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동북아, 미국 패권에 ‘중국 경제’ 도전
  • 워싱턴/변창섭 (cspyon@sisapress.com)
  • 승인 1997.0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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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일본과 군사적 연대 통한 대륙 봉쇄’ 정책 펼 듯
21세기를 눈앞에 둔 오늘날의 국제 질서는 냉전 체제가 종식됨으로써 각국이 이념과 체제를 초월한 채 오로지 국익을 좇으며 합종연횡을 거듭하는 양상을 띠어 가고 있다. 한때 사회주의 종주국이던 러시아가 시장 경제를 도입하며 미국과 손잡았는가 하면, 중국이 지난해 무역 흑자를 4백50억달러나 기록하며 미국과 무역 마찰을 빚는 기막힌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또 북한의 우방이던 중국과 러시아가 한국과 수교하는가 하면, 한국의 맹방인 미국이 어제의 적인 북한을 상대로 적극적인 관계 개선을 추구하고 있다. 이 모든 모습이 21세기 개막을 3년 앞둔 오늘날의 국제 상황이다.

경제가 국제 질서 좌지우지

특히 냉전 후 새롭게 태동하고 있는 국제 질서는 과거처럼 정치·안보 중심이 아니라 경제적 요소가 갈수록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 상당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전후 세계 경제 질서를 지배해온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체제가 막을 내리고 95년 1월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출범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 유럽연합(EU),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와 같은 지역 경제권의 움직임이 어느 때보다 활발한 것도 새 질서 짜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국제 경제 전문가인 이동휘 박사(외교안보연구원 경제통상연구부장)는 냉전 이후 국제 질서 재편에서 가장 중요한 동인으로 경제를 꼽고 “이런 상황에서 각국은 경제 이익 극대화를 꾀하며 정치·군사적 위상을 증대하려 할 것 같다”라고 전망했다.

이처럼 경제 요소가 국제 질서를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로 떠오른 배경에는 대체로 세 가지 요인이 꼽힌다.

첫째, 탈냉전 후 전세계에 다변화·다원화·다자화 추세가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각국의 관계가 정치·안보 못지않게 경제 관계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었다.

둘째, 일부 국가의 경우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여 정치 또는 군사 대국화를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세계 제2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일본이나 연평균 10%의 고도 성장을 누리는 중국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군사 대국의 길로 나갈 수 있다.

셋째, 각국이 경제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무역 마찰과 같은 갈등이 증폭되어 외교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이 무역 적자를 보이고 있는 중국이나 일본과 불편한 관계인 것이 대표적 예이다.

이처럼 경제 요소가 국제 환경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 확실해지면서 21세기에 특히 주목해야 할 곳으로 떠오른 지역이 있다.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에 비해 냉전 후에도 여전히 안보 불안 요인이 남아 있는 동아시아가 바로 그곳이다. 이 지역에 있는 일본·중국·한국·대만·홍콩 다섯 나라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3년 기준으로 20.7%였지만, 2003년에는 28.5%에 이를 전망이다. 또 94년 말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은 일본이 4조5천9백10억달러, 중국이 5천82억달러로 각각 세계 2위와 8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은 3천7백96억달러로 11위에 올라 있다. 그만큼 경제적으로 동아시아는 유럽 및 북미 지역과 함께 3대 경제권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 지역이 경제 번영을 다음 세기에도 지속하려면 무엇보다 안보 불안 요인을 제거할 필요가 있으며, 이 지역의 전통적인 세력균형자였던 미국의 지속적인 개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현재 미국은 국내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신고립주의자들과 재정 적자 축소를 주창하는 의회의 등쌀에 못이겨 해외 주둔 미군 감축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아시아·태평양에 배치한 15만 미군을 앞으로 10만까지 줄인다는 계획이다. 이같은 감축 규모는 이 지역의 안보 불안 요인이 줄어들면 더 늘어날 것 같다. 중국, 21세기 중반에는 세계 2위 경제 대국

미군 감축이 이루어질 경우 전후 팽팽한 세력 균형이 유지되던 동아시아에 힘의 공백이 생길 가능성이 있으며, 그 공백을 중국이나 일본이 메우려 할 가능성도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미국의 태도인 것 같다. 미국이 중국과 일본을 어떻게 보느냐, 또 어떤 식으로 이들과 세력 균형을 유지해 나갈 것이냐가 이 지역 전체의 질서는 물론 미·중·일·러 4대 강국의 이해가 상충하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사실 클린턴 행정부는 1기 출범 때부터 아시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가 93년 11월 각료급 수준이던 에이펙의 위상을 정상회담으로 끌어올린 것이 한 예다. 이듬해에는 전임 공화당 정부가 고수해온 중국에 대한 무역 상의 최혜국대우(MFN)와 인권 문제를 연계하는 정책을 포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시간이 갈수록 분쟁이 악화하는 중동에 밀려나면서 아시아 경시론마저 나돌았다. 특히 클린턴 대통령이 94년 11월 도쿄에서 열린 에이펙 회담에 불참하자 이같은 경시론은 더욱 설득력을 띤 듯 보였다.

자연스레 아시아의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클린턴 행정부는 94년 봄 아시아 각국의 안보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21세기에도 아시아·태평양에 미군 10만명을 전진 배치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아울러 아시아에 대한 기존 개입 정책을 지속할 것도 다짐했다.

미국은 현재 동아시아 전략의 핵심을 △역내에서의 경제적 이익 확보 △역내 패권 국가 등장 저지 △대량 살상 무기 확산 방지 △민주주의 확산 등 네 가지에 두고 있다. 이런 목표에 따라 미국은 한국·일본과의 군사 동맹을 강화하면서 북한의 핵확산을 방지하고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울러 과거 적대국이던 중국·러시아와도 건설적인 협력 관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대한 미군 전진 배치가 이 지역의 역동적인 경제 요인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현재 이 지역과 해마다 4천억달러에 이르는 교역을 달성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인 3백만명에게 일자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집권 2기를 맞이해 더욱 경제 외교 우선주의를 주창하고 있는 클린턴 행정부는, 미군 배치를 통해 이 지역의 안정을 도모하면서 최대한 경제적 실리를 챙기겠다고 계산한 것 같다. 이처럼 경제 요인이 종래의 정치·안보 요인 못지않게 국제 질서의 변수로 떠오르자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관련해 특히 신경을 쓰는 나라가 중국이다. 대다수 경제 전문가들은, 중국이 현재와 같은 고도 경제 성장을 유지한다면 21세기 중반에 일본을 제치고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문제는 중국이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군비 지출을 늘림으로써 이 지역에서 군비 경쟁을 촉발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과거 중국은 고성능 무기와 민간 핵기술을 이란을 비롯한 제3 세계에 몰래 판매한‘전과’를 갖고 있다. 이는 대량 살상 무기 수출 금지와 핵확산 금지라는 미국의 정책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다. 특히 중국이 현재와 같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전세계에 공산주의 확산 정책을 펼 경우 과거 미국과 옛 소련 간의 냉전에 버금가는‘신냉전 ’시대가 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고 전문가들은 내다본다. 미국내 일각에서 중국 봉쇄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클린턴 대통령은 미국이 중국을 봉쇄하는 데 관심이 없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중국이 더 자유를 구가하고 경제적 번영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개입 정책은 계속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천명한 바 있다. 중국은 바로 이같은 개입 정책의 저의에 깊은 의구심을 가진 듯하다. 얼마전 북경에서 열린 국제 세미나에 참석해 중국측 인사들을 두루 만나고 돌아온 전성훈 박사(민족통일연구원 연구위원·국제정치학)는 “중국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개입 정책이 중국 사회를 약화시키기 위한 책략이라고 본다”라고 전했다. 즉 민주주의·시장 경제·인권 등 미국적 가치를 구현해 중국 사회를 변화시키려는‘화평연변(和平演變)’ 계략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맹방인 일본의 사정은 어떤가. 세계 2위의 경제력을 가진 일본은 저개발 국가를 상대로 한 공적개발원조(ODA)의 세계 최대 기부국 자리를 미국으로부터 넘겨받은 지 오래다. 또 92년 통과된 평화유지활동법에 따라 일본은 모잠비크·자이르·캄보디아의 유엔 평화유지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방위비를 GNP 대비 1%로 제한한 평화헌법이 살아 있는 데다, 미·일 안보조약 때문에 군사 대국화의 길이 원천적으로 막혀 있다.

한반도 주변 4강의 일원인 러시아는 시장 경제 도입에 따른 혼란과 정치 체제 불안을 극복하지 않는 한 21세기 동아시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기 힘들어 보인다.

따라서 21세기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수행과 관련해 최대 위협국은 중국인 셈이다. 저명한 국제정치학자로 94년부터 2년간 미국 국방차관보를 지낸 조셉 나이(하버드 대학 행정대학원장)는‘앞으로 20년에 걸쳐 미국·중국·일본 3국 중심으로 세력 균형이 유지될 동아시아에서 중·장기적 안보 불안 요소는 중국이 떠오르는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인구 12억인 중국이 막강한 경제력을 이용해 군사력을 강화하며 이 지역에서 패권을 추구할 경우 미국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와 관련해 조셉 나이 원장은 흥미로운 주장을 편다.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추구할 가능성은 50 대 50이므로, 미국이 중국을 적으로 간주하면 중국과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50% 가능성마저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 그는 중국이 국제 사회에서 책임 있는 일원이 되도록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려면 미국이 이 지역에 미군을 주둔시켜 세력 균형을 이룩해야 하며, 중국이 돌출 행동을 할 때 값비싼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질서 대비한 ‘신한국 책략’ 절실

전문가들은 21세기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국제 사회의 규칙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때 미국의 최대 골칫거리가 되겠지만, 군사 충돌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 무엇보다 미국과 중국이 상호 의존적인 교역에서 얻는 것이 너무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상황을 종합해 볼 때 21세기에 동아시아 신질서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미국은 여전히 중심적인 지도력을 행사하면서 중국에 대해 경제적으로는 개입 정책을 추구하되 군사적으로는 일본과 연대해 봉쇄하는‘연일봉중(聯日封中)’ 정책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열강의 각축장이 될 동아시아의 핵심 일원인 한국은 무엇을 대비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기본적으로 한국이 한·미 동맹 관계를 유지하면서 경제적인 동맹 관계까지도 포함하는 포괄적인 정책을 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특히 한반도가 위치한 동북아는 한국이 안전 보장과 경제 번영, 나아가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중요한 이해가 걸려 있는 곳이어서 과거 어느 때보다‘신한국 책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삼성 교수(한림대·정치외교학)는“우리 정부는 지금부터라도 강대국의 이익과 한국의 이익에도 합치하는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 수교해 한반도에 교차 승인이 이루어지면 남북 분단이 고착화할 가능성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이 주도적 역할을 맡게 될 21세기 동아시아 신질서 구축 과정에서 한국이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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