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 따리 의혹’ 어디까지 풀릴까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7.0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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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대출 비리…소유 구조상 정상적 자금 조달 곤란, 특혜 가능성 높아
채권은행단이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에게 제시한 마지막 카드는 한보철강 경영에서 손을 떼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정씨 일가가 가진 한보철강 주식(전체의 47%) 가운데 담보로 제공되지 않은 것을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시사저널> 이 알아낸 미담보분은 전체 발행 주식의 19%였다.

주식 19% 포기 안한 것이 화근

은행단은 정씨 일가가 한보철강에 직접 조달해 투자한 1조원 가량에 대해서는 발언권을 인정하겠다는 단서도 달았다. 최종 방침을 결정하기까지 은행단은 정부와 미묘한 관계였다. 그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은행단이 파악한 정부의 방침은 당진제철소가 완전 준공될 때까지는 추가 지원을 해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1월18일부터 한보그룹은 돌아오는 어음을 막지 못해 사실상 부도 상태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부는 한보의 부도는 막되 정씨 일가가 경영에서 손을 떼게 할 마지막 카드를 고안해냈던 것이다. 이 방침은 22일 이수휴 은행감독원장과 신광식 제일은행장이 협의하는 과정에서 전달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런데 정씨는 이를 거절했다. 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이 그에게 포기 각서를 쓰라고 한 23일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매출액이 5조원을 넘는 재계 14위 한보그룹이 공중 분해된 지금에 와서 보면 지극히 관대한 이 제안을 정씨는 왜, 무엇 때문에 거절했을까.“뭔가 믿는 구석이 있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었다.” 한 시중 은행 한보 담당자는 아직도 마지막 순간 정씨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씨와 한보의 태도가 급변한 것은 은행단이 부도를 내겠다는 강경한 방침을 한보에 통보하고, 실제로 23일 오후 1차 부도가 나고 나서였다. 정씨는 은행장들에게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으며, 나중에는 애원조가 되어 중역들에게 주식을 넣은 가방을 들려 제일은행으로 두 차례나 보냈다.

금융계는 이 최후의 순간 정씨가, 정부가 한보의 공중 분해를 결정했으며, 더 이상 자기가 믿을 구석이 없다(혹은 없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상황과 관련해, 청와대가 대선을 앞두고 한보 문제가 불거지느니 지금이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지만, 아직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제일은행으로서도 당진제철소가 완전 준공되고 나서도 상황이 호전되지 않을 바에는 당장 부도 처리를 하는 것이 유리하리라 판단했다고 실무자들은 증언하고 있으나, 이런 방침은 은행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이 금융계의 관행이다. 한보가 숨이 끊어지던 순간의 의혹이 결론 부분에 해당한다면, 주요 은행들이 한보그룹에 물리게 된 과정은 본문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당초 제일은행이 필요 이상의 돈을 쏟아붓게 된 계기는 95년 한보가 유원건설을 인수하면서부터였다. 유원의 주거래 은행이던 제일은행은 유원이 공중 분해되지 않기를 원해 제3자 인수를 추진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한보에 대한 자금 지원을 중단할 수 없었다.

문제는 외환은행·조흥은행과 같은 은행들이 한보에 물리게 된 과정이다. 물론 충남 아산만을 매립해 제철소를 건립하겠다는 한보의 구상에 대해 산업은행이 저리로 시설 자금(시설 투자 금액의 80%, 후에 90%)을 대주기로 한 마당에, 다른 은행들이 이를 토대로 대출해 준 것에 특별한 하자는 없다(일부 언론이 산업은행의 대출 과정에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난해 하반기에 이르면서 담보가 부족한데도 대출을 계속한 것은 잘못이지만, 이 또한 한번 물리면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쉽게 발을 못빼는 금융계의 관행 때문이라고 이해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비교적 부실 여신이 적은 두 은행이 한보와 연을 맺게 된 데는 외압이 분명히 작용했다는 증언이 있다. 당시 상황에 밝은 정부의 한 관계자는 “제일은행 혼자 힘으로는 걷잡을 수 없게 되자 비교적 여신 상황이 좋던 두 은행이 추가 지원해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정부에서 나온 것으로 안다”라고 밝혔다. 은행 대출과 관련해 외압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외압이 우선했는지 은행들이 어쩔 수 없어 그랬는지는 분명치 않아도, 자금악화설이 나돌기 시작한 지난해 하반기 이후에는 입장이 크게 뒤바뀌게 된다. 당시 4조원이 넘는 자금이 물린 은행에 대해 한보가 도리어 큰 소리를 쳤던 것이다. 한 시중 은행의 한보 담당 부장은 잔고가 부족하다고 통고하자 한보 자금 담당 상무라는 사람이 와서 추가 대출을 요구했는가 하면, 퇴근한 은행장 집에 직접 전화를 걸어 생떼를 쓰기도 했다고 말했다.

수서 사건 이후 한보그룹이 급격히 성장한 배경과 관련된 의혹의 서막은 재계 45위이자, 수서 사건으로 자금 위기에 몰렸던 한보그룹이 어떻게 해서 건설 자금만도 수조원에 이르는 제철소 건설을 허가받았느냐 하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다. 우선 한보그룹의 제철소 진입은 허가 사항이 아니었다. 한보는 84년 부산 소재 금호그룹 계열사인 금호철강을 인수하면서 이미 제철업에 진출한 상태였다. 당진제철소 건립은 90년 말부터 이 회사를 이전한다는 명목으로 추진된 것이므로 당시 상공부의 인허가 사항은 아니었다.다만 제철소 건립 과정에서 전기로와 코렉스(용융환원식) 공법 기술 도입 신고서를 제출한 적이 있는데, 두 첨단 제철 방식은 정부가 권장하는 방식이어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음은 당시 상공부 한 관계자의 말. “한보그룹이 수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는 했다. 특히 그런 의구심은 이번 정부 들어 한보철강이 괴자금을 끌어다 쓴다는 얘기가 돌면서 더욱 증폭됐다. 그러나 그런 문제는 우리가 다룰 성질이 아니었다.” 물론 아산만 매립 허가가 나온 과정에서 부정이 저질러졌을 여지는 있다.

세간의 각종 설(說)을 배제하고 객관적 정황들만을 따져볼 때, 한보 사태의 핵심은 역시 한보철강에 대한 대출 의혹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하면 붕괴 과정에서의 정치적 고려나 제철업 진입 과정에서의 배후 문제는 사소한 비리에 지나지 않는다. 검찰 수사의 표적이 된 한보상호신용금고의 부당 내부 거래나, 앞으로 불거질지 모를 한보그룹 내부의 비리 역시 마찬가지다.

한보가 특혜 대출이 불가피했던 데는 정씨 특유의 소유 및 경영 스타일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보그룹은 소유 구조만 놓고 보면 주식회사라고 보기 힘들 정도다. 총수 일가가 가진 지분이 86%로, 30대 그룹 가운데 가장 높다(96년 4월 공정거래위원회 발표 자료. 30대 그룹 평균은 44.4%). 게다가 주요 계열사들 역시 정씨와 정보근 현회장이 최대 주주(17쪽 도표 참조)이다.

이런 소유 구조 탓에 한보는 증권시장보다는 금융기관 대출을 통해 자금을 조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금융기관 빚은 부채 비율이 1000%가 넘는 한보그룹 전체의 매출액과 거의 맞먹는 5조원에 육박한다. 게다가 회사의 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사채 시장 자금도 상당액 끌어다 썼다는 주장(아래 상자 기사 참조)이 제기되고 있다. 이 정도의 부채라면 정상으로 대출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금융권은 한보철강의 부동산과 설비 외에 정씨 일가의 주식 일부를 담보로 확보했던 지난해 연말 이후는 담보도 없는 상황에서 두 차례나 추가 자금 지원을 해준 셈이다. 한보 부도 후 인터뷰에 응한 정씨는 한보 붕괴를 ‘한보철강 인수를 노리는 업체의 음모 때문’이라고 했지만, 외압이나 배후가 있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그러나 세간에 떠도는 정치권 인사들이 특혜 대출의 배후로 공식 확인되느냐 하는 것은 별개 문제다. 대출 외압이 관행으로 굳어진 금융계에서 직접적인 증거가 남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특혜 대출 시비로 금융기관장이 구속된 적은 있어도 최종 배후가 누구였는지 밝혀진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자신의 운과 로비력을 자신하는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이 마지막으로 믿고 싶었던 것 역시 이 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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