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서민 대통령’ 으로 거듭나는가
  • 張榮熙 기자 ()
  • 승인 1999.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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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 이하 껴안는 ‘생산적 복지’ 천명…비틀린 분배 구조 개선할지 주목
‘광복절 복음.’ 김대중 대통령은 8월15일 중산층·서민·중소기업인 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예정이다. 그는 지난 현충일 기념사에서 국정 철학의 두 축인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에다 ‘생산적 복지’를 추가했다. 이른바 삼위일체론이다. 생산적 복지라는 알 듯 모를 듯한 개념이 순식간에 그의 국정 철학 반열에 오른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DJ노믹스로 다시 돌아오고 있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대통령 정책 노선의 큰 틀이 바뀌고 있다고 본다. 극도로 효율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에서 국민 복지를 강조하는 신중도 노선으로 선회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김영호 교수(경북대·경제학)는 ‘DJ노믹스로 되돌아오고 있다’며, 김대통령이 〈대중참여경제론〉을 다시 꺼내 보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9월 한 심포지엄에서 ‘DJ노믹스에 DJ가 없다’고 한 말이 지식인 사회에 회자된 바 있는 김교수는, 6·25 사과 성명이 나온 후 이런 흐름을 강하게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1년 6개월 동안 그의 경제 철학인 DJ노믹스를 접었던 것일까.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를 추종했을까.

대통령 자신이 신자유주의자라고 자처한 적은 없다. 그러나 대통령의 지향성에 대해 상반된 해석이 있어 왔다. 노동계와 진보 진영 학자들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대량 실업과 중소기업 도산을 묵인 또는 조장하고 한국 기업을 헐값에 팔아치우기 위해 시장을 개방한 정책 노선은, 국제통화기금을 앞세운 미국의 이해, 즉 신자유주의를 신봉한 탓이다”라고 주장했다. 지금도 이들은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반면 그의 경제 참모들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현실론을 편다. 대통령 선거 전부터 경제 정책 자문에 응해온 중경회 소속 경제학자는 “대통령을 신자유주의자로 몰아붙이는 것은 그를 한참 잘못 이해한 것이다. 중소기업·중산층·서민은 장기간 여러 경험을 통해 형성된 DJ 경제 철학의 중심이다. 지난 1년 반 동안 자기 경제 철학의 중심이자 정치적 지지 계층인 이들을 돌볼 수 없었던 것은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일이 워낙 화급했기 때문이지 신자유주의 망령에 사로잡혀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강한 반론을 제기했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도 “외자를 유치하고 시장을 개방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겠는가. 정리 해고 역시 불가피했다”라며, 대통령이 앞으로 중산층과 서민을 배려하는 정책을 펴겠다는 것은 그가 원형으로 회귀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설사 그동안의 김대중 정부 정책 노선이 상황 논리에 떠밀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신자유주의 냄새를 물씬 풍겼던 것은 사실이다. 오해를 살 구석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같은 세간의 인식을 권력 주변에서 몰랐을 리 없다. 이런 우려를 집대성한 것이 지난 2월께 대통령에게 전달된 이른바 ‘극비 보고서’. 정부·여권·학계에 포진한 핵심 자문 그룹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 보고서는 ‘현정권의 지지 기반인 중산층과 서민층의 붕괴를 방치할 경우 차기 정권 창출이 어려운 것은 물론 내년 총선에서 위기에 내몰린다’며 정책 노선을 변경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책이 변화할 조짐은 올 들어 몇 차례 나타났다. 김대중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나라 경제가 궤도에 오르면’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노동자·농민·서민·중산층 등 모든 국민이 그 성과를 함께 나누고 국가의 혜택을 볼 수 있는 정책을 펴가겠다고 말했다. 3·1운동 영령들 앞에서 과거처럼 재벌이나 특권층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했다. 4월6일 국무회의에서도 ‘국민의 정부는 중소기업인과 중산층을 국가의 정치·경제적 중심으로 삼고 있다’며 내각에 금융과 세제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또 ‘소외 계층과 저소득층의 생활을 지켜, 나라가 나를 버리지 않고 있다, 이 나라가 내 나라다라는 생각을 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민심 되돌리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 듯

이런 대통령의 의지가 정책으로 현실화한 것이 ‘6·18 중산층 및 서민 생활 안정 대책’이었다. 그러나 이 정책의 약발은 거의 먹혀들지 않았다. 총선용 선심성 정책이라는 비난이 컸을 뿐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옷 로비 사건, 파업 유도 사건 같은 악재가 이어지면서 민심은 날로 악화했다. 급기야 대통령은 국민 앞에 머리를 숙였다. 6·25 대국민 사과 성명이다. 이후 그는 민심을 껴안기 위한 대중 정치를 가속화했다. 7월22일 전남 광양시에서 열린 ‘전남 행정 개혁 보고 회의’에서 “중산층·노동자·농민·봉급 생활자·중소기업을 위한 근본 대책이 필요하다. 이들이 나라의 중심이 되도록 하는 정책을 8·15 때 발표하겠다”라고 거듭 밝힌 것도, 이 길만이 등 돌린 민심을 되돌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민심은 왜 이토록 악화했을까. 집권층 내부의 비리 때문일까. 이런 사건들이 심리적 영향을 미친 것은 틀림없지만, 그보다 훨씬 심각하고 본질적인 이유는, 못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왜 못살게 되었을까. 중산층이 구조 조정 과정에서 파생된 대량 실업과 소득 감소라는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소 류상영 수석연구원은 “특히 경제 위기 때마다 중산층 약화가 문제 되는 이유는 이들이 위기에 취약한 경제적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중산층은 가구 소득에서 차지하는 근로 소득의 비중(64.2%)이 상류층과 하류층에 비해 월등히 크다. 가구주 소득에 대한 의존도 역시 74.7%나 된다. 반면 연간 가구 소득에서 자산 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류층과 하류층이 각각 9.4%, 10.1%인 데 비해 중산층은 7.0%에 불과하다. 중산층의 경우 가구주가 실직하거나 임금이 대폭 깎일 때 그 충격이 얼마나 클지 짐작케 한다.
그런데 모두가 똑같이 못살게 되었다면 정권을 향한 분노가 잦아들 수도 있다. 하지만 ‘반갑다 IMF. IMF여 영원히!’를 외치는 계층이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사회적 박탈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널리 알려져 있듯 임금 소득보다 자산 소득이 많은 사람들은 국제통화기금 초기에 고금리 혜택을 톡톡히 본 데다가 주식 시장 활황에 따른 재미도 쏠쏠했다. 이런 부의 양극화 현상은 원래 가지지 못했거나 조금 가진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할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 사회의 분배 구조가 최악이라는 통계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통계청의 도시 근로자 소득 통계를 보자. 97년 평균 월소득이 5백9만원이던 최상위 10% 계층의 수입은 98년 국제통화기금 관리 체제에서는 5백29만원으로 4.0%가 늘었다. 반면 73만원을 벌던 최하위 10% 계층의 소득은 56만원으로 22.8%가 줄었다. 이들 간의 소득 격차는 10 대 1에 가깝다.

소득 분배 구조 올해에 더 악화

우려할 만한 것은 올 1/4분기 들어 소득 분배 구조가 더욱 나빠졌다는 사실이다. 최근 급속한 경기 회복과 그에 따른 임금 상승 등으로 도시 근로자 가구의 평균 소득은 늘어나고 있지만 하위 소득자의 평균 소득은 마이너스를 면치 못하고 있다. 상위 20% 소득 계층의 평균 소득은 98년 4/4분기보다 9.2%가 늘어났지만, 하위 20%의 평균 소득은 3.3%나 줄어들었다.

이런 양극화 현상으로 도시 빈곤층은 크게 늘어나고 있다. 일할 수 있는 가족이 모두 노동판에 뛰어들어도 한달에 86만원을 벌지 못하는 빈곤선 가구(4인 가족 기준)는 올 1/4분기에 6.9%로, 97년(3.0%)보다 두 배 이상 늘었다. 이는 98년 4/4분기에 비해서도 0.7% 포인트 증가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97년 3/4분기∼98년 3/4분기에 늘어난 절대 빈곤층은 주로 경기가 침체해 발생했지만, 98년 4/4분기∼올 1/4분기에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에는 경기가 회복되어 전체 소득이 늘어났다. 그런데도 분배 악화 요인(182.3%)이 워낙 크게 작용해 경제 성장 요인(75.2%)을 상쇄했다는 것이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분석이다.

한 가지 조심해서 해석해야 할 점은, 통계청의 조사 결과는 어떤 형태로든 일을 하고 있는 도시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조사 대상에 장기 실업자를 포함하면 절대 빈곤층의 비중이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절대적 소득 불평등 척도인 지니(Gini) 계수가 높아진 것도 당연한 현상이다. 한국금융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올 1/4분기 지니 계수는 0.37로 82년 이후 가장 높았다(지니 계수는 1에 가까울수록 소득 분배가 나빠졌음을 뜻한다).

한국에서 그 어느 때보다 빈곤에 대한 위기 의식이 높아가고 있지만, 이것은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특히 경제 위기로 국제통화기금 지원을 받은 나라치고 소득 분배 구조가 크게 나빠지지 않은 나라가 없다. 경제 위기를 겪은 멕시코는 94년 말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우등생’ 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그 뒤 폐소화 위기를 또다시 맞은 멕시코 소비자의 98년 말 구매력은 4년 전에 비해 39%나 낮아졌다(<월 스트리트 저널> 분석). 하루 벌이가 2 달러 이하인 극빈층은 97년 이후 2년여 동안 4백만명이나 늘어났다. 멕시코 전체 인구 가운데 빈곤층의 비중은 과거 7명 가운데 1명꼴이었으나, 지금은 5명꼴로 늘어났다.
지난 4월 세계은행(IBRD) 조지프 스티글리츠 부총재는 국제통화기금과의 합동 총회에서 “보통 사람들은 환율이나 이자율을 먹고 살지 않는다. 이제는 그들에게 현실적 문제가 되어 버린 실업과 빈곤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경제 정책의 성공 여부는 성장률뿐만 아니라 빈민을 보호할 수 있는지 여부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 김대중 정부는 비교적 빨리 궤도를 수정했다. ‘생산적 복지’라는 이름의 고용과 복지 대책이 그것이다. 일할 의욕을 가진 사람들에게 직업 훈련과 교육을 해 능력을 계발한다는 것이 요체다. 그러는 한편 일할 수 없는 절대 빈곤층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는 대책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세제 및 세정 개혁안도 빠질 수 없다. 세 부담의 불공평이 상대적 박탈감을 낳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관료·경제학자 등 ‘암초’ 만만치 않아

정부 정책의 무게 중심이 복지 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런데 이에 대한 저항 역시 만만치 않아 보인다. 국민회의의 한 정책 관계자는 “집권층 내부에서는 올해 초부터 빈곤층에 대한 문제 인식이 있었다. 새 천년을 맞이하는 시대적 의미도 포함해 한국이 어디로 가야 하느냐 하는 논의였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은 곳곳에서 암초에 부딪혔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암초’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효율로 중무장한 경제 관료들. 경제 관료의 상당수가 무조건 경제를 살리면 일자리가 생긴다는 ‘경제 논리’를 고집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암초는 언론과, 우리 사회에서 말깨나 한다는 경제학자들. 대부분 ‘미국 물을 먹은’ 이들은 실업 대책과 중산층·서민 대책에 대해 재정 타령과 효율성을 앞세우며 시혜적인 선심 대책이라고 비난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생산적 복지’가 총선을 겨냥한 정책이라는 비난에 대해 여권은 강하게 항변한다. 국민회의 임채정 정책위의장의 주장은 이렇다. “정치권이 선거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중산층과 서민 생활 안정 대책을 그런 잣대로만 보는 것은 문제다. 정치권이 국민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정책 개발에 애쓰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본령이자 존재 이유 아닌가.”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문제는 사실 세계적 논쟁거리이기도 하다. 미국 연방준비은행(FRB) 이사인 마이클 콕스는 그의 책 〈빈부의 신화〉에서 ‘빈익빈 부익부’을 질타하는 진보주의자들의 비관론을 강력히 비판했다. 즉, 그들의 주장과 달리 미국 경제의 호황 덕분에 빈곤 계층도 삶의 질이 향상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멕시코 사회의 불균형 확대를 분석한 제임스 러셀이나 노암 촘스키 같은 학자들은 밀물(성장)이 들어오면 큰 배(가진 자)와 작은 배(덜 가진자)가 모두 뜬다는 ‘자유 시장 만세’의 허구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미 침몰한 작은 배에게는 밀물이 소용없다는 것이다.

빈곤을 방치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하지 않으려는 것과 동의어라는 주장도 나온다. <뉴욕 타임스〉는 올해 초 특집 기사에서 빈익빈 부익부를 미국 경제의 최대 아킬레스건이라고 꼽았다. 미국 가구 소득 상위 1%가 전체 국민 소득의 40%를 쓸어담고 있는 반면 하위 40%는 전체 소득의 단 0.2%만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빈부 격차는 중산층을 몰락시켜 사회적 책임감이 실종했으며, 결국 정치적 무력감과 환멸을 가져 왔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크리스토퍼 레시 같은 학자들이 글로벌 체제의 교본이자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나라라는 미국이 실제로는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의 진원지라고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엘리트의 반란과 민주주의의 배반〉).

분배가 먼저냐, 성장이 우선이냐. 이는 영원히 정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둘 사이의 균형이 깨졌을 때 그 사회가 송두리째 흔들린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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