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막힌 세상, 氣로 뚫는다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1999.0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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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이후, 기 수련 인구 급증…“몸과 마음 살찌우는 건강 지름길”
아침에 일어나 아내와 함께 30분간 장(腸) 운동을 하는 것으로 김태동씨(66·전 한양대 수학과 교수)는 일과를 시작한다. 새해 들어 생긴 새로운 습관이다. 장 운동이란 단전 호흡에 들어가기 앞서 굳은 대장을 풀어 주는 기초 운동.

지난해 말 김씨는 정년 퇴직이라는 형식으로 40년간 몸 담았던 대학을 떠났다. 그렇지만 섭섭함 따위는 느낄 틈조차 없었다. 석·박사 학위 논문 심사하랴, 미적분 교과서 집필을 마무리지으랴, 퇴직을 앞둔 몇 달 동안은 ‘아침 한끼 먹고 연구실로 출근해 눈 들어 보면 어느덧 사방이 깜깜해져 있는’ 나날이었다. 그러다 보니 몸이 엉망으로 망가졌다. 나중에는 오른쪽 어깨가 아예 돌아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래서는 안된다’. 위기감을 느낀 김씨는 일을 마무리하자마자 집 근처 기 수련 단체로 달려갔다.

기(氣)를 수련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대표적인 기 수련 단체인 단학선원·국선도·연정원은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기를 살리려는’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다. 현재 국내 기 수련 인구는 어림잡아 백만 명. 주목할 만한 것은 경제난 이후 기 수련 인구가 오히려 활발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선도측은 98년에는 전년에 비해 수련 인구가 20%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추정했다.

기를 수련하는 데 드는 비용은 한 달 평균 8만∼10만 원. 감봉·실직 따위로 수입이 대폭 줄어든 일반인에게 결코 만만한 비용이 아니다(6개월 단위로 회비를 받는 수련 단체도 있다). 그럼에도 수련 단체를 찾는 사람은 꾸준히 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첫 번째는, 두말 할 것도 없이 건강이다. 직장인 김 아무개씨(37)는 시도때도 없이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가슴에 뭔가 응어리가 져 있는 듯 답답한 증상에 시달리다 수련 단체를 찾았다. 김씨의 증상은 지난해 3월 다니던 회사의 구조 조정이 끝난 뒤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회사를 그만둔 동료들에 대한 ‘살아 남은 자의 미안함’, 여기에 덧붙여 ‘나도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병을 키웠던 셈이다. “스트레스 등 심인성 질병 치료에 큰 효과”

국선도 송파지원 사범 김영환씨(30)는 경제난 이후 찾아오는 사람 대부분이 스트레스로 인한 두통·견비통·가슴 답답증 따위를 호소한다고 말했다. 물론 뚜렷한 증상이 없거나 겉보기에 멀쩡한 사람도 수련 단체를 찾는다. 김씨에 따르면, 이런 사람들은 대개 ‘어려운 시기에 건강마저 해치면 끝장’이라는 위기 의식을 갖고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건강을 위해’ 기 수련 단체를 찾는 사람들의 심리이다. 헬스·수영·테니스 같은 운동으로도 건강은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다. 그러나 수련 단체를 찾는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건강은 마음이 만든다’는 믿음을 한자락씩 갖고 있다.

이같은 믿음이 비과학적인 것은 아니다. 국내 종합 병원 가운데 최초로 기공 치료를 도입한 경희의료원 신용철 교수(한방기공진료실)는 기공 수련이 심인성 질병에 특히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고 말했다. 그 원리는 이렇다. 과도한 스트레스나 누적된 스트레스는 몸 안의 평형 상태를 깨뜨린다. 동양 의학에서는 이같은 스트레스 반응을 기가 반응하는 것으로 본다. 곧 스트레스는 온몸의 기를 뭉치게 하거나 상기시켜(들뜨게 해) ‘기 변조’ 현상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기를 다시 정상 상태로 돌려놓는 방법은? 간단하다. 마음을 다스리면 되는 것이다.

몇년 전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뇌내 혁명’ 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뇌내 혁명>의 저자인 하루야마 시게오 박사는 ß엔돌핀이라는 뇌 분비 호르몬이 인체의 면역 기능을 놀랄 정도로 증강시킨다고 주장했다. 이 호르몬은 기쁜 마음을 가지거나 명상 상태에 있을 때 분비가 촉진된다는 것이 하루야마 박사의 주장이었다.

당시 하루야마 박사는 그 메커니즘을 설명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임경택 교수(목포대·정치학)가 최근 <숨쉬는 이야기>라는 책을 통해 새 가설을 제시하고 나섰다. 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때 기 흐름으로 최명석군(당시 23세)의 생존을 알아맞혀 화제를 모았던 임교수는 25년째 기공 수련을 해온 국선도 법사이기도 하다.

임교수는 단전 호흡의 원리를 알면 엔돌핀 생성 메커니즘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단전 호흡이라면 일반인은 ‘아랫배로 숨을 쉬는 운동’ 정도로 알고 있지만 그 원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단전에 진기(眞氣)를 모아 이를 독맥(척추 쪽의 경락)을 따라 돌려, 뇌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방법이 바로 단전 호흡이다. 곧 단전에서 생성된 기운이 척추를 타고 올라가 메마른 뇌를 적시게 되는 것이다.

이때 뇌 구석구석을 적셔 주고도 남은 기운은 이마 윗부분 전두엽에 쌓이게 된다. 전두엽은 엔돌핀이 생성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곧 기운이 남아 쌓이는 정도에 비례해 엔돌핀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임경택 교수는, 옛날 원효 대사나 수도인들이 수련 도중 미친 사람처럼 덩실덩실 춤을 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기를 수련하는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함께 변화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고 입을 모은다. 먼저 지각하는 것은 몸의 변화이다. 인간의 본성 되돌아보는 과정

기 수련 단체 대부분은 단전 호흡과 함께 도인 체조나 행공(行功) 같은 몸동작을 수련 과정으로 채택하고 있다. 도인 체조란 도사들이 하는 체조가 아니라 ‘끌고 당기는’(導引) 운동을 말한다. 다시 말해 근육·뼈·인대를 늘리고 당겨 주는 운동으로, 서양의 스트레칭과 비슷하다. 행공이란 팔다리를 벌리고 들어올리는 등 갖가지 동작을 취하면서 단전 호흡을 하는 것이다. 평소 잘 쓰지 않던 근육을 움직이는 만큼 이들 몸동작을 꾸준히 하는 것만으로도 건강이 좋아진다.

△잠이 잘 오고 깊이 잠든다 △대소변이 순조롭고 소화가 잘된다 △얼굴·손발에 윤기가 흐른다 △기미·주근깨가 사라진다 △병약한 사람은 살이 오르고 뚱뚱한 사람은 살이 빠진다. 개인 차는 있지만 수련 6개월∼1년이면 대부분 이런 변화를 경험한다.

임경택 교수는 단전호흡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자가 진단할 수 있는 객관적 증거로 ‘단침’과 ‘열기’를 제시했다. 단침이란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이 고요해질 때 입 안에 고이는 침을 말한다. 단침을 느끼는 단계에 이른 사람은 활기와 활력이 넘친다(活이라는 한자 자체가 혀(舌)에 침(水)이 고인다는 뜻이다). 열기는 호흡과 마음이 하나가 되었을 때 생겨난다. 이 열기는 모든 기력의 원천이고, 염증을 없애는 효능을 갖고 있다. 수련을 해도 단침과 열기를 느끼지 못했다면 이는 ‘신발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 격’이라고 임교수는 지적한다.

이 과정에서 마음의 변화 또한 일어난다. 그것은 ‘나를 발견하는 경험’이기도 하다. 단전 호흡 지도자들은 수련생들에게 끊임없이 ‘단전을 보라’고 강조한다. 단전이 존재하는지조차 반신 반의하는 수련 초보생은 이 말에 당황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눈을 감고 마음 속으로 단전을 보면서 들고 나는 호흡을 놓치지 않는 것, 이것이 이른바 내관(內觀)이다.

김태동씨는 내관을 통해 비로소 ‘난생 처음 내 몸에 온전하게 몰입하는 경험’을 했다. 육십 평생 그는 가족과 학교와 학문만을 위해 살았다. 그 어디에도 진정한 ‘나’는 없었다. ‘나는 누구인가’‘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 왔는가’. 이는 지난 1년간 급속도로 추락함을 겪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떠올렸을 법한 화두이다.

자기를 돌아보는 과정은 자기를 긍정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처음 들여다본 단전은 캄캄하기 그지없다. 그렇지만 내관에 익숙해지다 보면 단전에 밝고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 이는 기 수련의 근본 정신과도 통한다. 기 수련 단체들은 단전 호흡이 인간 본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가르친다. ‘인간의 본성은 본래 밝은데, 어둠이 이를 가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단학선원에 6개월째 다니고 있다는 성병준씨(31)는 “수련을 통해 나의 본성과 처음 만나는 순간 나 자신이 너무 예뻐 안아 주고 싶었다”라고 회고했다. 본래 신경이 쇠약했던 데다 20대 초반 알 수 없는 이유로 목 뒤 근육이 혹처럼 부풀어오른 이후 성씨 인생에 자신감이나 긍지란 없었다. 그러던 성씨 인생을 기 수련이 바꾸어 놓았다. “단전 호흡 하면 뱃심·뒷심·허릿심 튼튼”

몸과 마음의 변화는 따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기 수련의 진짜 묘미는 몸과 정신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서로를 더 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국선도를 5년째 수련하고 있는 황기영씨(46·다솔농장 대표)는 말했다. 몸 따로, 마음 따로, 호흡 따로여서는 에너지를 제대로 모을 수 없는 것이 기 수련의 특징이다.

그렇다고 호흡·동작·정신을 의식적으로 일치시키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단전 호흡을 ‘제대로’ 하다 보면, 다시 말해 단전에 기운이 꽉 차면 뱃심·뒷심·허릿심은 절로 생겨난다는 것이 임경택 교수의 설명이다. 뱃심은 용기와 추진력과 과단성을 키워 준다. 뒷심은 지구력·책임감·끈기, 허릿심은 희망·포부·기상을 길러준다.

이는 ‘정충기장신명(精充氣壯神明)’의 원리로 해석되기도 한다(24쪽 딸린 기사 참조). 기를 수련하는 목표는 이처럼 뱃심·뒷심·허릿심 있는 인간, 다시 말해 정충기장신명을 이룬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자기 완성’에 그쳐서는 안된다. 단학선원에서는 수련을 끝마칠 때 수련생끼리 “성통공완하십시오”라는 인사를 나눈다. 자기 본성과 통해(性通), 이를 세상에 알린다(功完), 이것이 바로 수련 단체들이 내세우는 기 수련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이는 최근 기 수련 단체에 사람이 몰리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회원을 거느리고 있는 국선도와 단학선원(각각 40만명)은 IMF 이후 ‘기를 살려 국운(國運)을 살리자’는 기치를 내걸고 기 수련 대중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들은 기 수련의 연원을 공통적으로 단군 왕검에게서 찾는다. 단군이 체계화한 정신 수련과 수행법은 신라 화랑에 이어졌다. 이들에 따르면, 3국 가운데 가장 힘이 미약했던 신라가 통일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수련 전통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려 묘청의 난 이후 수련의 맥은 끊어지다시피 했다. 단,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면 수련 전통은 어김없이 되살아나곤 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동학 혁명 때나 일제 치하가 좋은 예이다.

“국난 닥칠 때마다 수련 전통 되살아났다”

따라서 한민족에게 또 한 차례 시련이 닥친 지금, 기를 살려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수련 단체들은 ‘기를 살리면 운이 좋아진다’는 말을 흔히 쓴다. 기를 수련해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이 밝아지면 생기(生氣:살리는 기운)가 돌게 되고, 이것이 자기뿐 아니라 남을 살리는 분위기(일정한 범위 안에 감도는 기운)를 만든다는 것이다.

임경택 교수는 ‘사회·국가적으로도 전체를 움직이는 기운은 반드시 있다’며, 이 기운을 사기(死氣) 아닌 생기로 이끄는 것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생기가 넘치면 이것이 자신뿐 아니라 가족, 사회, 나아가 국가를 살리는 바탕이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눈앞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는 일만이 아니다. 임교수는 환경 오염으로 악화한 자연 조건 속에서 건강을 지키고, 21세기 정보화 사회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기 수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단학선원 창시자 이승헌 선사는 “고통의 시대를 지나 21세기가 되면 신명(神明)의 시대가 열린다”라고 주장한다. 물질 문명이 끝나고 정신이 중요시되는 새로운 시대에는 창의력 있고 조화로운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단학선원은 올해 들어 ‘신명 시대에 걸맞는 수련법’을 새로 보급하고 있다. 두뇌를 계발하면서 인간 본성을 발견하게 해준다는 이른바 ‘뇌 호흡’이 그것이다.

이같은 주장을 ‘수련 단체의 새로운 돈벌이 수단’으로 폄하하는 시각도 있다. 그렇지만 선택은 자기 몫이다. 기를 살려 나의 운명, 나아가 국가의 운명을 밝히자는 데 원칙적으로 반대할 사람은 없다. 단 수련자나 비수련자나 경계해야 할 한 가지. 단학에서 흔히 쓰는 표현대로 ‘혀로 농사를 짓는 자(舌耕者)’가 되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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