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금융계 지각 변동 불가피
  • 장영희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1997.02.0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영 압박·공신력 추락 이중고… 금융 개혁에도 파장 미칠 듯
금융권에 한보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이른바 ‘한보 게이트’는 금융권 판도에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한보 사태에 말려든 제일·산업·조흥·외환 은행은 한동안 몸살을 앓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제일은행은 59개 채권 금융기관 가운데 한보그룹에 가장 많은 돈 (1조1천1백77억원)이 물려 있다. 자기 자본의 60%가 넘는다. 올해 당장 미수 이자 및 대손 충당금 규모가 3천5백억원을 넘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94년까지도 수년간 업계 1위를 자랑하던 이 은행은 95년 유원건설, 96년 우성건설 등 잇달아 엄청난 부실덩어리를 떠안아 2년 동안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한보 건이 엎친 데 덮친 격이 된 것이다.

조흥·외환 은행도 이번에 크게 물려 경영 악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한보에 5천억원을 대출한 조흥은행은 올해 업계 1위 자리를 빼앗길 공산이 크고, 외환은행(4천5백억원)도 상당 기간 우량 은행 대열에서 밀려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조흥·외환 은행은 부실 기업에 잘 걸려들지 않은 은행으로 알려져 왔다. 금융계 관계자의 말을 종합해 보면, 제일·산업 은행은 물리기를 자초한 인상이 짙고, 조흥·외환 은행은 거절 못할 곳의 외압으로 96년 들어 한보에 거액을 대출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어 흥미롭다.

일부 은행장 희생양 삼을 가능성

더구나 이들 연루 은행들의 은행장 및 임원들은 불과 한달여 남은 정기 주주 총회에서 문책성 경질을 당할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예측된다. 앞으로 검찰 수사에 의해 이 사건에 대한 실체적 진실이 밝혀지면, 사법 처리를 받는 은행장도 나올 것으로 보인다. 검찰이 배후를 전혀 못 밝히거나 혹은 덜 밝혀낸다고 해도, 그럴수록 민심 수습 차원에서 은행 관계자를 희생양으로 삼을 것이라는 시각이 적지 않다. 이래저래 연루된 은행들은 초상집 같은 분위기이다.

1군 은행들이 이번 건에 휘말리면서 상업·한일·신한 은행 같은 2군 은행들은 반사적 이익을 누릴 것으로 보인다. 하나· 보람 같은 후발 은행들도 득을 볼 것이다. 금융계 관계자들은, 그동안은 은행 서열이 도토리 키재기 식으로 큰 차이가 없었지만 이 사건이 그 간극을 크게 벌려 놓아 지각 변동을 일으킬 것으로 점치고 있다.

제일은행 다음으로 거액이 물린 산업은행(8천 3백억원)은 국책 은행이라는 점에서 판도 변화와는 별 관련이 없지만, 바로 이 점이 두고두고 이 은행을 옥죄는 요인이 될 것이 틀림없다. 산업은행의 정책 자금은 시중 은행의 일반 대출 자금보다 금리가 최소 1% 포인트 낮다. 기업으로서는 이 돈을 받는 것 자체가 특혜로 여겨질 만큼 조건이 좋다. 국가 정책적으로 꼭 필요한 부문에 쓰여야 할 이 돈이 특정 기업의 냄새 나는 곳에 퍼부어졌으니 여론의 질타를 피할 길이 없게 된 것이다.

한보 사태에 연루된 은행들은 이 그룹에 물린 엄청난 돈 자체가 경영 압박을 가하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나라 안팎에서의 공신력 추락으로 적잖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 금융 소비자들은 연루 은행에 대해 외압이 작용했든, 순전히 판단 착오에 의해 물렸든 위험한 은행이라고 판단하는 분위기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공신력 추락은 당장 나라 밖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국제 신용 평가 기관인 무디스사는 제일·조흥·외환 은행을 ‘감시 대상 목록 (Watch List)’에 올려놓고 해외 투자가들에게 주의를 환기하고 있다. 현재 조흥·외환 은행과 제일은행은 평가 등급이 각각 A3, BAA1로 꽤 좋은 편이었는데, 한두 단계 신용도 추락이 불가피하리라고 금융계는 예측하고 있다. 해외 차입을 많이 해온 산업은행도 상당 기간 차입 자체가 어렵거나 차입 금리 상승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한보 사태는 금융 개혁에도 직·간접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엄정한 대출 심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외압에 따라 춤을 추는 금융 풍토를 수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보 사태가 빅뱅식 금융 개혁에 불을 당긴다면, 그나마 이번 금융 추문은 사회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엄청날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