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의 미래를 ‘창업’하는 사람들
  • 金芳熙·朴在權·李哲鉉 기자 ()
  • 승인 1999.0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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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선정 ‘벤처 기업가 20인’/첨단·핵심 기술 장악한 명문대·대기업 출신… 기업 경쟁력·성장성 탁월
이동통신 단말기 생산 업체인 어필텔레콤 이가형 사장(40)이 이 분야 세계 최대 업체인 모토롤라 사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은 지난 7월이었다. 모토롤라는 이사장에게 놀라운 제안을 했다. 어필텔레콤이 생산한 단말기에 모토롤라 상표를 부착하는 조건(OEM 방식)으로 제품을 사겠다는 것이었다. 이 제안에는 모토롤라가 이 벤처 기업의 경영에 참여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이사장은 고심 끝에 ‘우리가 만든 제품을 연간 수백만 대 규모로 해외 시장에 팔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지난 11월 중순 모토롤라 사는 어필텔레콤 지분 51%를 사들였다. 인수 가격은 4천5백만 달러(약 6백억원). 경영권을 행사하기에 충분한 지분이었지만, 이사장을 비롯한 현 경영진의 경영권을 존중한다는 데도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사장이 어필텔레콤을 설립한 지 4년, 그가 다니던 삼성전자를 그만둔 지 7년여 만의 일이었다.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으로 유명한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 안철수 소장(38)이 한 다국적 기업으로부터 비슷한 제안을 받은 것은 97년 말. 인수 가격은 천만 달러. 협상을 시작하면 이 금액은 더 올라갔겠지만, 안소장은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다국적 기업이 자신의 연구소를 사들이려는 이유가 한글과컴퓨터를 인수하려 했던 마이크로소프트 사와 비슷해서였다.

이 다국적 기업의 목적은 전세계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시장을 장악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기업을 사들여 말살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서울대 의학 박사·단국대 교수 출신으로 자신의 작업과 제품에 강한 소명 의식을 가진 안소장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지난해 안소장은 오히려 자신을 삼키려 했던 업체를 포함해 세계적인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업체들과 직접 경쟁하기 위해 중국 시장에서 도전장을 내밀었다.
평균 연령 39세, 연구·개발 분야 경력자

비슷한 상황에서 전혀 다른 결정을 내리기는 했지만, 두 벤처 기업의 얘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두 기업 모두 직원과 투자자들에게 기쁨을 안겨 준 것이다. 다만 어필텔레콤은 기쁨의 내용이 엄청난 부였고,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는 뿌듯한 자부심이었다는 점이 달랐다. 무엇보다 두 기업은 기술력 하나로 자기 덩지의 수십만 배 이상 되는 세계적 기업들을 놀라게 했다.

지금까지 이런 성공담은 우리 귀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98년은 유독 달랐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에서도 벤처 기업의 성장세가 어느 해보다 두드러졌다. 물론 우울한 얘기들도 있었다. 가장 성공한 벤처 기업이라던 가산전자와 두인전자가 부도를 냈다. 아래아한글로 유명한 한글과컴퓨터는 부도 직전에 벤처 창업가들과 소비자 힘을 빌려 가까스로 연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벤처 기업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 벤처 업계는 이름 그대로 아찔한 성공과 끝 모를 추락의 가능성이 공존하는 세계다.

<시사저널>은 앞으로 우리에게 또 다른 성공담을 선사할 가능성이 큰 벤처 기업가 20인을 선정했다(26쪽 도표 참조). 대상 기업은 중소기업청에 등록되었거나 장외 주식 시장인 코스닥에 등록된 1천5백70개사. 벤처기업협회가 이 중 50여 사를 추천했고, 한국종합기술금융(KTB)을 비롯한 주요 창업 투자 회사 세 곳이 이들을 검증했다. 그밖에 코스닥 시장과 각 업계의 평판도 참고했다.

선정된 기업 가운데는 메디슨의 이민화 회장이나 어필텔레콤의 이가형 사장처럼 이미 유명세를 탄 사람에서부터 소프트맥스 정영희 사장(35), 인성정보통신 원종윤 사장(40) 같이 낯선 인물도 있다. 이들 회사의 규모 또한 수천억원대 매출액을 기록하고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아직까지 연구 개발에만 전념해 매출을 거의 올리지 못한 곳도 있다. 이는 선정 작업에서 현재의 기업 규모만을 따지지 않고, 세계 시장에서 통할 만한 경쟁력을 갖추었는지, 해당 분야가 성장성이 얼마나 큰지를 추가로 고려했기 때문이다.

이들 벤처 창업가들의 평균 연령은 39세. 몇몇 예외를 빼면 대부분 90년대 들어 창업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대기업, 그 가운데서도 연구·개발 분야에서 근무하다 독립했다.

이들 기업의 가장 큰 공통점은 적어도 해당 분야에서 기술력만큼은 세계적으로 손색이 없다는 점이다. 벤처 기업에 대한 투자 규모가 가장 큰 한국종합기술금융 유광행 이사의 벤처 기업관(觀)을 들어 보자. “벤처 기업이 대기업 틈바구니에서 성공하려면 독점력이 있어야 한다. 이 독점력은 기술에서 나온다. 제품의 절반 이상을 외국에 수출하고, 외국 수입품과 견주어서도 경쟁력이 있어야 진정한 벤처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93년 8월 설립된 씨앤에스테크놀로지는 5년 넘게 무선 영상 통신기를 개발하는 데에만 주력해 왔다. 이 회사는 99년 3월 무선 영상 전화기를 내놓는 것을 필두로 그동안 개발한 상품들을 차례로 선보인다. 그것도 미국 시장을 통해 내놓는다. 기술력과 제품력을 세계 시장에서 곧바로 인정받겠다는 계산에서다. 주식 시장을 통한 자금 조달 계획 역시 제품 출시 전략과 비슷하다. “코스닥 시장에 등록하지 않는 대신 미국 나스닥 시장(벤처 기업 전문 주식 시장)에 직상장할 계획이다. 우리 기술은 세계 초일류 기업들과 경쟁하는 수준이기 때문에, 국내 코스닥 시장에 등록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 회사 서승모 사장(40)의 주장이다.

서사장의 말을 허풍이라고 여겨서는 안된다. 국내에서 이미 이 회사의 기술력이 공인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97년 5월 자본금 대비 10% 수준인 5백만원의 유상 증자를 실시한 일이 있다. 당시 한국종합금융은 49억5천만원을 들여 지분을 인수했다. 1,000배의 프리미엄을 지불할 만큼 투자자가 이 회사의 기술력을 높이 샀다는 얘기다. 이 일은 벤처 업계에서 전후 후무한 일로 기록될 정도다. 서승모 사장 역시 연세대 대학원 전자공학과 석사 출신으로 삼성전자에서 특수 메모리 개발을 담당해 왔다.

<시사저널>이 가려 뽑은 20인의 벤처 기업가들은 성공을 꿈꾸며 소 판 돈을 훔쳐 서울행을 감행했던 정주영식 창업가들이 아니다. 모두 명문 대학을 나왔고 안정된 직장이 있었는데도, 모험가 기질을 억누르지 못해 벤처 기업가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을 2세대 창업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창업 과정 역시 1세대와는 확실히 구별된다. “과거 삼성 창업주 이병철씨는 혼자서 그룹을 일으켜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품의 수명 주기가 짧아져, 계속해서 제품을 고치거나 바꿔 가야 한다. 이 때문에 엔지니어들을 포함해서 모든 직원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직원들에게 열심히 일하면 이익이 돌아온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 회사에서 근무하는 여직원은 3년 정도면 충분히 결혼 밑천을 마련할 수 있다.” 지난해 인터넷 이용자 5천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것으로 평가된 어필텔레콤 이가형 사장의 말이다(재벌 총수들을 포함한 전체 기업가 순위에서는 6위).
스톡옵션 등 독특한 관리 방식 채택

대부분의 벤처 기업이 스톡옵션제를 채택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단 벤처 기업이 기술력을 인정받아 코스닥 시장에 등록되거나 세계적인 기업들로부터 지분 인수 제의를 받으면, 직원들은 한 밑천 잡게 된다. 그러나 이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특정 기술이나 제품에 대한 마니아들을 붙들어야 하는 벤처 기업들로서는 기존 기업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관리 방식을 채택할 수밖에 없다.

<창세기전 1·2>로 외국 소프트웨어 업체가 판치는 국내 게임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킨 소프트맥스 사는 회사 건너편에 원룸 2개를 얻어 놓고 있다.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 인력 20명이 피곤할 때 언제든 잠을 청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시설이다. 이 회사 정영희 사장(35)은 “게임 개발에 미친 사람들이 오직 개발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 준 것이 성공의 관건이었다”라고 말한다.

그는 성신여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대기업에 다니다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에 입사했다. 93년 창업을 하게 된 계기는 회사가 부도 나 자신이 이끌던 소프트웨어 개발팀이 오갈 데가 없게 되면서였다. 국내에서 단일 게임 판매량으로는 당분간 깨기 어려운 기록(7만∼8만 개)을 세운 소프트맥스 사는 현재 일본 시장 공략을 계획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쉽게 기술력을 검증받을 수 있기 때문에 창업 자금을 얻기도 전보다는 수월하다. 정부 정책과 여론 덕에 벤처 기업 창업과 관련한 지원 자금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이 때문에 어느 정도 성공한 벤처 기업이 사업을 지나치게 벌릴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네크워크와 시스템 통합 사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인성정보통신 원종윤 사장(40)은 무일푼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현대전자 정보기기연구소와 중견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인 가인시스템에서 근무했던 그가 창업을 결심한 90년대 중반에는 변변한 벤처 캐피털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을 믿고 투자 의향을 비친 한 중견 그룹 총수의 아들로부터 창업 자금 2억원을 빌렸다. 서울대 원자력핵공학과를 졸업한 원사장은 “현재 최대 주주와 경영진이 분리되어 있다. 소유와 경영 양쪽에 좋은 선례를 만들어 갈 계획이다”라고 밝힌다.

일단 창업한 뒤에는 자본금 규모를 늘려가는 데 문제가 없었다. 창업 초기부터 흑자를 내면서 실력을 입증한 덕이었다. 대우증권을 통해 싱가포르의 자금과 한국종합기술금융으로부터 자금을 끌어들여 현재는 자본금이 30억원이 넘는다. 2000년 초 코스닥 시장에 상장할 계획이다.

기술력으로만 승부 걸면 미래 없어

한국형 벤처 창업가들은 기업체나 연구소 근무라는 중간 경력을 거친다는 점에서 명문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일확 천금을 꿈꾸며 실리콘밸리로 직행하는 미국형 벤처 창업가들과 다르다. 그 자신 벤처 사업가로, 벤처 기업들의 실리콘 밸리 지사 운영을 대행해 주는 드림커뮤니케이션스 이지선 사장(36)은 “한국 벤처 기업들이 기술력을 위주로 한다는 점은 장점인 동시에 한계이기도 하다”라고 주장한다. 창업 초기부터 마케팅이나 자금 조달 등에도 신경을 쓰는 미국과 달리 기술력에만 매달리다 보면 회사가 커졌을 때 문제가 발생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벤처 기업들이 보유한 특정 기술이나 제품의 수명 주기가 짧으므로 기술력으로만 승부를 걸 경우 해당 시장이 위축되었을 때는 미래도 없다는 얘기다.

어쨌든 이 새로운 유형의 창업가들은 올해 또 다른 성공과 실패의 드라마를 엮어낼 것이다. 벤처 기업가들이 현재 한국 경제에서 엄청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정부나 벤처 업계의 말은 다소 과장 섞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을 보면 한국 경제의 미래가 보인다는 말은 틀림없는 얘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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