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동포, 죽음보다 못한 삶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1999.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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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한 생존’ 중국 현지 밀착 취재/남한의 도움 애타게 기다려
유람선이 1주일에 몇 차례씩 금강산 관광객을 실어 나르고, 민족 평화와 공존을 최우선 과제로 표방한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훨씬 지난 지금. 두만강 건너 중국의 국경 도시들에서 같은 핏줄이 겪는 참상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성은 고사하고 당장 생존조차 유지할 수 없는 그들은 국제 사회뿐 아니라 같은 동족들로부터도 버림받은 국제 미아였다. 햇볕 정책을 표방한 김대중 정부에서도 그들의 머리 위에는 단 한 줄기 햇살마저 비치지 않았다.

5월15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한 중국의 한 국경 도시. 강 건너 북한쪽 강가에는 총을 든 경비병이 오후 햇살을 받으며 한가롭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요즘 북한 쪽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낮에도 총을 들고 경비 서는 모습이 목격된 것이다.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도로변 둔덕 숲속에서 한 여인이 숨을 죽여 흐느끼고 있었다. 위아래 검은 옷차림에 가녀린 체구인 여인은 이윽고 술을 부으며 참고 참았던 설움을 터뜨렸다. “하느님, 제발 제 주인을 살려주세요. 제발 무슨 말씀이든 한마디라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전염병에 감염되어 줄줄이 쓰러지는 아이들

남의 나라 땅에 남편의 시신을 묻은 이 여인의 이름은 김순희(가명). 올해 나이 32세. 한 살 위인 남편과 결혼한 지 2년밖에 안되었지만 어릴 때부터 서로의 불우한 처지를 동정하며 오누이처럼 지내왔다. 평양 시민으로 살 정도로 북한에서 선택받은 계층이었다. 그러나 부모들 대에서 ‘성분 문제’가 생겨 변방으로 추방되는 쓰라림을 겪었고, 이것이 서로가 단단히 결속하는 힘이 되었다.

남편은 어려서부터 폐가 좋지 않았다. 성장해서도 계속 건강 문제로 고민이 많았다. 그들이 사는 곳은 변방 지역이어서 변변한 의료 시설이 없었다. 그래서 남편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두 차례나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중국 공안에 붙잡혀 송환되곤 했다. 지난해 11월에도 몰래 국경을 넘었다가 지난 2월 붙잡혀 되돌아왔다. 북한으로 후송되는 20여 일 동안 남편은 새로운 병을 하나 더 얻었다. 음식을 먹기만 하면 설사를 해 비쩍 마르기 시작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생사람 잡겠다고 생각한 아내는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을 업고 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집에서 두만강까지는 20리 길. 160㎝가 안되는 그의 체구로는 엄두를 내기 힘든 일이지만, 남편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경비병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무사히 강을 건너기는 했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정작 희망을 걸었던 남편의 친척은 이미 이사간 지 오래였고, 그들 부부의 딱한 사정을 들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찾아간 병원에서는 치료비가 모자란다며 내쫓다시피 했다.

병원에서 나와 강변으로 향하던 택시 안에서 남편은 숨을 거두었다. 이국 땅에서 원통하게 숨진 남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집이 보이는 두만강변에 시신을 편안히 눕히는 일뿐이었다. 그 날 그는 시어머니에게 부음을 전하려고 다시 강을 건널 예정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가 겪어온 인생 역정은 대하 소설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국경 지대를 떠도는 북한 동포들이 예외 없이 겪는 참상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곳에서 만난 동포 대부분이 가족 중 누군가는 최근 1∼2년 사이 굶어 죽거나 병으로 죽었다.

북한과 중국의 국경 도시에는 지난해 봄부터 북한 어린이들을 돌보는 고아원이 이곳저곳에서 생겨나고 있다. 5월15일 찾아간 옌볜 자치주내 조선족 동포가 운영하는 고아원도 그 하나다. 원래 이곳은 한족이나 조선족 고아를 수용하도록 허가가 난 곳이다. 그러나 지난해 봄부터 북한 아이들이 밀려들기 시작해 지금은 고아원생 22명 모두가 북한 아이들이다. 20여 평인 허름한 아파트 한 채에서 22명이 기거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무산에서 꽃제비 생활을 하다가 이곳에 온 아이도 있고,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행방 불명되어 4년째 고아원에서 사는 아이도 있었다.

국경을 뚫고 중국으로 넘어온 동포 중 상당수가 험한 일을 하기 때문에 사고로 죽는 경우가 많다. 생활고를 못이겨 아이를 유기하는 부모도 꽤 된다. 그래서 부모 없이 헤매는 어린이가 부쩍 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아이들을 교회나 조선족 동포들이 임시로 떠맡고 있다가 고아원으로 보낸다. 그러나 이 고아원도 빈 자리가 없다. 주변의 도움으로 근근히 운영한다는 조선족 원장은 “요즘도 하루에 몇 번씩 아이를 받아달라는 전화가 오지만 더 받을 수 없는 처지다”라고 말한다.

그는 또 최근 들어 간염이나 폐결핵 등 전염성 질병에 걸린 아이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고 걱정했다. 지난해만 해도 별로 없었던 일인데, 올해 들어 많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은 전염될까 봐 받을 수 없다. 결국 이곳에서 며칠 저곳에서 며칠 떠돌다가 길거리에서 죽어간다는 것이다.

뜻있는 조선족이나 교회 등이 운영하는 고아 수용 시설이 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마음 놓고 운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불법이기 때문이다. 국경을 넘는 북한 동포의 숫자가 늘어나자 중국의 단속과 통제는 그전보다 훨씬 강화되었다. 북한에서 넘어온 아이들을 재우기만 해도 처벌을 받는다. 앞의 고아원도 이미 당국으로부터 허가가 취소된 상태였다.

국경 지대에 있는 탈북 동포에게 중국 공안의 일제 단속은 공포 그 자체이다. 5월15일 저녁 북한에서 넘어온 여성이 일하는 노래방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갔다. 같이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다 모르는 체하며 그에게 북한 노래를 부르라고 권했다. 그러자 그는 귀엣말로 소곤댔다. 여기에서 일하는 아가씨 중에 오늘 처음 본 아가씨가 있어 걱정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몇 차례 더 권하자 그는 한국에도 많이 알려진 <반갑습니다>라는 노래를 불렀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동포 여러분, 형제 여러분 반갑습니다.’ 노래를 할수록 스스로 흥에 취한 그는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잡으며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을 표시했다.총명하고 씩씩하고 강인한 탈북 동포들

한국에서는 그동안 북한 동포의 참상을 한쪽으로만 극단적으로 강조해온 언론 보도 때문에 그들을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인 양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실제 그들은 비록 배가 고파 넘어오기는 했지만 매우 총명하고 씩씩하고 강인했다. 대부분 북한에서 의무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어서, 지적 수준이 매우 높았다. 올해 23세인 그 역시 그랬다. 매우 영민하고 눈치 빠르고 활달했다.

그러나 그의 눈가에는 언뜻언뜻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이미 한 차례 송환된 경험이 있는 그에게 또다시 잡혀 간다는 것은 공포였다. 특히 두 번째 잡혀간 사람들을 사형에 처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공포감이 더욱 컸다. 지금 그의 최대 희망은 돈을 모을 때까지 붙잡히지 않고 있다가 스스로 돌아가는 것이다. 북한 당국도 스스로 돌아가는 사람에게는 관대한 편이라고 한다.

중국 공안들도 예전에는 북한에서 넘어온 사람들을 애써 잡으려 하지 않았다. 공안 중에 조선족이 많았기 때문에 말썽만 없으면 묵인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번 취재 길에 확인한 바로는 분위기가 예전과 달리 대단히 삼엄했다. 수시로 상부에서 검거령이 떨어지고, 공안들에게 검거 할당량까지 내려온다고 한다.

일제 검거가 공포의 대상이라면 벌금 제도는 탈북 동포들로 하여금 이곳에서 살 터전을 빼앗아 간다. 북한 동포들이 그동안 국경 지대로 많이 넘어올 수 있었던 것은 같은 동포인 조선족 사회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벌금 제도가 대폭 강화되자 조선족들도 돕기가 어렵게 되었다. 지난해만 해도 북한 동포를 재우다 적발되면 벌금이 1인당 천 위안(한국 돈 약 1만5천원)이었는데 올해는 2천 위안으로 올랐다. 업소의 경우 5천 위안을 물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조선족 한달 월급은 약 8백 위안이다.

벌금 제도가 없었을 때만 해도 여성들은 주로 음식점에서 접시닦이를 하거나 가정부 생활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었고, 남자들은 공사판이나 농촌 등을 돌아다니며 견딜 수 있었다. 굶주리지 않는 것만 해도, 또 약간의 돈을 모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그들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그러나 벌금 제도 실시 이후 그들을 받아주는 곳은 거의 없다. 여기에다 한국의 경제 위기로 인해 옌볜 자치주 경제가 타격을 받으면서 일자리가 많이 줄었다.

여성의 선택 폭도 좁아졌다. 자신도 모르게, 또는 스스로 원해서 인신 매매 조직에 이끌려 농촌의 한족이나 조선족에게 넘겨지는 것이 이제 거의 유일한 호구지책이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노래방이나 안마시술소 등 유흥업소에 나가 남성들의 노리개가 되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은 옌볜을 중심으로 한 국경 도시에서 단속을 피해 내륙으로 내륙으로 퍼져 가고 있다.

여성들은 그나마 노래방에라도 갈 수 있으나 남성은 갈 곳이 없다. ㄱ씨는 북한에 있을 때만 해도 협동농장 지도원으로서 힘 있는 자리에 있던 사람이다. 그는 어처구니없는 사연으로 이곳에 눌러앉게 되었다. 그는 협동농장에서 사용할 자재를 구하러 3년간 북한 전역을 돌아다녔다. 가는 곳곳에서 굶어 죽는 사람, 꽃제비가 되어 돌아다니는 아이 등 참상을 목격하고 그는 고민에 빠졌다. ㄱ씨는 ‘특색 있는 사회주의’를 한다는 중국의 현실은 어떤지 궁금해 두만강을 건넜다. 원래는 1주일 뒤 되돌아갈 예정으로 국경 경비에게 돈을 미리 주었는데 약속한 날 신호가 오지 않았다. 결국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중국에 와서 처음으로 남한의 실상을 접하고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북한에서 들었던 것과 전혀 다른 현실을 알게 된 것이다. 지금 그는 돌아갈 수도 없지만, 어떻게 하면 이곳 동포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몰두해 있다. 그러나 그 자신부터 당장의 신변 안전이 문제다. 지금 있는 집에서도 문제가 생길 것 같아 곧 나와야 하는데, 다음에 어디로 갈지가 막막하다고 했다.나무 껍질로 연명하다 변비로 죽어

탈북자들의 바람은 아주 소박하다. 몇년 전만 해도 그들은 외부 세계에 자신들의 어려운 실상을 알리는 데 주력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 땅에서라도 안심하고 먹고 사는 것이 최고의 희망이다. 공짜로 먹여 달라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해서 먹을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그들은 남한 동포들이 뭔가 해줄 수 있지 않느냐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음지에서 그들을 돕는 조선족이나 민간단체 활동가 역시 한목소리다. 그동안 남한의 언론은 그들의 육성을 통해 북한의 식량난 실태를 파헤치는 데에만 주력해온 감이 있다. 그러나 정작 국경 지대를 맴돌고 있는 동포의 현실은 외면되어 왔다. 물론 은밀하게 움직이며 이들을 돕는 사회단체도 있지만 역부족이다. 이곳에 나와 있는 동포 중 많은 사람이 한국 돈 몇만 원만 있으면 고향으로 돌아가 장사하며 생계를 꾸릴 수 있는데도 그것조차 도울 방안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북한은 춘궁기가 시작되었다. 지난 겨울에도 배급이 중단되었고, 이제 산이나 들에 나는 풀뿌리나 나무 껍질을 먹으며 연명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그동안은 설사로 많이 죽었지만 최근에는 변비로 죽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한다.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사람들은 또 삼엄한 경계를 뚫고 강을 건널 것이다. 북한에 있는 동포를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직접 만날 수 있고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탈북 동포의 손길을 잡아주는 것은 더욱 쉽고도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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