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후보여서 유리하다" 85.3%
  • 나권일 기자 (nafree@sisapress.com)
  • 승인 2004.03.3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사저널>, 여성 지역구 후보 41명 설문조사 비례대표 포함 1백20여 명 출마해 40명 내외 당선 가능
“낙선하더라도 정치 활동을 계속하겠다.” “10년 안에 여성 대통령이 탄생한다.” 4·15 총선에 출마하는 여성 후보자들의 호언장담이다. <시사저널>이 정당 공천을 받고 지역구에 출마한 여성 후보자 41명에게 직접 물어본 결과, 이번 총선은 ‘여성 후보’라는 것이 커다란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당락에 관계없이 정치 활동을 계속하겠다고 밝힌 여성 후보가 많아 이번 총선을 계기로 여성 정치 시대가 활짝 열릴 것으로 보인다.

<시사저널>은 3월25일부터 27일까지 정당 공천을 받은 지역구 출마 여성 후보자 58명을 대상으로 후보자와 직접 통화하거나 서면 조사를 해, 그 중 70%에 해당하는 41명의 답변을 받았다.
설문조사 결과, 여성 후보자 35명(85.3%)이 선거에서 여성이라는 사실이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여성 후보자가 유리한 이유는 △여성이 국회의 부패와 정쟁 이미지를 대체할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고 △친근하고 섬세한 생활 정치를 하겠다는 설득이 유권자들에게 주효하고 있으며 △여성의 사회 참여 확대에 대한 국민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 후보라는 것이 여전히 단점으로 작용한다고 응답한 후보도 6명(14.6%) 있었다. 이들은 뿌리 깊은 남성 중심 사회 구조와 흑색 선전 같은 네거티브 선거 문화가 여성 후보들에게 장벽으로 작용한다고 답했다.

대다수 여성 출마자들은 이번 선거에서 ‘당락에 관계없이 선거가 끝난 뒤에도 정치 활동을 하겠다’(36명, 87.8%)고 답했다. 과거처럼 여성 정치인이 단명할 가능성이 줄어든 셈이다. 여성 후보들은 국회에 입성해서 가장 먼저 일하고 싶은 분야로 △육아·노인복지 정책 및 입법 활동 △교육 의료 보건 문화 예술과 관련한 정책 활동 △양성 평등의 균형 사회를 위한 입법 활동 △중소기업 진흥을 위한 규제 철폐 △비정규직 차별 해소와 호주제 폐지 등을 꼽았다.

여성 후보들은 국민의 기대만큼 여성 정치인이 많아지려면 여성 후보 50% 할당제 등 ‘제도적 보완이 가장 시급하다’(19명, 46.3%)고 답했다. 후보자 자신의 경쟁력(11명, 26.8%)과 유권자의 의식 변화(9명, 21.9%)를 꼽는 이도 많았다. 설문에 답한 여성 후보 41명 가운데 40명이 한국에서 여성 대통령이 탄생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 가운데 36명(87.8%)은 10년 내에 여성 대통령이 탄생할 것으로 예측했다. 17대 대선 때는 여성 대통령 후보가 출마해도 실패할 확률이 높지만 18대 대선이 치러지는 2012년쯤에는 여성 대통령이 등장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유권자들이 여성 후보를 선호한다는 <시사저널> 설문조사 결과는 선거 현장에서 속속 확인되고 있다. 경남 마산 을에 출마하는 민주당 안성숙 후보는 “여성 후보라고 밝히고 악수를 청하니까 유권자들이 손을 더 세게 잡고, 나를 한번 더 눈여겨보더라”고 말했다. 서울 종로에 출마하는 민주노동당 이선희 후보는 “유권자들이 여성 후보들은 부정 부패와 거리가 멀다고 느끼고 있다. 인사를 청하면 대부분 친근하게 반겨준다”라고 전했다. 열린우리당 성남 분당 갑 지역구에 출마하는 허운나 의원은 “유권자들이 선거 때만 나타나는 국회의원보다는 지역민을 가족처럼 대하는 섬세한 배려를 원하고 있다. 섬세함은 여성이 탁월하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여성 우대 분위기 때문인지 이번 선거에서는 남편과 가족의 적극적 후원을 얻고 출마한 여성 후보도 많아졌다(상자 기사 참조).

이번 총선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가 여성 후보자들의 양적 팽창이다. 지역구 공천 의원만 해도 한나라당 8명, 민주당 12명, 열린우리당 11명, 자민련 11명(2명은 출마 포기), 민주노동당 12명, 사회당 3명, 녹색사민당이 1명 등 모두 58명이다. 무소속으로 출마할 여성 후보자는 제외한 숫자다.

과거와 달리 여성 후보들이 지역구를 꺼리지 않고 자청한 경우도 많았다. 열린우리당 한명숙 후보는 “어려운 신혼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고양 일산에서 한나라당 홍사덕 의원과 맞붙기를 기다려왔다”라고 말했다. 열린우리당 김진애 후보는 “지역구는 내가 자청해서 골랐다. 정면 승부를 기대했는데 선거법 개정 때문에 후보자 연설회를 못하게 돼 아쉽다”라고 주장했다.
여성 후보자가 늘면서 여성 후보가 2명 이상인 지역구만 벌써 5개다. 부산 연제(김희정·노혜경) 경기 광명 을(전재희·박정희) 경기 성남 수정(김을동·김미희) 경기 고양 일산 갑(한명숙·정경화) 강원도 원주(안상현·전미선) 지역은 전례가 드문 ‘여여(女女) 대결’로 뜨겁다. 대구 북 을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는 최경순씨(45)는 이같은 현상을 한마디로 ‘상전벽해’라고 표현했다. 최씨는 “16대 총선 때 충청과 영남을 통틀어 여성 야당 후보는 내가 유일했다. 여성들이 여당을 택하지 않고 과감하게 야당을 선택하는 것도 의미 있는 변화다”라고 말했다.

여성들은 또 비례대표 의석(총 56석)의 절반을 확보했다. 민주노동당은 전국금속노조 사무처장을 지낸 여성 노동운동가 심상정씨(45)를 비례대표 1번으로 확정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역시 1번 후보는 여성으로 예정해 놓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정치 신인인 장향숙 전 한국여성장애인연합 공동대표를 비례대표 1번에 배치했다. 장향숙씨(47)는 생후 1년6개월 만에 소아마비를 앓게 된 1급 장애인으로 20년 동안 장애 여성 인권운동에 투신해 왔다. 정규 학력이나 직업 경력이 없는 장씨는 “평생을 방바닥을 기어다니며 살아왔지만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내 믿음을 당원들이 받아주어 고맙다”라고 말했다. 여성계에서는 장씨를 발탁한 것이 여성과 장애인이라는 소수자를 배려한 의미로 받아들인다.

여성계는 이번 총선에서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포함해 전체 후보자 1백20여 명 가운데 최소 40명 안팎의 여성 의원이 탄생할 것으로 기대한다. 16대 국회 여성 의원이 15명(지역구 5명, 비례대표 10명으로 전체 의석의 5.5%)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전체 의석 2백99석 가운데 40석(13.3%)을 얻는다면 괄목할 발전이다.

여성 정치 바람이 불면서 전문성과 경쟁력을 갖춘 지역구 여성 후보들이 특히 유권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한나라당 여성 후보의 대표 주자인 서울 서초 갑 이혜훈 후보(39)는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경제학박사 출신이다. 영국 레스터 대학에서 경제학 교수로 일했고, 청와대·국무총리실·재경부·국방부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정책통이다. 이후보는 “나의 선거 상대는 다른 당 후보들이 아니라 유권자이다. 당선되면 당을 개혁하는 소장파로 일하며 개혁적인 한나라당의 아이콘이 되겠다”라고 말했다.

서울 영등포 을에 출마하는 민주당 박금자 후보(51)는 여성 명사로서 주목되는 후보다. 박후보는 영등포구 대림동에서 20년 동안 산부인과 의원을 경영한 인연을 내세워 ‘영등포 대장금’을 자처하고 나섰다. 한나라당 권영세 의원, 열린우리당 김종구 후보와 경쟁하는 박금자 후보는 “의료 전문인과 여성이라는 장점을 적극 알려 여성 정책을 전문으로 하는 정치 일꾼이 되겠다”라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에서는 서울 용산 김진애 후보(51)가 대표적인 여성 후보다. 미국 MIT대학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도시공학 전문가인 김후보는 30년 동안 도시 건축 현장에서 일하면서 서울 구석구석을 손금 보듯 훤하게 알고 있는 ‘서울 전문가’이다. 김진애 후보는 “용산은 서울의 미래다. 당선되면 미군기지 반환 이후 용산을 미래 도시로 리모델링하는 ‘신용산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겠다”라고 말했다.

젊음을 무기로 뛰어든 20대 여성 후보들도 주목되고 있다. 서울 서대문 갑 민주노동당 후보 정현정씨는 만 27세다. 정후보의 상대는 한나라당 이성헌 의원과 열린우리당 우상호 후보. 둘 다 운동권 출신 선배 정치인이다. 하지만 정후보는 “내 목표는 당연히 당선이다”라며 자신감을 내비친다. 정후보는 “김영삼 전 대통령도 20대에 당선되었다. 정치를 하려면 20대부터 일찍 뛰어드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말했다.

서울 동대문 을 지역구 후보 곽민경씨(27)는 자민련이 ‘전략 공천’한 여성 후보다.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면서 에스더에이전시와 J엔터테인먼트 대표를 맡고 있는 곽씨는 “국회에 들어가면 전공인 문화 예술과 여성 장애우 문제와 관련한 정책 활동에 힘쓰겠다. 낙선하더라도 정치 활동을 계속하겠다”라고 말했다. 정현정씨와 곽민경씨는 현재 17대 총선 지역구 최연소 여성 후보를 다투는 동갑내기다.
‘여여 대결’의 대표적 지역구인 부산 연제는 유권자들의 최대 관심 지역 가운데 하나다.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한 김희정씨(33)는 연세대 대학원 정치학박사 출신의 당찬 신인이다. 1995년 신한국당 기획조정국 간사를 시작으로 정당인이 된 김후보는 보수 정당 한나라당을 유연하고 부드럽게 만들어낼 차세대 주자라고 자처한다. 김희정 후보는 “당에서 서른셋의 새파란 나를 공천하자 유권자들이 한나라당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정치학을 전공한 경험을 살려 한국 정치를 혁신하겠다”라고 밝혔다.

김희정 후보와 표를 다투는 노혜경 열린우리당 후보도 만만치 않은 맞수다. 시인이자 <아웃사이더> 편집위원인 노혜경씨(45)는 지난 대선에서 부산국민참여운동본부 공동본부장을 맡았던 노사모이다. 노후보는 “싸움과 비방과 헐뜯는 정쟁이 아닌, 살림의 정치를 보여주겠다”라고 말했다.

여성계는 17대 총선에서 여성 후보들이 일으킬 돌풍을 기대하고 있다. 2002년 3월, 박근혜 대통령 후보 논쟁에 불을 지피며 여성의 정치 참여를 주창했던 최보은씨(44·<프리미어> 편집장)는 “국회의원이 되고자 하는 여성이 늘어나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현상이다”라고 말했다. 생활 정치, 깨끗한 정치를 내건 여성 후보들이 17대 국회를 여성 정치 시대 원년으로 만들 수 있을지는 유권자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