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단속’만이 금융 대란 막는다
  • 이인석(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프랑크푸르트 무역관장) ()
  • 승인 1997.1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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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의 시장 붕괴는과도 평가와 실패한 시장에 대한 징벌이다. 정부나 금융 당국은 자신들의 정책 실패를단호하게 수정할 의지를 보여야 한다.”
아시아의 세기가 오기도 전에 끝나는 것이 아닌가? 금융 태풍이 휩쓸고 있는 동남아의 앞날이 심상치 않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지난 7월 태국을 공격한 국제 투기 자본이 10월20일에는 자본주의의 수도라는 홍콩을 강타했고, 연이어 세계 증시가 일제히 폭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홍콩과 중국이 보유한 외환 2천억달러로 필사적인 방어에 나섰기 때문에 홍콩 달러가 하락하는 일만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환율이 미국 달러화에 고정되어 있는 한, 언제 또다시 강풍이 상륙할지 모른다. 독일 중앙 은행의 발터 수석 연구원은 “그때는 세계 경제의 기반이 흔들릴 것이다”라고 경고한다.

이보다 앞서 조지 소로스가 앞장선 투기 군단으로부터 공격받은 태국은 11월1일 금리를 1,300%까지 올려 보았지만 백억달러를 날린 채 무릎을 꿇고 말았다. 96년 말 현재 3백77억달러이던 외환 보유고가 2백54억달러로 줄었고, 게다가 몇 달 안에 선물거래 대금 2백34억달러를 지불하고 나면 중앙 은행의 외환 금고는 바닥이 나게 된다. 국제통화기금(IMF)이 긴급 수혈한 1백72억달러도 명목은 재정 안정이지만, 실제로는 다시 급습할지 모르는 투기자들에게 지불할 자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글로벌 자본에 자유로운 정부·중앙 은행 없어

태국에서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으로 이동해 간 금융 태풍은 증시 붕괴를 촉발해 8월 마지막 주에는 무려 2천억달러가 바람에 날아가듯 사라져 버렸다. 몇 십 년간 땀 흘려 쌓아온 국부(國富)를 단 2주 만에 잃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를 위한, 아시아인에 의한 세기를 펼치겠다던 아시아인들의 꿈이 과연 실현될 수 있을지 의문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 경제 성장의 중심지가 지금은 중병을 앓고 있는 형국이다.

아시아의 대변자라고 자처하는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는 조지 소로스를 겨냥해, 핫 머니를 굴리는 국제 투기꾼들을 범죄 집단이라고 몰아세웠고, 콸라룸푸르 시에서는 소로스 화형식이 벌어졌다. 그러나 마하티르의 분노가 국제 사회에서 일으킨 반향은 그리 크지 않다. 금융 대란이라고 하지만, 그 책임은 어디까지나 금융 제도를 불구로 만든 동남아 정치 지도자들의 실책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국제 사회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그렇다면 아시아의 금융 위기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잠을 자지 않는 세계란 외환 시장과 증권 시장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도쿄와 홍콩에서부터 싱가포르를 거쳐 프랑크푸르트, 런던, 뉴욕에 이르기까지 세계 금융 시장의 룰렛들이 24시간 쉬지 않고 숨가쁘게 돌고 있다. 달러화만 해도 하루에 평균 만여 번 변동하는 것이 보통이다. 초를 다투는 머니 게임이라고 해서 국제 금융 시장을 가리켜 글로벌 카지노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세계 외환 시장의 1일 거래 규모는 1조5천억달러. 여기다가 각종 공·사채, 선물환, 금융파생상품 등을 합하면 3조달러에 달한다. 이 가운데 상품과 서비스 교역에 필요한 자금은 고작 5%이고, 나머지 95%가 투기성 자본이다. 제품 생산이나 공장 건설 등 생산적인 투자와는 전혀 무관한 거대 자금이 거미줄 같은 전산망을 타고 지구를 돌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핫머니가 2천5백억달러 포함되어 있고, 이를 움직이는 3천여 헷지 펀드가 중병을 앓고 있는 통화를 골라 이들의 뒤를 쫓고 있다.

80년대에 들어와 자본 이동을 가로막았던 장벽이 철폐되자, 규제의 사슬을 벗어던지고 자유의 몸이 된 것이 바로 투기 성격의 글로벌 금융 자본이다. 이는 92년 영국의 파운드화를 주저앉히고, 95년에는 멕시코의 페소화를 추락시킨 데서 그 위력을 드러냈다. 일본의 저명한 경영컨설턴트 오마에 겐이치는 한마디로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난 하나의 독립된 제국’이라고 그 실체를 설명한다. 그러나 환율·금리·물가는 물론 경기·인플레와 일자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국제 금융 시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정부나 중앙 은행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동남아의 금융 위기는 이같은 정부 없는 자본, 정치를 지배하는 글로벌 자본에 대한 대비가 소홀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금융 태풍이 홍콩을 덮치기 얼마 전 중국의 강택민 국가 주석은 구미가 아시아 시장에 침입했다고 비난하면서 미국의 헤게모니 쟁탈 기도를 저지하는 데 선봉장이 되겠다고 아시아 나라들에 제의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들이 의존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다. 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필리핀에 들어간 외국인 직접 투자의 3분의 1이 일본 기업들이고, 이들 국가의 경제성장을 떠받쳐 준 외자의 대부분도 일본 은행들이 지원했다. 일본 은행들에 대한 부채 규모만 해도 태국이 3백75억달러, 인도네시아는 2백20억 달러에 이른다.
이 국가들은 중국에 대해 거리를 두듯이, 배후에 미국이 버티고 있는 세계 금융 기구들의 지원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물론 인도네시아도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1백80억달러를 지원받기로 했지만, 이번 기회에 ‘아시아인의 아시아 건설’에 시동을 걸겠다는 태도다. 다시 말해서 구미 중심의 국제통화기금에 대항할 아시아판 국제 금융 기구를 창설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몇주 전 일본 대장성 장관이 이를 지지한다고 공식 발언함으로써 동남아와, 미국을 포함한 G7의 대결 구도가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다. 일본은 우선 아시아 기금으로 천억달러를 조성하겠다는 1단계 구상을 밝혔다. 이는 장차 일본이 아시아 정치의 중심이 되고, 따라서 영향권이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루빈 미국 재무장관과 티트마이어 독일 중앙 은행 총재가 적극 개입하고 나서자 일본측은 일단 아시아 통화권 창설 구상을 거두어들이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것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일 뿐, 시기가 좀더 지나면 엔 블록 구상은 한층 더 현실감 있게 진전될 것으로 보인다.

홍콩 달러를 인민폐에다 합병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또한 홍콩 증시를 무너뜨린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중국의 인민폐 통화권 결성은 새로운 얘기는 아니지만, 이런 움직임이 구체화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증시에 반영된 것이다. 동남아의 금융 위기가 한편으로는 달러 대 엔, 다른 한편으로는 인민폐 대 엔의 통화 헤게모니 전쟁의 서막을 열어 준 셈이다.

과연 아시아의 기적은 끝나는가, 동남아는 종이 호랑이인가. 그렇다고 단언하기에는 이르다. 금융 드라마가 아직 막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시장 붕괴 현상보다는 앞으로 일어날 일이 더 문제라는 점이다. 시장 붕괴는 과도 평가와 실패한 시장에 대한 징벌이다. 때문에 금융 태풍이 할퀴고 간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고, 앞으로 다가올 위기에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다. 정부나 금융 당국은 자신들의 정책 실패를 단호하게 수정할 의지와 용기를 보여야 한다. 또한 정치나 정책의 오판이 얼마나 큰 대가를 지불하는지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경제 전쟁의 승부처는 국내 시장

동남아에 금융 위기를 불러들인 장본인은 병든 금융 제도다. 그래서 다음에 다가올 위기는 정치와 정책의 영역에서 비롯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물론 제도를 청산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동남아 전체 금융기관의 부실 채권이 무려 1조달러에 달한다는 계산이다. 금융기관들의 건강이 하루아침에 회복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10년을 잡는 전문가도 있다. 그러나 병약한 제도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아시아가 세계 경제의 프로펠러가 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힘이 상품과 서비스에서 서서히 금융 쪽으로 이동해 가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글로벌 금융 자본을 개별 정부가 통제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정부가 규제할 수 있어도 통제 능력의 상당 부분을 상실한 상태다. 때문에 이미 글로벌 빌리지가 된 국제 금융 시장을 바라다보는 정치와 정책 자체가 글로벌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국경을 넘어 국가 간에 상품과 서비스를 주고 받는 것이 국제화라면, 글로벌화는 국가의 울타리를 넘어 하나의 세계로 통합되어 가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공의 열쇠도 다를 수밖에 없다. 저임 노동력, 정부의 특혜 금융이 국제화를 성공시킨 주역이었지만, 글로벌 시대에는 그 역할을 금융에 넘겨주어야 한다. 글로벌 경제 시대에는 전선이 따로 없다. 해외와 국내의 수압 차를 줄이지 않으면 곧바로 시장이 반란을 일으킨다. 환율 급변, 주가 폭락 등 혹심한 시련은 홈 경기에 방심했던 대가다. 글로벌 경제 전쟁의 최후 승부처는 국내 시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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