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운동 앞장 ‘아줌마 부대’가 세상 바꾼다
  • 金恩男 기자 ()
  • 승인 1999.04.2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동체 운동 벌이며 사회 감시 전위대로 맹활약
주책맞고, 수다스럽고, 억세고….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아줌마’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들이다. 이것을 뒤집어 보면 어떤 이미지와 연결될까. 강인함, 너그러움, 솔직함….

서울 구로초등학교 학부모회장 배옥병씨(42)는 그런 의미에서 전형적인 ‘아줌마’이다. 지난 반 년간 그는 학교 앞에 새로 생기는 도로의 설계 변경을 요구하며 서울시와 구청을 상대로 질긴 싸움을 벌여 왔다. 학교 정문으로부터 불과 20여m 떨어진 곳에 설치하겠다는 횡단 보도가 문제의 발단이었다. 횡단 보도는 낙타 등처럼 굴곡진 언덕 사이 움푹 팬 곳에 놓일 계획이었다.

‘아이들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배씨는 즉각 행동에 들어갔다. 먼저 그는 학부모들을 소집해 ‘통학로 교통 안전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02-856-6897)를 구성했다. ‘위험한 횡단 보도 대신 지하 차도를 만들어 달라’는 서명 운동과 함께 관청을 상대로 청원운동도 벌였다. 그러나 공무원들이 보인 반응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아줌마들이 알긴 뭘 안다고 나서. 우리는 전문가야.” ‘수다’라는 무기로 무장한 ‘아줌마 파워’

그렇다고 여기에 기 죽을 그가 아니었다. ‘아줌마 부대’와 함께 구청에 몰려간 배씨는 오히려 더 큰소리로 맞받아쳤다. “그래, 우리는 무식한 아줌마다. 똑똑하다는 당신들은, 2분에 한 건꼴로 발생하는 우리나라 교통 사고의 가장 큰 희생자가 초등학교 저학년생이라는 현실을 알고나 있는 거냐?” 같이 간 학부모들은 열광적인 박수와 야유로 배씨를 응원했다.

대한민국에서 목청 크기로 아줌마를 따라갈 집단이 어디 흔한가. 아줌마를 우습게 본 공무원들은 결국 큰코를 다쳤다. 지난해 9월 배씨는 구청장으로부터 ‘민원이 해결될 때까지 공사를 중단하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두 달 뒤 만난 고 건 서울시장은 도로 설계를 재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지만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올 들어 서울시는 기능에 문제가 많은 지하 차도 대신 지하 보도를 건설하거나 도로 폭을 축소하겠다는 대안을 내놓고 있다. 지하 차도를 건설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배씨로서는 또 한 차례 힘겨운 싸움이 남겨놓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자신을 지지하는 아줌마 부대가 있기 때문이다.

3년 전 학교운영위원회(학운위) 선거에 처음 출마할 때만 해도 그는 외로웠다. 현실에서는 여성이 아이들 교육을 거의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건만 학부모 회장으로 선출되는 사람은 대부분 남성 명망가였다. 한술 더 떠 학교측은 사회 운동을 했던 배씨의 경력을 문제 삼아 ‘저 사람이 운영위원이 되면 학교를 말아먹는다’고 악선전을 했다. 간신히 운영위원에 당선되기는 했지만 초창기만 해도 아이 엄마들은 경계심을 갖고 그를 대했다. 이를 없애 준 것이 바로 아줌마들의 막강한 무기, 수다였다.

남편 흉, 시댁 흉, 아이 크는 이야기. 수다를 통해 엄마들은 조금씩 거리를 좁혀 갔다. 이제껏 혼자서 끙끙대던 학교에 대한 불만도 하나 둘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줌마는 강하지만 엄마는 약하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아이를 둔 엄마가 학교에 저항하기란 쉽지 않았다. 대차기로 소문난 배씨마저도 학교에 미운 털이 박힌 자기 때문에 아들이 담임에게 구박받는다는 얘기를 전해 들으면 눈물부터 쏟아졌다. 그러나 ‘내 아이 잘 보이려는’이기심 때문에 학부모에게 부당한 돈과 노동력을 요구하는 학교측의 잘못된 관행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고 배옥병씨는 말한다.

가족 이기주의를 넘어섰을 때 ‘아줌마 파워’는 제대로 발휘된다. 서울시 양천구 목동아파트 11단지에 사는 서미경씨(34)는 지난해 같은 단지 주민들과 ‘녹색 아파트 모임’을 결성했다. 아파트 주부 하면, 사람들은 흔히 떼지어 몰려 다니며 쇼핑하고 수다 떠는 아줌마 집단을 떠올린다. 이런 것들이 서씨는 싫었다. 모임에 동참한 이들은 살맛 나는 아파트, 미래 지향적인 환경 친화형 아파트를 만들자는 데 뜻을 같이했다. 이에 따라 이들이 맨 먼저 벌인 일은 생쓰레기 분리수거운동이었다. 야채·과일 껍질 따위 젖은 쓰레기를 따로 수거하는 이 운동은 쓰레기 봉투 사용량을 절반 가까이 줄일 수 있는 데다 쓰레기를 재활용할 수 있어 이중으로 이익이었다

서씨는 최근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새로운 제안을 하나 했다. 지하 탱크를 청소할 때 주민들이 참관하겠다는 제안이 그것이다. 식수로 사용될 물이 담긴 탱크인 만큼 어떤 약품을 얼마만큼 사용하는지 확인하려는 것인데, 전문가 조언까지 구하려면 이 작업에도 품이 꽤나 들 전망이다. 그럼에도 서씨는 기꺼이 ‘극성’을 떨어볼 참이다.

‘아줌마는 어머니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표현대로 모성은 아줌마 파워의 숨겨진 원천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언론위원회 모니터팀장 임순혜씨(50)는 ‘아줌마가 없으면 이 사회는 무너진다’고 큰소리치는 시민운동판의 ‘아줌마’이다. 아줌마는 기본적으로 생명을 잉태하고 살림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살림’이란 ‘죽임’과 반대되는 단어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되살려 놓는 뜻이라는 것이다. 이는 임씨가 작고한 은사 안병무 교수(한신대)에게 배운 정의이기도 하다.

10년 전, 자녀를 다 키워놓고 한신대 대학원에 뒤늦게 진학할 때만 해도 임씨는 도무지 세상에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은 것은, 지난 91년 우연한 계기로 시작한 방송 모니터 활동이었다. 미디어는 우리 삶을 풍요하게도, 해롭게도 만들 수 있는 두 얼굴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미디어를 살림의 도구로 만들자.’

그때부터 본격적인 방송 모니터 활동에 나선 그는 지난 8년간 손을 놓아 본 일이 없다. 서강대 언론대학원에 다시 들어가 언론 비평을 전문적으로 공부했어도 ‘아줌마’ 출신이어서인지 그에게는 남들처럼 폼 나는 감투가 주어진 일이 없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삶을 죽이는 유해한 환경으로부터 자녀와 우리 모두를 지켜낸다는 자부심이 있다.

아줌마 파워는 네티즌 세계에서도 막강하다. 전업·맞벌이 주부 3천여 명을 회원으로 거느리고 있는 유니텔 통신 동호회 ‘주부 네트워크’는 최근 <내일신문> 성교육 센터와 함께 ‘청소년 유해 환경 감시단’ 운동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동호회 메뉴에 ‘성 교육 상담란’ ‘PC통신·인터넷 음란 사이트 고발 창구’ 등을 새로 만들 계획이다. 올해 초 새 운영자로 취임한 이민정씨(33)는 “동호회가 웬만한 여성 단체를 능가하는 규모로 성장한 만큼 단순한 친목을 넘어 사회 참여 활동을 강화한다는 것이 앞으로의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사이버 공간에서도 막강 위력… 성폭력 방지 앞장

96년 발족한 이래 주부 네트워크는 체벌·성 희롱·실업 같은 사회적 쟁점들을 그때그때 발 빠르게 토론해 왔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른바 ‘386 세대’가 동호회 활동 주축을 이루고 있어서인지 이들의 사회 비판 의식은 높은 편이다. 이민정씨는 “전업 주부로 살면서 묵혀 두었던, 사회적인 발언에 대한 갈증을 동호회에 가입한 뒤 비로소 풀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재미있는 것은, 페미니스트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이들 대부분이 가부장적 사회 질서·가치관을 가차없이 공격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주부 네트워크에서 ‘성폭력은 당한 여성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 아니냐’ 따위 발언을 했다가는 ‘왕따’를 당하기 십상이다.

이곳 여성이라면 한두 번쯤은 채팅 방에 들어갔다가 남성들로부터 “아줌마, 또 왔어?” “밥 안 하고 뭐해” 같은 ‘성 희롱’을 당한 경험이 있다. 그러나 동호회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이들은 더 이상 이런 말에 상처받지 않는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그래서 성적 매력을 잃은 ‘아줌마’를 사람으로도 취급하지 않는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공유하게 되면서 ‘그래, 나 아줌마다. 어쩔래’ 하는 식으로 당당해지기 때문이다.

‘수다’라는 의사 소통 도구와 ‘모성’이라는 이데올로기, 물러설 수 없는 ‘생활력’을 고루 갖춘 아줌마들이 당당한 정체성을 갖고 세상을 향해 발언할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는 아직 모른다. 그렇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아줌마’들의 각성은 지금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