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ㆍ내각제 진압ㆍ정계 개편 ''일거삼득'' 노림수
  • 徐明淑 기자 ()
  • 승인 1999.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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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 되돌리기·내각제 반발 제압·정계 개편 분위기 조성’ 포석
사정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정치권에 나돌기 시작한 것은 한 달쯤 전부터였다. 위기에 몰린 현정권이 상황을 한순간에 반전시킬 무언가를 내놓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즈음 김태정 파동과 파업 유도 발언으로 한동안 위축되어 있던 검찰 주변에서 ‘검찰은 여론과 관계없이 확실한 힘(기소권)을 가진 조직이다. 결코 이대로 죽지는 않는다’는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특검제 도입을 놓고 여야가 막바지 샅바 싸움을 하는 와중에, 한나라당 일각에서 ‘여당이 계속 밀리기만 하는 게 뭔가 불안하다. 너무 밀어붙이다가는 도리어 뒤통수를 맞는 게 아니냐. 적당히 타협하자’는 타협론이 고개를 든 것도 사정에 대한 본능적인 직감과 공포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정권이 처한 정황과 집권 시기에 비추어 국면 전환용 사정은 불가능하다는 관측도 만만치 않았다. 힘을 발휘할 시기를 놓친 현정권이나 잇단 충격으로 빈사 상태에 빠진 검찰에는 사정을 주도할 만한 명분도, 힘도 없다는 것이었다. 정권 출범 직후 전개되었던 1차 사정이 오히려 편파·표적 시비를 불러일으키면서 정권에 부담만 되었던 점도 사정 불가능론의 근거로 꼽혔다. 지난 7월 초순까지만 해도 사정론과 불가능론은 다 그럴듯한 근거를 갖고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그러나 임창렬 경기도지사 부인 주혜란씨를 소환했다는 소식은 그 팽팽한 균형을 일거에 깨뜨렸다. 더욱이 주씨에 이어 임지사까지 부부가 동시에 구속되는 이례적인 상황이 숨가쁘게 전개되자, 정치권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임지사는 그동안 내부적으로는 골칫거리였지만, 국민들 사이에서는 DJ 정권의 대마(大馬) 중 하나로 꼽힌 인물이었다. 6·4 지방 선거를 앞두고 환란 책임론 때문에 그를 공천해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비등했지만, DJ는 임창렬 공천을 고수했다. 부인 주혜란씨와 김대통령의 두터운 친분 관계도 세상이 다 아는 터였다. 임창렬, 반부패 캠페인 위해 선택된 카드?

그 덕분에 임지사 부부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았고, 현정권의 실세 자치단체장으로 꼽혔다. 실제로 퇴출을 앞둔 경기은행측이 임씨 부부를 주된 로비 창구로 삼았던 것도 해당 지역 단체장이라는 점보다는 임씨 부부와 현정권 고위층과의 두터운 교분과 주씨의 폭넓은 사교 범위 때문이었다.

그런 임씨 부부의 비리를 세상에 까발리는 것은, DJ와 현정권으로서도 어느 정도 타격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DJ와 검찰은 부부를 동시에 구속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정치권으로서는 소름이 오싹 돋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DJ가 ‘대마’를 스스로 내던지면서까지 염두에 두었던 포석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김대통령은 싸늘해진 민심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집권층 내부의 도덕성과 개혁 의지를 국민에게 재확인시킬 필요를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고급 옷 로비 사건 이후 등 돌린 민심의 실상을 가감 없이 전해 달라는 김대통령의 권유로 그를 만났던 재야 원로의 증언은 이번 사정의 목적을 짐작케 한다. “김대통령은 현정권의 도덕성과 개혁성이 국민들로부터 의심받고 부인당하고 있다는 점을 무엇보다도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결코 그럴 수도, 그래서도 안되는 정권인데, 국민들이 DJ 정권도 그저그런 정권이라는 인식을 가지는 것 같다고 무척 안타까워했다. 그때부터 이미 집권층 내부의 비리부터 척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심을 굳힌 게 아닌가 한다.”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도 “그동안 최우선 과제인 경제 살리기에 주력하다 보니 부패 척결을 요구하는 민심을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한 감이 없지 않았다. 이제 경제도 나름으로 궤도에 오른 만큼, 국민들이 강하게 요구하는 부패 비리 척결 작업을 확대해 갈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임지사가 현정권의 반부패 캠페인을 위해 ‘선택된 카드’였음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정황도 있었다. 임지사는 지난 5월 생일 파티 소동 이후 자신을 보는 눈길이 일제히 싸늘해진 것을 감지하고, 주변에 상황을 알아보고 다녔다. 그 과정에서 그는 여권의 한 고위 인사로부터 “민심이 워낙 좋지 않아 희생양이 필요한 상황이다. 당신이 첫 희생양이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인 주혜란씨의 튀는 행동을 두고 못마땅해 했던 임지사는 그때부터 의식적으로 몸조심을 하면서 부인과 자주 언쟁을 벌였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 무렵 인천지검은 이미 임지사 주변에 대한 본격적인 내사에 돌입해 있었던 것이다.

한편 임지사에 대한 검찰의 수사결과가 나오자마자 이만섭 총재권한대행은 그에게 소명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서둘러 당원에 대한 최고의 중징계인 제명 조처를 단행했다. 또 국민회의 당보 책임자에게는 국민회의가 부패 척결의 선봉에 선 정당임을 최대한 강조하는 방향으로 당보를 제작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임지사 부부 구속과 동시에 신속하게 반부패 캠페인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2차 사정은 내각제 개헌 유보 과정에서 나타날 여야의 반발에 미리 쐐기를 박아두는 또 다른 정치적 포석도 깔고 있었다. 정치권에서는 한 달여 전부터 DJP가 내각제 연내 개헌 유보에 사실상 합의했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었다. 자민련의 충청권 의원들은 정치권의 짐작이 사실로 판명될 경우 결사 항전하겠다는 분위기였고, 야당 역시 약속 위반을 문제 삼아 정권 재신임을 묻겠다는 내부 전략을 세워놓고 있었다. YS는 한 발짝 더 나아가 “두 사람의 약속대로라면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는 올해 말로 끝난다”라면서 정권 퇴진 운동까지 벌일 태세였다.

따라서 DJ 정권으로서는 연내 내각제 개헌 유보 방침이 국민에게 공개되기 전에 정치권의 여러 세력들을 향해 쐐기를 박아두어야만 할 필요가 있었다 . 2차 사정이 내각제를 둘러싼 반발 제압용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정황 몇 가지. 우선 2차 사정의 신호탄 격인 임지사 부부 사건은 오랜 내사 끝에 JP의 내각제 연내 개헌 유보 방침이 노출된 시점과 때를 같이해 터져나왔다. 그동안 늘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위협하는 카드로 작용해온 이른바 세풍 사건에 대한 후속 수사도 공교롭게 비슷한 시점에 재개되었다.정치권 관측, 확산론·소멸론으로 엇갈려

더욱이 검찰은 내사 중인 사건을 절대로 확인해 주지 않는 관행에 비추어 이례적이리만큼 후속 사정의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예고했다. 대검의 고위 관계자는 주혜란씨를 갑작스레 소환한 것에 놀라워하는 언론사 기자들에게 “다른 지검에서도 준비 중인 사건이 많다. 앞으로 많이 터져나올 것이다”라고 귀띔했다. 또 다른 검찰 관계자는 “경기은행 퇴출 관련 로비에서 드러난 것처럼 다른 은행도 정치권을 상대로 로비를 했으며, 로비 자금이 어디로 흘러들어갔는지 상당한 수준의 조사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금융권 구조 조정 당시 퇴출된 충청·동화·대동·동남 은행들의 정치권 로비를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대부분이 자민련 의원들이 로비에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금융기관들이었다.

실제로 자민련의 한 초선 의원은 “개인적으로 별로 꺼림칙한 대목이 없는데도 등덜미가 써늘해지는 느낌이다. 정치 구력이 높을수록 뒤가 켕기기 마련인데, 튀다가 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검찰의 사정 예고편이 어떤 정치적 압박 효과를 거두고 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다.

뿐만 아니다. 이번 사정에는 당장의 내각제 반발 기류에 쐐기를 박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장차 전개될 정계 개편에 대비해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현정권이 구상하는‘국민 통합적인 신당 출범’이 현실화하려면 두 여당의 합당은 물론이거니와 한나라당의 일부가 가세해야 하는데, 이번 사정이 분위기 조성 작업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DJ의 다목적 사정은 일단 소기의 목적을 거둔 듯하다. 임창렬 지사 부부 구속에 대한 국민 여론은 매우 긍정적이다. 통신망에는 역시 ‘DJ 정권이다’‘이제 개혁을 본격적으로 할 것 같다’는 반응도 뜨고 있다. 그동안 DJ 정권과 거리를 두었거나 실망감을 표현했던 일부 시민단체도 조만간 반부패 네트워크를 구성해 정부의 부패 추방 캠페인을 지원하겠다는 방침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DJ의 2차 사정은 어떤 강도로 진행될 것인가. 이에 대한 정가의 관측은 확산론과 소멸론으로 엇갈리고 있다. 확산론자들은 편파 표적 시비에 휘말리면서 흐지부지 끝나고 만 1차 사정과는 강도와 지속성 면에서 다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선 정권이 처한 상황이나 대통령의 각오가 예전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수사해서) 나오는 게 있으면 무조건 사법 처리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안다. 이 정권에서 질긴 부패의 고리를 끊지 않고서는 이 나라에 미래가 없다는 것이 대통령의 확고한 소신이다”라고 강조했다. 최근 들어 정국 운영에서 가장 큰 입김을 행사하는 시민단체들의 부패 청산 요구도 사정 확산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반면 소멸론자들은 2차 사정 작업이 계속 진행되기는 하겠지만 거물급은 임지사 부부 선에서 그칠 것이라고 전망한다. 임지사 건만으로도 정권의 반부패 개혁 의지를 입증하고 정치권의 발목을 묶어두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한 데다, 정계 개편이라는 장기 포석을 위해서는 사정 결과를 ‘쥐고 흔드는 카드’로 활용하는 쪽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강도 늦출 경우 ‘역공’ 휘말릴 수도

최기선 인천시장과 국민회의 서정화 의원에 대한 검찰의 태도도 소멸론을 뒷받침하는 정황 근거 중 하나다. 서이석 전 경기은행장은 최시장과 서의원 등이 빈사 상태에 빠진 경기은행에 거액의 자금을 대출하도록 압력을 넣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인천지검은 ‘이들의 수뢰 의혹을 입증할 자료도 없고, 이들을 불러 소환 수사할 계획도 없다’고 밝혔다. 임지사 부부를 잇달아 소환할 때와는 딴판인 태도였다.

그러나 일단 활시위를 떠난 사건은 그 자체의 생명력을 지니는 법이다. 더욱이 그물망처럼 이어진 한국 사회의 부패 구조에서 정권이 버리기로 작정한 인물만 걸려든다는 보장이 없다.

임지사 부부 수뢰 건을 둘러싼 의혹은, 두 사람이 각각 1억원과 4억원을 받았다는 수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국민의 관심은 두 사람이 로비를 했을 고위층은 누구인가, 또 임지사 부부 외에도 로비 청탁을 받은 단체장이나 국회의원은 과연 없는가라는 쪽으로 재빠르게 옮아가고 있다.

검찰로서는 이 두 가지 궁금증을 후속 수사를 통해 국민이 납득할 만큼 명쾌하게 처리하지 않는 한, 지난해 1차 사정 때의 편파·표적 사정 시비와는 다른 측면에서 ‘제한 사정’시비에 휘말릴 가능성도 있다. 모든 의혹을 다 까발리자는 야당의 역공에 휘말릴 공산도 있다. 사정이 양날의 칼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정권을 완전히 내놓을 각오로 하지 않으면 사정은 성공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바로 사정이 지닌 양면성과 역동성 때문이다.

DJ는 다목적 포석을 담은 2차 사정의 목표를 완벽하게 이룰 수 있을까. 초반의 성공과 달리 오히려 역풍에 휘말리지 않을까. 그 여부는 전적으로 DJ의 반부패 의지가 캠페인성 구호인가 사생 결단의 각오인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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