쟁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국민들은 민주당이 내세우는 안정론과 역대 정권들이 주장했던 안정론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한 고위당직자는 말했다. 다른 당직자도 “우리 당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오히려 개혁을 주장해야 하는데, 안정을 주장하다 보니 정체성이 살아나지 않고 있다”라고 토로했다. 실제로 각 언론이 조사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안정론은 견제론에 비해 경쟁력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황이 이렇게 나타나자 민주당은 고민에 빠졌다. 한 고위 당직자는 “총선 전략을 새롭게 짜야 할 필요가 생기고 있다”라고 언급했다. “승부는 수도권에서 결판 난다. 수도권 승부를 위해서도 새로운 이슈를 선점하는 것이 필요하다. 안정론 가지고는 안된다.” 한 민주당 당직자의 토로다.

한나라당의 움직임도 민주당의 총선 전략을 수정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꼽힌다. 한나라당은 애초에 현역 물갈이를 거의 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대폭 물갈이 방침이 정해지자 물갈이 폭을 조절하고 있다. 수도권에 학생운동 출신 386 세대를 전략적으로 배치하겠다는 복안도 가지고 있다. 이런 한나라당의 움직임을 민주당은 민감하게 지켜보고 있다.

“수도권에서는 여야 모두 전문가, 개혁적인 인사, 참신한 인사가 나설 것이다. 상품이 같다는 말이다. 상품에 차별성이 없을 때는 광고가 승패를 좌우한다.” 개혁 노선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당의 총선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 당직자의 말이다. 이재정 정책위의장도 “수도권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당의 정체성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라는 말로 민주당이 개혁 노선으로 총선 전략을 수정해야 함을 역설했다. 민주당의 초선 의원 모임인 ‘푸른 정치 모임’과 386 세대들의 모임인 ‘녹색연대 21’이 함께 개혁 노선을 주창하기 시작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녹색연대 21 회원인 우상호 부대변인은 “이제는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 때다”라는 말로 민주당의 이런 기류 변화를 설명했다. 바야흐로 개혁론이 서서히 부각되고 있는 셈이다.

자민련과의 차별화 전략도 이런 개혁몰이의 하나로 해석된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자민련이 보수 차별화를 추진한다면 우리는 개혁 차별화를 추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총선 때까지는 어차피 따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민주당 관계자들은 숨기지 않는다. 총대는 이인제 선대위원장이 멨다. 이인제 위원장은 “민주당과 자민련이 통합이 안된 이상 각자의 정책과 인물을 가지고 국민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위원장은 1월 말 당내 영입 개혁 세력들의 모임인 국민정치연구회 초청 강연에서 “자민련은 신보수주의를, 민주당은 개혁과 변화의 깃발을 들었다. 각자의 깃발로 국민의 선택을 받고, 그렇게 형성된 새로운 질서 속에서 더 큰 국가적 목표를 위해 협력하면 된다”라고 밝혔다. 이 위원장은 ‘연합공천 불가’를 여러 차례 언급했고, 2월13일 논산·금산 지역 출마를 공식화하면서 충청권 교두보 확보를 선언했다.

호남 대폭 물갈이와 수도권 386 전진 배치, 이를 통해 개혁 정당 모습을 보이는 것, 이것이 민주당의 총선 전략이다. 그러나 민주당의 앞날이 마냥 밝은 것만은 아니다.

총선까지는 앞으로 60일 남짓 남았다. 대폭 물갈이와 개혁 차별화라는 민주당의 승부수가 과연 먹혀들 것인가. 한나라당의 견제론이 위력을 발휘할 것인가.

“지역 구도가 여전히 총선 정국을 지배하고 있다. 호남 정권에 대한 거부감이 여전히 크다는 사실에서 비관적이다. 한국 역사상 개혁를 기치로 내건 정권이 성공한 예가 거의 없다. 과연 우리가 성공할 수 있을까.” 한 당직자의 이런 우려처럼 민주당은 초조감 속에서 본격적인 총선 정국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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