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재벌·언론, 뒤로 달리는 3두마차
  • 김 당 기자 ()
  • 승인 1997.01.1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반공 이념으로 무장, 노동법 등 날치기 ‘개악’ 견인차 노릇
지난해 4월 총선 직후 김영삼 대통령이 이른바 ‘신노사관계 구상’을 발표한 데 이어, 5월에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로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위원장 현승종)가 출범할 때만 해도 노동계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어느 정도 기대를 갖고 있었다. 우선 이 구상이 ‘노동 악법’ 개폐를 담고 있는 데다가 노사관계 개혁을 주도한 청와대 스스로가 이를 문민 개혁 프로그램의 ‘마지막 개혁 과제’가 될 것이라고 자신있게 천명했기 때문이다.

다른 개혁 프로그램처럼 이 마지막 개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선포식(신노사관계 선언) 또한 청와대와 언론의 주도면밀한 ‘깜짝쇼’로 시작되었다. ‘참여와 협력’을 기치로 내건 YS의 신노사관계 구상이 나왔을 때, 사실 그 구상의 주요 골자는 이미 다 알려진 내용이었지만, 대다수 보수 언론은 이 구상이 △복수 노조 허용(민주노총 합법화) △제3자 개입 금지 폐지 △노동조합의 정치 활동 허용같이 21세기를 준비하기 위한 획기적 내용을 담고 있다고 화답했다. 이같은 화답은 96년을 노동법 개정의 마지막 해로 삼은 노동계의 기대 심리를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한총련 사태·잠수함 사건 계기로 자본 총공세

95년 11월 정식으로 출범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위원장 권영길)이 대중적 투쟁을 통한 노동법 개정 방식에서 노개위에서의 ‘참여와 투쟁’ 방식으로 전환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을 끌어들인 노개위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합의를 끌어내지 못한 채 표류했고, 이는 민주노총의 노개위 불참 선언(10월 1일)으로 끝났다. 결국 그뒤에 정부가 주도한 노동관계법 개정안 제출과 이를 받은 신한국당의 날치기 개악은 예정된 파국의 마지막 절차였던 셈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YS의 신노사관계 구상은 처음부터 거짓이었고, 노개위를 대리인으로 내세운 노사 합의안에서 민주노총을 들러리로 세운 것이 아니었나 하는 의혹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사실 노동법 개정은 노·사·정 3자가 이른바 3금(禁)과 3제(制)의 매듭을 어떻게 풀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집단 노사관계법의 3금은 △복수 노조와 단결 금지 △3자 개입 금지 △정치 활동 금지이고, 개별 노사관계법의 3제는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변형근로시간제이다. 그러나 이번 노동법 개악으로 노동계가 ‘얻은 것은 3금 해제 유보요, 잃은 것은 3제 시행’이다. 결국 노측이 합법화하려는 집단 노사관계법과 사측이 명문화하려는 개별 노사관계법의 대립 구도에서 정부는 사측이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은 떡을, 그것도 날치기로 빼앗아서 준 셈이다.

이처럼 개악으로 반전된 것은 따지고 보면 노개위 활동 국면에서 중반 이후 이른바 ‘노동시장의 유연화’라는 고상한 이름을 내건 자본의 총공세 단계 때 이미 끝난 상황이었다. 그 분수령은 8월 한총련 연세대 사태 이후 전개된 ‘신공안정국’이었고, 9월 잠수함 침투 사건은 이를 강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자본가 집단은 연세대 사태에 관련된 학생들의 취업을 막겠다는 과감한 위헌 발언을 공언하리만큼 정국을 공세적으로 활용했다. 95년 5월 한국통신 노조에 대해 ‘국가 전복 음모’라고 몰아붙인, 헌법이 보장한 노동 3권을 정면으로 위협하는 YS의 발언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경총과 일부 경제 관료들 사이에서 경제 위기론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곧이어 ‘경쟁력 10% 높이기 운동’도 나왔다. 사용자측은 거기에 덧붙여 경제 위기의 원인이 고비용·고임금에 있다고 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개정할 노동법에 변형근로시간제와 정리해고제 도입을 강력히 요구했다. 집단적 노사관계법 협상 대신에 개별적 노사관계법 양보를 끌어들인 것이다. 이는 당시 기업이 주도한 명예 퇴직의 비용마저 앞으로는 부담하지 않겠다는 자본의 배짱 논리였다.

그러나 사실 폭력을 의도했건 내몰렸건 학생운동의 과격성과 급진성을 드러냈을 뿐인 한총련 사태와 북한의 모험주의적 군사 행동을 드러낸 잠수함 사건은 본질적으로 각각 치안과 안보의 문제이지 노사관계나 국가 경쟁력과는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의 보수 기득권 체제를 떠받치는 3두 마차인 공안과 재벌과 언론의 3중창은 ‘복수 노조=사회 혼란=경제 위기’ 일색이었다. 21세기를 준비하기 위한 신노사관계 선언에서 출발한 노동법 개정이, 마치 눈앞의 경제 회복을 위한 것인 양 자본의 논리로 호도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문제는 이같은 호도가 반공 이데올로기를 고리로 보수 기득권 체제를 유지하는 쪽으로 상황의 반복 구조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92년 대통령 선거를 위한 ‘승자 연합’ 형성을 가능케 했던 3당 통합은 그에 앞서 국가의 사법·정보 기구가 주도한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 즉 89년의 ‘공안 정국’으로 가능했다. 그것은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이 결합하면서 민주화운동이 매우 위협적으로 대중을 동원하게 되었을 때 북한 스파이 침투, 북한의 위협 제거라는 명분으로 대중 매체를 통한 반체제 민주화운동에 반대하는 반공주의적 언술의 강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김영삼 정부의 개혁과 한국 민주주의의 성격을 탐구한 최장집 교수(고려대·정치학)의 위와 같은 분석틀(<한국 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을 원용하면, 96년 8∼9월의 한총련 사태와 잠수함 사건이라는 내외적 변수를 계기로 조성된 신공안·안보 정국은 97년 대선의 새로운 승자 연합을 위한 구체제의 답습인 것이다. 이같은 동맹의 조짐은 이미 날치기 직후, 날치기 총대를 멘 신한국당 이홍구 대표의 발언에서 드러난다.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 표로 심판받겠다. 민주노총 지지자들이 내년 선거에서 우리 당 후보를 찍지 않을 것을 각오하고 있다.”

민주노총 지지자들은 어차피 ‘친야’성향의 유권자들이어서 표에 도움이 안되는 만큼 사용자 및 보수 중산층을 확실하게 챙길 수 있는 승자 연합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이어 새해 연휴를 넘기고 2차 파업이 시작되자마자 나온 신한국당 김 철 대변인의 논평은 그 불길한 조짐이 ‘명백하고도 현저한 위험성’으로 다가오게 한다.

“북한 정권이 우리 당의 재집권 저지 투쟁을 선동하고 있는 것은 우리 당의 정권 재창출이 그들의 목표 달성을 가장 어렵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당은 북한 정권의 선동을 가당치도 않은 것으로 보나, 그것이 우리 내부의 친북 세력에게는 일종의 지령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국민적 주의는 필요하다고 본다.”

노동자의 표현·결사의 자유 침해 예고

그러나 92년 대선 직전에 불어닥친 김대중 후보에 대한 색깔론 시비와 북한 방송이 남한 민주 세력에게 김대중 후보 지지를 지령했다는 안기부 발표 및 민자당 성명이 막판 선거에 미친 영향을 감안하면, 노동계 및 재야·시민사회의 파업 및 김영삼 정권 퇴진 투쟁을 북한 정권의 지령으로 연계하려는 기도야말로 ‘국민적 주의가 필요’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노동·파업 현장에서 체포된 상당수 노동자가 국가보안법과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온 경험칙은 안기부법 및 노동법 개정이 노동자의 표현의 자유 및 결사의 자유에 대한 침해로 이어질 것임을 예고해 준다.

민주노총이 노개위에 참여한 명분은 ‘참여와 투쟁’이었다. 민주노총이 노개위에 참여할 때의 의도는 ‘청와대 내부의 개혁 세력과 좀더 긴밀히 협조해 수구파를 고립시키고 유리한 국면을 조성해 민주노총의 합법화와 조직 신장을 이룩해 보자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노개위를 통한 개량(참여와 투쟁)이라는 명분은 한국 사회의 수구 세력과 반공 이데올로기 위력을 과소 평가한 순진한 정세 판단에서 말미암은 것임이 드러났다.

반공 이데올로기 동원과 그 위력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한국 사회에서 반공 이데올로기를 기제로 한 공안·재벌·언론의 3두 마차를 견제하지 못하고서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는 물론 노사의 공정한 게임마저도 아직 요원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