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 언론의 전면전
  • 文正宇 기자 ()
  • 승인 1995.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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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주요 일간지에 하루도 빠짐없이 삼성그룹 비판 기사가 대서특필되는 것은 우연이라고 보기 힘들다. 지금 언론계에서는 조간으로 전환하는 <중앙일보>와 여타 신문 간에 불꽃경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월25일 <한국일보>는 3면에 ‘재벌의 언론 파괴’라는 통단 사설을 실었다. ‘일부 재벌 신문이 근자에 보여주고 있는 무절제하고 몰상식한 행태에 대해’ 맹렬히 비난한 이 사설의 요지는 이렇다. 돈의 방패막이가 돼 오늘날까지 단 한 번도 재벌 매체로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탄생 자체가 언론계의 비극이었던 재벌 신문이 돈을 마구 흩뿌려 신문이 독자를 사는 풍토를 조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일보>는 이 사설에서 구체적으로 ‘이 재벌 신문’이 어디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한국일보>가 이런 사설을 실은 것은 언론계 관행에 크게 어긋나는 이례적인 일이다. 지금까지 신문들은 동업자를 비판하는 것을 터부로 여겨 왔다. 설혹 장사가 될 만한 기사거리가 터져도 그것이 상대방 언론과 관련이 있는 사건이면 덮어주는 것이 언론계의 ‘미덕’으로 통했다. 따라서 <한국일보>가 이런 사설을 실었다는 것은 동업자들 사이에 무엇인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도대체 <한국일보> 사설이 지칭한 ‘이 재벌 신문’은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리고 지금 언론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중앙일보> 조간 전환이 도화선

<한국일보> 사설이 나온 같은 날 <동아일보>는 삼성 독일지사가 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독일 근로자들의 노조 결성 움직임을 방해하다 현지 검찰의 수사를 받게 됐다는 사실을 사회면 머리 기사로 취급했다. <동아일보>는 다음날부터 삼성 관련 기사로 지면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26일 1면 머리 기사는 삼성 임원들이 연구 명목으로 외제 차를 도입해 면세 혜택을 받으며 타고 다닌다는 것이었고, 사회면 머리 기사는 삼성유화가 원료 공급을 감축하는 횡포를 부려 태광산업이 전면 가동 중단될 위기에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27일의 사회면 머리 기사는 삼성이 주식을 일부 소유하고 있는 보광(주)이 강원도 태기산 일대에 위락지를 개발하면서 천연림을 마구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삼성을 지면의 윗자리에 모시고 있기는 <한국일보>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일보>는 문제의 ‘25일자 사설’ 이후 삼성 관련 기사를 연일 비중있게 취급하고 있다. 기사의 경중은 해당 신문사가 판단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삼성 관련 기사가 1면이나 사회면 머리를 장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삼성과 함께 매일 신문의 조명을 받고 있는 곳은 하이텔이다. <한국일보>는 26일 한국PC통신이 여론 조작을 남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회면 머리 기사로 보도한 데 이어 27일에도 정보통신부가 하이텔에 대한 제재를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회면 머리 기사로 실었다. <한국일보>는 27일 사설에서는 삼성과 하이텔을 동시에 비난하기도 했다. <중앙일보>는 <한국일보> 사설이 나오기 전날인 24일 1면 머리에 하이텔의 여론조사에서 ‘<중앙일보>가 가장 읽기 편한 신문’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일련의 일들을 연관하면 사태의 윤곽이 분명해진다. <한국일보>가 사설에서 지적한 ‘이 재벌 신문’은 <중앙일보>이며, 지금 언론계에서는 조간으로 전환하면서 신문업계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중앙일보>와 여타 신문 간에 불꽃 튀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신문사 간에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은 사실 어제 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87년 정기간행물 등록에 관한 법률이 개정돼 새로운 신문들이 등장해 30년 간의 카르텔이 깨지면서 신문업계는 본격적인 경쟁 시대를 맞았다. 그 뒤 신생 매체들은 기존 매체를 앞지르는 데 실패했고, 이후의 경쟁은 기존 매체들이 주도했다. 89년 <한국일보>가 월요판 발행을 단행했고, 89년 <조선일보>는 기존의 1일 16면 체제를 깨고 20면을 발행했으며, 93년 <동아일보>는 70년 만에 조간으로 전환하는 변신을 했다. 각 사가 모두 하나씩 비장의 무기를 꺼내놓았던 것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다른 언론사의 변화를 따라가는 데 그쳤던 <중앙일보>가 공세를 시작한 것은 지난해 9월부터였다. 지면을 종합뉴스·경제·스포츠로 나누는 이른바 섹션화를 단행하고 48면으로 증면하는 한편, 오는 4월15일부터 조간으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삼성이라는 막강한 자본력을 배경으로 한 <중앙일보>가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면서 동업자 간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했다.

그동안 각 사는 물밑에서는 피를 흘리는 싸움을 하더라도 지면을 통해 상대를 직접 비난하는 것은 삼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을 선도해 왔기 때문에 사실 누구를 욕할 처지도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귀중한 지면을 통해 상대를 공격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그동안 언론계를 조정하던 보이지 않는 손이었던 청와대의 힘이 전혀 먹혀들지 않고, 신문 발행인들의 모임인 신문협회의 내부 조율 기능이 마비된 까닭이다.
도전받는 한국 신문의 전통

정부는 그동안 여러 차례 중재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오인환 공보처장관(45쪽 인터뷰 참조)은 전국의 일간지 사주들과 수 차례 만나 증면 자제를 요청했으나 언론사 간의 경쟁이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지난 2월4일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가나다 순)의 발행인들과 김영삼 대통령의 모임을 주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날 모임에서 김대통령은 공보처가 올린 자료를 직접 들추면서 “지면이 늘어났다고는 하나 광고가 60%를 넘어 실효도 없고, 이대로 가면 종이 파동이 오지 않을까 우려되니, 자율적으로 증면 경쟁을 자제해 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중앙일보>의 홍석현 사장과 <조선일보>의 방상훈 사장은 김대통령의 주문에 대해 이견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문민 시대에는 모든 것을 시장 경제의 원리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요지의 얘기를 했다고 한다. 과거 같으면 대통령의 얘기에 언론사 사장들이 이의를 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김대통령의 주문은 전혀 효력이 없었고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김대통령과의 회동 뒤 곧바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안내하고 연예계 소식을 전하는 타블로이드판 부록을 내기도 했다. 지금 각 언론사는 청와대의 주문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양상이다.

발행인들의 모임인 신문협회는 지난 3월15일 이사회를 열고 32면 이상을 발행하는 신문사에 대해 신문 용지난이 풀릴 때까지 발행 면수를 줄일 것을 권고하기로 결의했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과거 30년간 언론사 카르텔을 주도했던 신문협회는 신문사 간의 경쟁이 가열되면서 거의 기능이 마비된 상태이다. 현재 언론사들은 심판도 없고 싸움을 자제할 능력도 없는 상태에서 마구잡이로 주먹다짐을 하고 있는 꼴이다.

현재 <중앙일보>가 선도하고 있는 경쟁에 대해 <동아일보>와 <한국일보>는 삼성에 대한 공격으로 정면 대응을 하고 있으며, <조선일보>는 뒷짐을 지고 구경하는 꼴이다. <동아일보>와 <한국일보>가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중앙일보>가 조간으로 전환하려고 준비하면서 판매 조직을 흡수하기 위해 막대한 자본을 쏟아붓고 있기 때문이다. 조간으로 바꾼 지 얼마 안된 <동아일보>와 창간 이래로 조간 시장에서 자라난 <한국일보>가 가장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중앙일보>의 도전에는 <조선일보>를 포함한 전 신문업계가 간과할 수 없는 의미가 담겨 있다. <중앙일보>는 현재 신문업계에서 최초로 품질 관리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신문도 ‘사회의 목탁’이 아니라 팔아 이윤을 남겨야 하는 ‘상품’이라는 것이다.

<독립신문> 창간 이래 군사 정권을 거치면서 그 뜻이 매우 퇴색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어느 정도는 ‘지사(志士) 언론’을 지향하고 있는 기존 신문들로서는 충격적인 변화로 받아들여질 만하다. 지면에 아직 고전적인 냄새가 짙게 배어 있는 <동아일보>와 <한국일보>가 강한 반감을 보이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중앙일보>는 기존 신문의 시장에 도전하고 있는 동시에 한국 신문의 전통에 도전하고 있는 셈이다.
신문은 시장 개방 품목 중의 하나이다. 시장을 열면 미국의 거대 미디어 자본이 물밀듯이 들어올 것이 불을 보듯 훤하다. 그 때문에 재벌들은 정부에 언론·영상 사업 부문에 대기업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주문하는 형편이다. 삼성이라는 거대 자본을 등에 업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다른 언론과의 관계를 고려해 투자를 자제해온 <중앙일보>가 경쟁을 앞에서 이끌고 있는 것은 이런 분위기 탓이다. 만약 <중앙일보>가 신문업계의 선두 주자로 떠오르게 되면 언론과 재벌의 경계선은 급속도로 허물어질 수 있다.

<중앙일보> 신문본부장 금창태씨는 ‘바른 언론을 위한 시민연합’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언론은 권력이 보호해 주는 강요된 틀 속에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안주해 왔다. 오히려 언론 기업의 상당수가 그런 상황을 즐겨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화가 급격히 추진되는 현 상황에서 비정상적인 언론 환경은 재편 과정을 거쳐 정상화로 가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일보>는 25일자 사설에서 ‘이 재벌 신문은 당해 모기업의 이익과 상충될 때는 물론, 나라와 사회의 이익과 배치될 때에도 서슴없이 전자의 편에 섰다’고 말했다.

<동아일보>와 <한국일보>의 처지에서는 양측의 갈등이 정도와 사도의 싸움이지만, <중앙일보>의 관점에서는 이것은 권력의 조정에 안주하며 서비스를 외면해온 구태와 새로운 언론을 만들려는 창조적 노력의 대결인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단순히 재벌과 권력의 품에서 안주해온 언론의 아귀다툼쯤으로도 비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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