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경제 미래‘닷컴’에 걸었다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0.08.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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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상거래 등 통한 ‘디지털 세계 경제’ 진입 시도
‘아시아를 뒤흔든 3일(Three days that shook Asia)’. 미국의 아시아 전문가 로버트 매닝은 얼마 전 발표한 한 칼럼에서 평양 남북 정상회담을 이렇게 표현했다. 미국 언론인 존 리드가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을 현장에서 체험해 저술한 <세계를 뒤흔든 10일(Ten days that shook the world)>이라는 책 제목을 연상케 하는 표현이다.

남북 정상회담은 분명 동북아 국제 정치라는 ‘아날로그 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해 ‘디지털 세계’의 한 단면이 드러났다는 점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상회담을 전후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그 주변 인물들이 발을 담그고 있는 디지털 세계의 단면들이 처음으로 노출된 것이다.

김위원장이 디지털 세계의 총아인 인터넷 마니아라는 사실을 언론이 처음으로 조명한 것은 정상회담 며칠 전 중국 방문 길에 ‘중국의 실리콘 밸리’라고 일컬어지는 중관촌(中關村)과 컴퓨터 제조업체인 롄샹 그룹을 찾은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이다.김정일 중관촌 방문에 담긴 상징적 의미

중국 IT(정보통신기술)산업의 상징인 중관촌 방문은 누가 결정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김정일 위원장과 그의 측근 인사들이었다. 베이징의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중국측은 처음에 중관촌이 아니라 상하이의 푸동 지구 시찰을 권유했다고 한다. 이곳은 중국 지도부의 개혁·개방 정책을 상징하는 지역이다. 중국측은 이곳을 김위원장에게 보여줌으로써 은연중에 북한을 중국식 개방 정책으로 유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위원장 측근 인사들이 푸동 지구보다는 베이징의 중관촌 방문을 권유했고, 김위원장이 이를 수락해 중관촌 방문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상하이 푸동이냐 중관촌이냐를 선택하는 것은 ‘김정일의 북한호’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가늠케 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가 중국측 제의를 거부하고 중관촌을 찾았다는 것은 상하이 푸동으로 대표되는 제조업 위주의‘ 굴뚝 산업’이 아니라 중관촌으로 상징되는 ‘IT와 첨단산업’ 쪽으로 북한을 끌고 가겠다는 의지가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 방문을 계기로 갑자기 우리 눈앞에 등장한 김정일 위원장과 북한의 신지도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과거의 아날로그적 세계 인식과 다른 그 무엇이 그들에게도 존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그리는 북한의 미래는 무엇인가.

지난 6월23일 이런 의문들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하는 뜻깊은 모임이 있었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와 하나로통신이 공동 주최한 ‘인터넷과 북한’이라는 심포지엄이었다. 이 심포지엄에 발제자로 참석한 일본 국제대학 글로벌통신연구소 노승준 박사는 `김위원장과 그를 측근에서 보좌하는 테크너크랫들을 ‘디지털 지도층’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규정해 화제를 모았다. 디지털 지도층이란 `인터넷 및 정보통신 분야에 대해 사활적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고, 기술적으로도 평균 이상의 이해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국가 정책에 반영할 의지를 가지고 있는 정부의 지도층이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미국의 클린턴과 고어, 싱가포르의 리콴유,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그리고 ‘사이버코리아21’ 정책을 적극 추진해 온 한국의 김대중 정부가 모두 이 범주에 든다.

그는 지난 7월19일 서울에 들른 길에 기자와 만났을 때, 김정일 위원장과 그 측근 인사들이 성장 과정에서 만화·영화·게임 등 영상 미디어에 익숙했던 그룹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디지털 보이’로서 성장기 체험을 공유하고 있는 엘리트 그룹이 북한 경제 회생의 키를 쥐고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지도층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정보통신이나 디지털 경제에만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관의 변화’까지 염두에 둔 개념이다. 과거 냉전 시대의 개념인 정치 및 이념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경제적·기술적 이익을 더 중시하는 새로운 지도층이 탄생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김위원장이 남북 정상회담에 응한 이유도 따지고 보면 `‘북한을 이끌고 있는 디지털 지도층 내부에서 생존을 위해서라도 세계적인 디지털 경제권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한다.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디지털 지도층 출현

노박사의 주장은 현재로서는 가설 수준이다. 그러나 정상회담 이후 북한이 보여주고 있는 발 빠른 행보의 이면에서 그가 묘사한 디지털 지도층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상회담 이후 북한 지도부는 매우 자신감을 갖게 된 듯하다. 이런 자신감을 발판으로 삼아 국제 무대에 발을 들여놓기 위한 움직임이 가속화하고 있다. 그 영역도 아날로그 세계와 디지털 세계 양쪽이다. 아날로그 세계에서 최근 전개된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북한 미사일 문제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 미사일 개발을 포기할 경우 평화 목적의 로켓 발사체 기술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한 데 이어, 미국 국방부 역시 7월21일 북한이 미사일을 포기할 경우 위성 발사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은 전화 통화에서 이같은 협상이 북·미 간에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분명한 것은 ‘미사일 문제 해결을 위한 제2의 제네바 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디지털 세계에서 일어난 움직임은 조용하면서도 컸다. 지난 7월8일 북한 공식 인터넷 사이트의 영문판이 전세계를 향해 송출을 시작한 것이다. 베이징에 본부를 두고 있는 ‘범태평양 조선민족 경제개발 촉진협회’(범태)가 운영하는 조선인포뱅크의 영문판 사이트(www.english. dprkorea.com)가 인터넷을 타고 전세계에 세련된 외양을 선보인 것이다(46~47쪽 딸린 기사 참조).

이 영문판 조선인포뱅크 사이트는 현재 범태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북한 인터넷 사업의 신호탄이다. 이것을 시발점으로 해서 기존 ‘조선어판’ 사이트를 완전히 개·보수한 새로운 사이트가 곧 열릴 예정이고, 앞으로 전자 상거래 등 다양한 사이트가 준비되고 있다고 한다.


윤곽 드러나는 북한의 디지털 전략

김정일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북한의 디지털 지도층은 단순히 학술회의 토론 자리에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살아 움직이는 실체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현재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디지털 세계 경제를 어떻게 인식하며 어떤 생존 전략을 추구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밝혀내는 일일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시사저널>은 이런 문제 의식을 가지고 베이징 등에서 활동하는 북한의 경협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이들이 ‘인터넷과 디지털 경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취재했다. 이들과 접촉해온 국내 대북 사업자들을 통한 간접 조사 및 공식·비공식 자료 입수 방법을 통해서이다(45쪽 상자 기사 참조). 이런 조사를 통해 북한의 경협 담당자들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는 디지털 세계 경제를 대단히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북한 경제의 활로를 여기서 찾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한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조사 내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이 생각하는 디지털 전략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는 점이다. 즉 첫출발은 북한의 현실을 감안한 사업 구조로부터 이루어진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대담한 형식으로 디지털 세계 경제 참여를 본격화한다는 것이다. 조사 내용에서 보듯 인터넷 제작 중심을 평양에 두되 웹사이트 및 상업 무역 활동은 베이징을 무대로 전개한다는 것이 북한의 전략이다. 오늘날 북한 체제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다시 말해 당분간은 북한내 특수 전문 집단이 이를 활용해 국제 무역이나 상거래에서 이익을 창출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일반 주민에게까지 공개되려면 상당한 시일이 필요할 것이다. 경협 파트너로 정보통신 선진 기업 선호할 듯

그러나 대외적으로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는 바로 ‘디지털 세계 경제’에 적극 편입하는 것이다. 이 점은 조사 자료에 ‘앞으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웹사이트로 발전시켜 미국이나 그밖의 영향력 있는 주권 시장에 등록한다’고 나타난 데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 계획대로라면 북한 실무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웹사이트를 궁극적으로는 미국 나스닥 시장 등 서방의 주식 시장에 상장하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북한에 대한 기존 인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이처럼 자유 분방하고 대담하게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김정일을 중심으로 한 북한의 디지털 지도층이 상당히 오랜 기간 인재 육성 및 발전 전략 모색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는 뜻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정보 통신을 전공하고 관련 분야에서 종사하다가 1998년 탈북한 ㄱ씨의 설명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그는 우선 북한을 저임금 노동력 시장으로 보는 남한 일부의 시각에 일침을 가했다. 북한 지도부는 저임금 노동력에 기반을 둔 경공업 산업으로는 국제 무대에서 승산이 없다는 점을 이미 간파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값싼 경공업 제품이 북한의 일반 가정에까지 침투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가격 경쟁을 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얘기이다.

반면 컴퓨터 소프트웨어나 생명공학 분야 그리고 이론 수학이나 이론 물리를 활용한 과학 기술 분야 등 몇몇 첨단 분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그는 지적했다. 그는 북한의 정보 통신이나 과학 기술 수준을 사회 전체의 보급률 등으로 평가해서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이들 분야를 효율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철저히 엘리트 중심의 특화한 교육 및 연구를 진행해 왔기 때문이다. 또 이를 위해서는 재정이 아무리 어려워도 아낌 없이 투자해 왔다. 이미 1970년대에 진공관식 컴퓨터를 도입했고, 1980년대 중반에 IBM 컴퓨터를 들여다 김일성대와 김책공대에 보급한 바 있다. 또한 1985년부터 영재 양성 학교인 평양1고등중학교와 전국의 1고등중학교에서 컴퓨터 교육을 시작했고, 1987년 소프트웨어 개발의 총본산인 조선콤퓨터센터가 문을 열면서 이미 세계적인 소프트웨어들을 선보였다.

김정일을 중심으로 한 북한 지도부의 경제 회생 전략은 바로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북한이 가지고 있는 몇몇 세계적인 기술 분야에 외부 자금과 사업화를 위한 노하우 등을 접목해 경제를 한꺼번에 도약시키겠다는 전략이다. 이 경우 남한의 수준을 따라잡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고 본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같은 발전 전략을 처음에는 일본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아 실현하려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면서 남한을 협력 대상으로 삼아 추진하려 한 것 같다고 ㄱ씨는 말한다. 따라서 앞으로 북한에 진출할 한국 기업들은 북측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회생 전략에 따르면, 남한의 일부 대기업 그리고 중소기업 중에서는 전자나 정보 통신 그리고 국제적인 기술을 갖춘 기업들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단순 저임금 노동력을 겨냥한 중소기업은 진출하기 어려우리라는 것이다.

북한 지도층의 이같은 전략을 감안할 때 최근 국내의 IT 관련 회사나 벤처 회사 들이 북한의 원천 기술을 활용해 베이징에 남북 합작 벤처 회사를 만들려는 시도를 하는 것은 나름으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아날로그 시대의 남북 협력 모델 대신 디지털 시대에 걸맞는 협력 모델을 창출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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