占에 살고 땅에 죽은 정태수 총회장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7.0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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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마다 運으로 모면…신세진 사람에겐 철저 보은
정태수 총회장은 점(占)과 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지난 74년 23년 간의 세무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창업한 것도 한 역술인의 충고가 계기가 되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스님이나 역술인의 조언에 의존한 그의 의사 결정 스타일은 한보그룹 붕괴의 서막이 된 당진제철소 건립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지 선정에서 기공식 날짜까지 역술인이 정했는데 이 인사는 90년 기공식 행사에 귀빈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기공식 날짜가 한창 추운 12월29일로 정해진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는 점에 대한 자신의 집착에 대해 스스로 인정한 적도 있다. 당진제철소 1단계 공사가 마무리된 95년 4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예전에는 점도 자주 봤습니다만, 요즘은 거의 안봅니다”라고 말했다. 그 이유가 걸작이었다.“요즘은 (점을) 잘 보는 사람이 없어서요.”

점이 위력을 발휘해서는 아니겠지만, 실제로 정씨에게는 운이 많이 따랐다. 사업 초기에 인수한 강원도 폐광들이 노다지로 둔갑했는가 하면, 건설하는 아파트들 역시 잘 팔려나갔다. 한보그룹사(史)에서 최초의 위기라고 할 79년 은마아파트 미분양 사태 역시 운이 해결해 주었다.

땅에 대한 집착도 자멸의 한 원인

정부의 부동산 억제 대책으로 부도 직전까지 몰렸던 한보그룹은 8·3 사채 동결 조처와 이듬해 오일 쇼크로 부동산 경기가 되살아나면서 벼랑 끝에서 기사 회생했다. 당시의 경험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씨는 그 후부터 ‘사업에서는 운이 99%’라는 지론을 펴왔다.

두 번째 위기는 6공 최대의 의혹으로 불린 수서택지 특혜 분양 사건이다. 그 때도 역시 밀려드는 어음 때문에 한보는 부도 직전 상황이었다. 정씨는 문제가 된 한보주택에 대해 법정 관리를 신청했다. 이 신청에 대한 법원 판정에는 1년 정도가 걸렸는데, 이 기간에 채무가 동결되어 숨통이 트였다. 또 거래 은행들이 7백억원 지급 보증을 대출로 전환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추가로 2백50억원을 지원해 주기도 했다. 재계에서 한보가 운만으로 큰 것은 아닐 것이라는 얘기가 본격적으로 돌기 시작했던 것은 이 때부터였다.

수서 사건을 통해 부분적으로 드러나기는 했지만, 정씨의 로비력에 대해서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한보그룹과 재계 내부에서는 혼자서, 그것도 현금이나 세탁된 수표 같은 안전한 방법으로 하는 그만의 독특한 로비 스타일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현재 시중에 그의 배후 세력으로 거명되는 인물들을 적시한 ‘정태수 리스트’가 나돌고 있지만, 당사자들이 입을 열기 전에는 그 혐의 사실이 밝혀질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일단 신세를 진 사람한테는 철저히 갚는 것 역시 그만의 스타일이다. 수서 사건으로 수감 생활을 한 어떤 의원에게는 하청 업체를 주어 평생 먹고 사는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도 되도록 배려했을 정도다. 이는 전직 공무원들을 그룹 임원으로 기용하는 경영 방식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점과 운세를 믿은 결과인지는 몰라도, 그는 유독 땅(명당)에 집착했다. 본인 스스로 땅박사라고 자처했고, 그에게 따른 운의 상당 부분도 땅을 잘 썼기 때문이었다고 믿을 정도였다. 여기에는 이런 풍수지리적인 요인말고도 은행에서 돈을 빌리자면 담보가 필요하다는 실리적 계산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크다.

마지막 승부수가 된 한보철강의 역사도 운세와 땅에 대한 정씨의 집착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초 한보가 한보철강의 전신인 금호철강(금호그룹 계열사)을 인수한 것은 84년. 조흥은행의 주선으로 부산 지역의 이 회사를 인수할 때만 해도 그는 철강 사업에 큰 뜻이 없었다. 공장 부지에 아파트를 지어 팔 생각뿐이었다.

상황이 바뀐 것은 한보가 이 회사를 인수한 후 철강 경기가 살아나면서부터였다. 인수할 때 65만t 규모이던 이 철강 회사는 증설을 거듭했는데, 9만평이 넘는 이 지역에 더 증설하기가 불가능해지자 정씨는 공장 이전을 결심했다. 아산만을 매립해 제철소를 세우는 대역사를 위해 그가 가진 상당량의 부동산을 처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단 백만평에 이르는 아산만 매립지가 모습을 갖춤에 따라 은행 돈이 들어오자, 그는 당초의 계획을 바꿔 부산의 공장 부지를 포함한 노른자위 땅은 팔지 않았다. 95년 4월의 인터뷰에서 그는‘부산 철강공장 부지가 일등 자리’라는 예의 지운론(地運論)만을 되풀이했다. 그렇다면 그와 한보의 붕괴는 과연 그의 운세가 다한 것이었을까, 로비의 위력이 빛을 잃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둘 다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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