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년 시공 초월한 위대한 문명
  • 이집트/글 成宇濟·사진 白昇基 기자 ()
  • 승인 1997.10.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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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8주년 특별기획/고대 이집트 문명 대탐사 알렉산드리아~아부심벨 3천km를 가다
한국 언론 최초로 나일 강 ‘유적 탐험’

이집트가 부활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다양한 이름으로 우리 앞에 되살아나고 있다. 베스트 셀러 소설 <람세스>에서부터 피라미드에서 인류의 미래를 발견하는 <신의 지문> 같은 책으로, 지난 6월 서울에서 개막되어 부산과 대구로 이어질 <고대 이집트 문명전> 같은 대형 전시회로 이집트가 다가오고 있다. 이집트 고대 문명에 대한 관심은 가벼운 붐을 넘어서 있다. 거기에는 세계화 시대에 적응하려는 ‘문명의 뿌리 찾기’가 자리잡고 있다.

고대 이집트 문명과 세계화 사이에 과연 어떤 연관이 있는가. 학자들은 현재 지구를 장악하고 있는 서양 문명의 발원지를 고대 이집트 문명으로 본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그리스·로마 시대로 이어져 르네상스를 통과했고,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전지구적으로 확산되었다. 세계의 주류 질서, 즉 서양 문명의 실체를 읽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세계화를 이룩하는 일의 처음과 끝은 다름 아닌 고대 이집트 문명이다. 그러니까 고대 이집트 문명은 과거가 아니다. 세계화를 화두로 삼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집트는 미래인 것이다.

<시사저널>이 창간 8주년을 기념해 특별 기획한 고대 이집트 문명 대탐사의 1차 목표는 한국 언론 사상 처음으로 고대 이집트 문명의 전모를 완벽하게 담아내고, 3천년 동안 유지되었던 문명의 키워드인 ‘부활 신앙’을 독자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9월1일부터 17일까지 진행된 이번 탐사에서 취재팀은 이집트의 최북단 알렉산드리아에서 출발해 최남단 아부심벨까지, 고대 이집트 문명의 어머니였던 나일 강을 따라 3천여 ㎞를 왕복했다. 이번 고대 이집트 문명 대탐사에는 지난 10년간 고대 이집트 문명을 천착해온 성서고고학자 김 성씨(협성대 성서고고학 박물관 큐레이터)가 동행했고, 대한항공이 협찬했다. <편집자>
공항에서 카이로 시내로 접어들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돌산이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을 오늘날까지 살아 있게 한 힘이 바로 저 돌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도시 한켠을 가로막고 있는 석회암 덩어리로 신전을 건설하고, 피라미드를 쌓아올렸으며, 파라오에게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은 석상을 세웠다. 채석장이었던 듯 절반쯤 잘려나간 돌산 앞에는, 역시 돌로 만든 거대한 회교 사원이 서 있다.

태양과 돌산, 그리고 거대한 모스크로 손님을 맞이하는 카이로의 아침은 눈부셨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연간 강수량이 15㎜를 넘지 않는 태양의 나라. 이글거리는 태양은 지금으로부터 5천 년 전부터 3천 년 동안 이집트를 지배했던 태양신의 위용을 온몸으로 느끼게 했다. 그러나 카이로는 그 중심부에 들어서는 순간 아수라장이었다.

알렉산드리아
헬레니즘 문명의 자취는 간 데 없고…


카이로에서 북서쪽으로 2백20㎞를 달려야 나타나는 알렉산드리아도 혼잡하기로는 카이로에 못지 않았다. 기원 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이 마케도니아·그리스 군을 이끌고 진군해 건설한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문명의 학문과 예술 중심지로서의 면모는 사라진 채 상업 도시의 번잡과 활기로 가득할 뿐이었다.

50만 장서를 자랑하던 세계 최대 도서관과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서 지중해의 배들을 인도하던 파로스 등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리스 출신 파라오와 로마 통치 시대의 유적들로 겨우 체면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7세기에 건설된 신도시 카이로와는 다르게 유럽식 건물들이 도시를 채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로마에 버금갔던 메트로폴리스로서의 면모 또한 도시 곳곳에 산재해 있다. 저 화려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의 고향이 지금도 대부분 땅 밑에 묻혀 있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고대(古代)의 흔적은 밥 세드라 언덕에 30m 가까이 우뚝 서 있는 폼페이 기둥에 잘 드러나 있다. 고대 이집트 풍의 스핑크스가 기둥을 지키고 서 있지만, 이 기둥은 기원 후 300년 로마 황제를 기념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주변에 머리가 없는 18·19 왕조의 석상과 스핑크스 들이 방치된 채 뒹굴고 있다. 신왕국 시대의 정복왕이자 건축왕인 람세스 2세와 그의 아버지 세티 1세의 영향력이 도시가 건설되기 천 년 전부터 이곳에까지 닿았던 것이다.

그러나 상(북부) 이집트에 떨친 파라오들의 위세는, 나일 삼각주 서쪽보다는 동쪽에서 그 흔적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카이로에서 북동쪽으로 20분을 달리자 헬리오폴리스가 나타났다. 기원 전 3100년 제1 왕조 초대 왕 메네스가 상·하 이집트를 통일하면서 고대 이집트의 역사를 연 이후, 헬리오폴리스는 종교 수도로서 정치 중심지였던 멤피스 못지 않은 역할을 해왔다. 라하라크티(태양신)의 신전이 있던 그 자리는 낡고 지저분한 소도시로 변해 있다. 다만 18왕조의 투트모세 3세가 신전 앞에 세운 22m 높이의 오벨리스크만이 옛 도시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뉴욕 센트럴파크와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 불리며 런던 템스 강변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는 이곳에서 옮겨간 것이다.

나일 강의 퇴적물이 쌓여 비옥한 평야를 이루고 있는 삼각주에는, 고대 도시가 많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유물을 하나라도 가지고 있는 헬리오폴리스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제15 왕조를 형성했던 아시아 계통인 힉소스 왕조의 수도 아바리스(현재 지명 텔 엘 다바)와 람세스 2세가 북쪽 수도로 세운 피람세스(칸티르) 등은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은 채 전형적인 농촌으로 변해 있다. 돌이 귀한 평야 지대의 농부들이 신전과 궁전의 돌을 뜯어 집을 짓고, 흙벽돌을 빻아 비료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삼각주 지역에서 영원한 삶을 추구한 파라오들의 욕망을 유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도시는 타니스(산 엘 하가르)이다. 투탕카멘의 무덤과 더불어 도굴꾼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던 21·22 왕조 파라오들의 무덤이 이곳에서 발견된 것이다. 은으로 만든 관, 금으로 세공된 가면 등 귀중한 유물들은 모두 박물관으로 옮겨졌으나, 람세스 2세를 비롯한 파라오들의 석상과 오벨리스크는 지금도 거센 사막의 모래 바람 속에 뒹굴고 있다. 북쪽으로 원정을 떠나 아멘 신의 의식에 참여할 수 없었던 파라오들은 남쪽 아스완에서 화강암을 옮겨다 수도 테베의 신전을 모방한 작은 신전을 타니스에 세웠다. 수천 년 동안 모래에 파묻혀 있던 이 신전은 1939년 프랑스 고고학자 피에르 몽테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멤피스
람세스 2세의 신화가 숨쉬는 영원한 수도


3천 년 전, 무려 67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의 거의 절반을 건설했다는 람세스 2세의‘건축 신화’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나일 강의 최북단에서 최남단 아부심벨에 이르기까지 람세스 2세의 자취는 어디를 가든 남아 있다. 람세스 2세 시대보다 1천7백 년 전에 세워진 고대 이집트의 첫 번째 수도 멤피스도 오직 람세스 2세 덕분에 관광객을 불러모을 수 있다.

멤피스 박물관에 있는 람세스 2세의 거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 원래 13m나 되는 석상의 높이는 감상할 수 없으나, 석회암 덩어리를 부드럽고 정교하게 파들어간 뛰어난 조각 솜씨는 그대로 살아 있다. 고대 이집트의 전통 복장인 킬트 치마의 주름이 선명하게 잡혀 있고, 어깨와 허리띠, 팔찌 위에 카르투슈(타원형 틀 안에 상형 문자로 새겨넣은 왕이나 신의 이름)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파라오의 즉위명과 탄생명에 둘러쳐져 있는 카르투슈는 현세의 권위를 상징하는 동시에 죽은 뒤의 영생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자
이승과 저승 연결한 위대한 피라미드의 숲


제4 왕조 쿠푸·카우레·멘카우레의 피라미드가 있는 기자는 고왕국 수도 멤피스의 무덤 지역이었다. 기자를 비롯해 아부 로와슈, 자이예트 엘 아리안, 아부 구라부, 아부 시르, 사카라, 다슈르 등 나일 강 서안을 따라 40㎞에 걸쳐 펼쳐져 있는 도시는 모두 고왕국의 묘지들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은 뒤, 내세에서 부활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죽음을 이 생(生·이승)에서 저 생(저승)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믿었던 그들은 행복한 내세를 보장 받으려고 철저하게 대비했다. 두 번째 삶으로 들어가기 위해 육체는, 육체에 생기를 넣어준 정신적 요소와 재결합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육신이 원형대로 보존되어야 재결합이 가능하고, 만약 훼손되면 부활할 수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이들은 주검의 부패를 방지하는 미라를 만들었으며, 영원한 삶을 더욱 확실하게 보장 받기 위해 단단한 화강암으로 두상을 만들었다. 그 조각을 무덤 속에 넣고 왕의 영혼이 그 형상을 통해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생전에 만든 그들의 무덤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투자하는 일종의‘생명보험’이었던 것이다. 석관 속에 들어간 왕의 시신은 깊은 무덤 속에 안치되었으며, 그 무덤에는 영생을 살도록 하는 주문들이‘피라미드 텍스트’나 파피루스로 만든‘사자의 서’와 같은 양식에 기록되어 있다. 무덤은 시신이 영혼과 합해지는 장소일 뿐 아니라 죽은 이가 내세에 쓸 가구와 개인 소유물을 저장하는 곳이기도 했다.

피라미드는 고왕국 시대에 절정기를 맞은 무덤 양식 가운데 하나이다. 이집트에서는 모두 열네 군데에서 70여 피라미드가 확인되었는데, 기자의 피라미드는 가장 발전된 형태이다. 카이로 중심부에서 서남쪽으로 14㎞ 떨어진 기자의 피라미드는 사막과 주거지의 경계 지점에 있다. 이곳에는 제 4왕조 왕들인 쿠푸·카프레·멘카우레의 대형 피라미드와 함께 왕비와 공주 들의 작은 피라미드가 피라미드군(群)을 형성하고 있다.

높이 1백37m, 한 면의 길이 2백30m에 가슴 높이의 돌덩어리 2백60만개를 52도 각도로 쌓아올린 쿠푸의 피라미드는 그 신비로운 외관뿐 아니라 내부 공간이 찾는 이들을 압도한다. 내부에서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각도는 26도. 입구를 지나 고개를 숙여 한참을 걸어가면‘그랜드 갤러리’라 불리는 큰 복도가 나타난다. 5m 높이로 백m 가까이 뻗어 있는 대회랑이다. 대회랑을 걸어 올라가는 동안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가로 7m, 세로 14m 정도인 널찍한 묘실에는 현무암으로 만든 쿠푸 왕의 큰 석관이 놓여 있을 뿐이다. 다만 가장자리 구석에 바깥 공기를 들여보내는 환풍기가 윙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9세기께 돌을 깨고 들어가 처음 묘실을 발견했다는 이들도 지금과 똑같은 광경을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느 때인지는 몰라도 그들 이전에 미리 도굴꾼들이 미라와 유물 들을 휩쓸어갔기 때문이다.

카프레 피라미드의 묘실도 천정이 슬레이트 지붕처럼 각이 져 있다는 사실 외에는 쿠푸의 묘실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후대의 손이 더럽힌 흔적이 벽에 큰 글자로 선명하게 남아 있다.‘지오바니 벨조니 1818. 3.2’. 서명을 남긴 벨조니는 19세기 초·중반 이집트 주재 영국 총영사였던 헨리 솔트가 유물을 도둑질할 때 그 역할을 가장 충실히 수행했던, 탐험가로 포장된 도굴꾼이다.

기자의 피라미드 지역은 최근까지 이어지는, 아마도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공동 묘지이리라. 피라미드 아래로 귀족들의 무덤이 드문드문 보이고, 50여 m 떨어진 곳에는 지금도 주검을 묻는 큰 묘지가 자리잡고 있다. 시멘트로 네모꼴을 만든 묘지 사이로 들어가자 시신 썩는 냄새가 풍겨왔다.

피라미드는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석조 건축물인 제3 왕조 2대왕 조세르의 계단식 양식에서 출발해 점차 발전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 후 마이둠에 있는 후니(3왕조 5대왕) 피라미드와 다슈르에 있는 두 개의 스네프루(4왕조 1대왕) 피라미드(그 중 하나는 굴절 피라미드라 불리는데, 왜 두 개를 만들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를 거쳐 기자의 피라미드군에서 기술상의 절정을 이룬다. 아부시르에 있는 사후라(5왕조 2대왕) 등에 이르러서는 급속하게 쇠퇴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이 피라미드의 신비를 논했으나, 피라미드의 변천사는 건축의 발전과 쇠퇴 단계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이둠에 있는 후니 피라미드의 경우 가파르게 쌓아 올리다가 무너진 흔적이 오히려 아름답게 보인다. 사막 한가운데서 불쑥 솟아난 듯이 날카로운 각을 세우고 푸른 하늘을 향하고 있다. 마이둠에서 사진 기자가 혼자 멀리 떨어져 촬영하자 갑자기 경찰차가 나타났다. “따로 다니면 위험하다. 이제부터 우리가 보호해야 한다”라며 경찰차가 취재차의 앞에 섰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활동하는 지역이 가까워온 것이다.

‘회교 국가를 만들자’는 주장을 앞세워 81년 사다트 대통령을 암살하기도 했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엘 아슈무네인을 중심으로 하여 이집트 중부 지역에서 준동한다. 그들의 주요 활동 무대인 중부 지역은 관광객들에게는 금단의 땅이다. 자기들의 존재를 세계에 확실하게 알리고, 한편으로는 이집트의 주요 수입원을 차단하기 위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외국 관광객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9월18일 카이로 중심가에 있는 이집트 박물관 앞에서 독일 관광객 9명을 포함한 12명이 테러로 사망한 사건은, 9월15일 원리주의자 4명을 사형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중부 지역은 매일 경찰이 1~2명씩 사망하는 위험한 지역이다.
베니 하산
중왕국 시대 증언하는 화려한 암벽화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아 엘 미니아라는 도시에 이르기까지 관광객은 단 1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엘 미니아에서 베니 하산으로 가는 길에는 경찰의 경계가 더 삼엄했다. 여행사 표시가 되어 있는 렌트카 대신 현지 택시를 타게 하고, 장갑차가 취재팀을 호위하기 시작했다. 강 동쪽에 펼쳐진 2백50m 높이의 석회암 절벽에는 12왕조 시대 귀족들의 무덤이 34개 자리잡고 있었다.

‘경찰의 안내’를 받아 찾아들어간 암굴 무덤에서는 중왕국 시대의 화려한 벽화가 펼쳐져 있었다. 베를 짜고, 밭을 갈고, 고기잡이하고, 도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작지만 세밀하게 그려진 그림들이 기원 전 1900년대에 살았던 크넴호텝이라는 귀족의 묘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비록 크기는 작지만, 화려한 초록·고동·연두 등의 색채와 사실적인 표현이 뛰어나다. 이 무덤은 특히 성서를 연구하는 이들 사이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아브라함 시대 가나안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3천9백 년 전 이집트로 화장품을 팔러 온 가나안 대상들은 사슴과 나귀에 물건을 가득 싣고 가족과 함께 왔다. 어린 자식들을 나귀에 태우고 어른들은 걸었다. 30명이 넘는 사람들을 재칼과 따오기 수십 마리가 뒤따르고 있다. 이 벽화에서 놀라운 점은 높이 30㎝, 너비 3m 크기에 펼쳐진 치밀한 묘사이다. 망원경을 통해 들여다보면, 남자들이 구레나룻에 긴 치마 같은 옷을 입어 가나안 사람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붉은 색 바탕에 흰 줄이 쳐지고, 잎사귀 문양이 그려진 옷이다. 수십 마리 따오기들은 주둥이를 하늘을 향해 높이 쳐들고 있는가 하면, 뒤를 돌아보기도 하는 등 그 표정들도 제각각이다. 동그란 눈에서는 생동감이 넘친다.

동굴 밖으로 나와 강을 건너자 무전 연락을 받은 장갑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장갑차를 앞세우고 남쪽으로 1시간을 달리자,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파라오 가운데 한 사람인 신왕국 18왕조의 열 번째 왕 아켄나텐의 수도가 나타났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아멘 신 사제들의 막강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테베(룩소르)에서 이곳 텔 엘 아마르나로 수도를 옮기고, 유일신인 태양신 아텐을 숭배하는 종교 개혁을 단행한 파라오. 수도 이름을‘태양 판의 지평’이라는 뜻인 아켄타텐으로 정하고 신전과 궁전을 새로 건설한 그는 신앙뿐만 아니라 고대 이집트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부조와 조각품을 남겼다. 텔 엘 아마르나 궁전터의 언덕에는 아켄나텐 시대 귀족들의 무덤이 남아 있다. 무덤들의 벽들은 거의 예외 없이 아텐의 보살핌을 받는 파라오 일가를 묘사하고 있다. 아켄나텐은 가늘고 긴 얼굴, 반쯤 감겨 있는 눈, 매우 가느다란 목과 팔 다리, 둥글게 부풀어오른 가슴을 하고 있다. 허리는 잘룩하고 위로 올라가 붙은 반면 둔부와 허벅지는 지나치게 발달되어 있다. 네페르티티 왕비와 공주도 비슷한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아켄나텐은 이집트 전통 미술의 엄격한 규칙을 깨뜨리고 시각 문화의 새 장을 연 것이다.

기원 전 1358년에 시작된 종교와 예술에 대한 아켄나텐의 개혁은 그의 대에서 끝나고 말았다. 그의 동생이자 사위인 투탕카멘 시대에 이르러 아멘 신 사제들과 타협이 이루어져 수도가 다시 테베로 옮겨가고 종교도 원점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아켄나텐이 텔 엘 아마르나에 건설한 궁전과 신전은 사막 위에 쓸쓸하게 서 있는 기둥 하나와 그 자취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아켄나텐 시대의 예술은 고대 이집트 문화 가운데서 주목되는 성과물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아비도스
파라오들이 묻히기를 소망했던 성스러운 땅


“이쪽으로는 못간다. 돌아가라.” 취재 차량이 엘 미니아에서 강 서안을 따라 내려가려 하자 경찰이 제지했다. 강을 건너 동쪽 사막을 통과하자 경찰이 또 길을 막았다. “한국에서 온 기자들이다. 편의를 봐달라.” 프레스 카드를 내밀며 사정을 설명하자 사복을 입은 경찰대장이 “안전하지는 않겠지만 저쪽으로 가보라”며 아비도스로 가는 길을 터주었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경찰들은 더욱 긴장된 표정이었다. 3년 전 독일 관광객 한 사람이 사망한 아슈트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장갑차 위에 기관총을 달고 삼엄한 경계를 펴는 경찰들과는 대조적으로, 아비도스는 평온한 모습이었다. 관광객은 1명도 없었으나, 세티 1세 신전의 매표소에서는 입장권을 팔았다. 람세스 2세의 아버지 세티 1세가 세운 신전과 오시리스 신의 무덤이라 알려진 오시레이온, 그리고 람세스 2세의 신전이 들어서 있는 아비도스는 파라오들이 묻히기를 소망했던 성스러운 땅이다. 오시리스의 시신 중 가장 중요한 머리가 여기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집트 신화에 따르면, 오시리스는 이집트 최초의 왕이다. 동생 세트가 그를 살해해 그의 주검을 각 지역에 뿌려놓자, 그의 아내인 이시스 여신이 주검을 모두 수습해 그를 환생케 했다. 그 부부 사이에 호루스가 태어났다. 이후 오시리스는 지하 세계의 왕으로서 고대 이집트 역사를 통해 가장 추앙 받는 신으로 떠올랐다.

사람이 죽으면 오시리스 신의 심판을 받아 내세로 들어갈 수 있는지 여부가 결정된다. 심장의 무게를 달아 그 사람의 결백이 판명되면 비로소 신들의 보호를 받게 되어, 살던 집과 가족을 다시 찾아 올 수 있는 초자연적인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죽었다가 부활한 오시리스의 운명은 인간이 죽음 뒤에 걸어가야 할 운명의 모델이었다. 따라서 미라 처리 과정을 통해 보존된 시신은 오시리스 신과 동일시되고, 죽은 자는 오시리스가 된다. 파라오들의 미라가 예외 없이 양손을 X자 모양으로 교차하는 것은 바로 오시리스가 그런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콥트 교도들이 부조의 얼굴 뭉개

건물 정면에서 지붕을 떠받친 사각 기둥으로 시작되는 세티 1세 신전은 화려한 미술관을 방불케 했다. 다주실(多柱室)을 구성하고 있는 수십 개의 기둥에는 왕의 권능과 파라오에 대한 신의 축복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부조가 가득 새겨져 있다. 상하 이집트 관을 쓴 하토르 여신이 파라오에게 젖을 물리는 광경이 있는가 하면, 왕권의 상징인 호루스 신에게 경배하는 모습 들이 묘사되어 있다. 오목새김으로 테두리를 만들고 그 사이를 둥글게 처리한 부조의 부드러운 선에서는 빛이 뿜어져 나왔다. 게다가 신전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지붕이 잘 보존되어 있어, 높이가 1m50cm에 달하는 부조의 화려한 채색이 잘 살아 있다.

그러나 세티 1세 신전의 부조 얼굴들은 대부분 뭉개져 있었다. 이슬람 세력이 진입하기 이전인 서기 391~639년 전성기를 구가했던 이집트 기독교(교리의 특징 때문에 콥트 기독교라 불린다)의 교인들이 그 얼굴을 모두 쪼아 버렸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그림이나 조각상을 죽은 자의 영혼이 영원히 깃들 수 있는 거처로 생각했는데, 콥트 기독교 교인들은 영혼이 그 안식처를 찾지 못하도록 얼굴을 지워 버렸다. 영혼은 얼굴을 보고 찾아들기 때문이다. 시신뿐만 아니라 회화·조각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긴 얼굴(머리)을 쪼아 버리는, 가장 이집트적인 방식으로 벽화를 파괴한 것이다.
룩소르(테베)
이집트 최대의 신전과 신비한 무덤들


그리스 시대에 세워져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덴데라의 하토르 신전을 지나, 사막을 60여 ㎞를 달려가자 룩소르가 나타났다. 중왕국 때부터 고대 이집트의 수도였던 룩소르. 예전에 테베라 불렸던 이 곳은, 가장 강성했던 시기의 고대 이집트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밤 8시께 방문객을 가장 먼저 맞은 것은 불이 환히 밝혀진 룩소르 신전이었다. 룩소르는 중부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던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룩소르는 고대 이집트 문명의 총본산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아멘 신이 국가의 신으로 떠받들어진 테베에서 파라오들은 신앙심을 드러내기 위해 신전과 오벨리스크를 경쟁하듯이 지었으며, 그 결과 룩소르 신전과 카르낙 신전이라는 이집트 최대의 건축 구조물을 낳기에 이르렀다.

룩소르 신전은 테베의 3신, 곧 아멘과 그의 아내 무트, 아들 콘수를 모신 신전이다.‘큰 집’이라는 뜻인 파라오 호칭을 처음 사용한 18왕조의 정복왕 투트모세 3세가 확장한 이후 아멘호테프 3세 때 공사를 끝내고 람세스 2세가 마무리했다. 정문 앞 양쪽에 도열해 있는 스핑크스의 길을 지나 탑문에 이르면, 한 짝을 잃은 오벨리스크와 함께 람세스 2세의 거대한 좌상 2개가 입구를 지키고 있다. 이집트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이름나 있는 오벨리스크의 다른 한 짝은 지금 파리의 콩코드 광장으로 옮겨가 있다. 파피루스 봉우리와 활짝 핀 모양이 기둥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아멘호테프 3세의 아름다운 신전 앞에다, 람세스 2세는 탑문을 덧붙이면서 15도 각도로 방향을 꺾고 거상과 오벨리스크를 세워놓았다. 이 때문에 거대한 룩소르 신전은 마치 람세스 2세의 신전처럼 보인다.

룩소르 신전은 원래 3㎞ 떨어진 곳에 있는 카르낙 신전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아멘 신의 신상이 룩소르로 옮겨지는 오페트 축제가 열리곤 했다. 기자의 피라미드가 피라미드의 절정을 보여준다면, 카르낙 신전은 고대 이집트의 온갖 신전 양식과 누대에 걸쳐 쌓아온 건축 기술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이집트 최대의 신전 건축물이다. 기원전 2000년 중왕국 시대에 시작해 기원전 80년까지 진행된 카르낙 신전 건설은 파라오 10여 명이 대형화 경쟁을 벌이듯 행한 대역사였다. 왕들은 심지어 종교 개혁을 단행하고 텔 엘 아마르나로 수도를 옮겨갔던 아켄나텐의 신전을 부순 돌로 다시 신전을 짓기도 했다.

두 번째 탑문을 지나면 이집트 건축 사상 최고의 장관으로 꼽히는 아멘호테프 3세의 대열주실이 나타난다. 높이 23m, 둘레 15m 기둥 1백34개가 빽빽한 숲을 이루는 대열주실에서는 하늘이 가려져 있었다. 지붕이 없어진 지금은 기둥들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셈이다. 투트모세 1세와 3세, 하트셉수트 여왕 들이 세운 오벨리스크를 지나 탑문 6개를 하나씩 거치면 신전의 끝에 이른다. 여기까지의 길이는 5백m. 석조 건축물을 지어 그 이름을 영원히 남기고자 했던 파라오들의 끝없는 욕망이 물씬 느껴졌다.

테베의 동쪽, 룩소르와 카르낙의 신전이 살아 있는 자들의 신앙심과 강력한 왕권을 증거하는 것이라면, 강 서쪽은 내세의 영원한 삶에 대한 죽은 자들의 강렬한 염원을 드러내는 땅이다. 하트셉수트 신전, 람세스 3세 신전, 라메세움(람세스 2세 신전), 세티 1세 신전 등 화려하고 장엄한 신전들이 모여 있기도 하지만, 왕·왕비·귀족·장인 들의 계곡이라 불리는 신왕국의 거대한 무덤군으로 유명한 곳이다. 람세스 2세, 투트모세 3세, 세티 1세 등 한 시대를 호령했던 왕들의 무덤이 바로 이곳에 있다.
이집트 미술의 ‘정수’ 네페르타리 무덤 벽화

2백m 가까운 석회암 산의 골짜기들에 산재한 무덤 가운데 가장 빼어난 벽화를 가지고 있는 것은 람세스 2세의 왕비 네페르타리의 무덤이다. 72년에 발견된 뒤 86~92년에 보존 작업을 거쳐 일반에 공개된 네페르타리의 무덤은 이집트 벽화의 결정판을 보여준다. 음악과 기쁨의 신인 하토르가 네페르타리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고, 네페르타리가 신들에게 봉헌하는 광경은 빼어난 부조 위의 화려한 채색으로 빛나고 있다. 특히 네페르타리의 하얀 옷은, 팔과 다리 밑부분을 투명하게 보이게 처리해 옷이 바람에 하늘하늘 날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복원 작업을 지휘한 책임자가‘벽화에 단 한 방울의 물감도 첨가하지 않았다’고 공언하는 것을 보면, 네페르타리 무덤의 채색 벽화가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네페르타리의 무덤은, 테베 서쪽 무덤군의‘대표 선수’답게 입장 조건도 까다로웠다. 다른 무덤들이 입장료로 7이집션파운드(약 2천원)를 받는 데 비해, 네페르타리의 무덤은 무려 100이집션파운드(약 2만8천원)를 받는다. 게다가 관람 인원을 1백50명으로 제한하고, 오전 7시30분부터 12시까지만 개방한다. 입장 후 관람 시간은 10분. 유적 보존을 위해 이집트 문화재최고위원회(SCA)가 내린 극약 처방이다.

1922년 도굴당하지 않은 채 발굴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투탕카멘의 무덤은, 그 유물들을 모두 이집트 박물관으로 옮겨 썰렁했다. 왕들의 계곡에서 예순네 번째로 발견된 이 무덤은, 투트모세 3세 등 다른 파라오들의 무덤에 비해 규모가 3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만일 도굴되지 않았더라면, 다른 무덤에 들어 있던 부장품들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무덤의 크기만 비교해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8왕조의 보잘것없는 왕으로서, 9년을 통치하고 17세에 사망한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이집트 역사상 가장 화려한 유물들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룩소르를 지나 남쪽 에스나·에드푸·콤옴보로 가는 길에서는 관광 버스 10여 대가 모여야 경찰차가 앞장서서 길을 인도했다. 에드푸의 호루스 신전은 에스나의 크눔 신전과 마찬가지로 주택가와 맞붙어 있다. 오시리스와 이시스 여신 사이에 태어난 호루스 신은 매의 신으로서 고대 이집트 왕권의 상징이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양 날개를 곧게 펴고 하늘을 나는 송골매는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태양신 ‘라’를 운반하는 새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호루스는 어느 신전을 막론하고 탑문 천장에 태양을 운반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스 시대에 세워진 에드푸의 호루스 신전에는 날개를 접은 호루스가 탑문과 신전 앞에 버티고 서 있다. 검은 색 화강암을 깎아 제작한 2m가 넘는 호루스 상은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매끈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날개와 다리와 부리 등 필요한 부분만 강조되어 있을 뿐, 단순하게 제작되어 힘이 넘친다. 지금은 4마리 가운데 1마리만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아부심벨
세계 50개 나라가 살린 유적


경찰은 아스완에서 아부심벨로 가는 관광객들을 새벽에 불러모았다. 그룹을 만들어 호위하기 위해서다. 새벽 4시 관광 버스 수십 대가 한 곳에 집결했다. 누비아 사막을 3백㎞ 정도 달려가자 나세르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아부심벨 신전이 나타났다. 아스완 하이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했던 람세스 2세의 아부심벨 신전은 59년부터 전개된 유네스코의 누비아 유적지 보호운동으로 더욱 유명해진 유적이다. 람세스 2세가 건설한 아부심벨 신전과 네페르타리 신전은 세계 50개국이 참여한 유적 보호 운동에 힘입어 원래 있던 자리에서 65m 높은 곳으로 옮겨져 아침 태양을 맞고 있다.

20m 높이의 람세스 2세 좌상 4개가 나일 강을 굽어보고 있는 아부심벨 신전은, 이집트 최남단 누비아 지역을 제압하려는 람세스 2세의 욕망이 만들어낸 건축물이다. 누비아는 금을 비롯한 귀중한 광물의 보고였다. 람세스 2세는 사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을 깎아 좌상을 만든 다음, 그 속을 약 10m 높이로 60m를 파들어가 성소를 만들어 놓았다.

오시리스 신의 모습을 한 람세스 석상이 천장에 닿을 듯 서 있는 열주실의 사방 벽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묘사한 부조들로 빈틈이 없다. 히타이트와 벌인 카데슈 전투가 오른쪽 벽을 다 채우고, 다른 벽에는 한 장면을 크게 그린 부조들이 새겨져 있다. 한 발로는 적의 목을 짓밟고, 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창으로 적을 찌르기 직전 모습을 그린 사실적인 부조에서는 파라오의 용맹보다는, 적군 병사의 고통이 먼저 다가왔다. 람세스 2세보다 죽음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병사의 몸짓과 표정이 더욱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람세스 2세 신전의 왼편에 자리잡고 있는 네페르타리·하토르 신전에서는 전쟁 분위기와는 상반되는 평화로운 정경이 넘쳐흐르고 있다. 사랑·아름다움·음악·기쁨의 여신인 하토르가 네페르타리에게 축복을 내리고, 네페르타리가 신을 경배하는 장면들이 아름다운 부조로 묘사되어 있다.

고대 이집트 유적은 국경을 넘어 수단에까지 이어져 있으나, 주요 유적은 나일 강 제2 폭포를 이루는 아부심벨에서 끝난다. 아부심벨에서 서쪽 최북단 알렉산드리아, 동쪽의 타니스에 이르기까지 파라오들은 도시 국가가 아닌 거대한 통일 국가를 통치했고, 나일 강을 오르내리며 강변에 수많은 도시와 신전과 무덤을 만들었다.

고대 이집트의 유적들은 지상에서는 살아 있는 신으로서 통치하고,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파라오들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염원과 욕망은 수많은 조형물과 신전 들로 남아 있으나, 과학·예술·종교·신화 등 인류에게 미친 고대 이집트인들의 영향력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기원 전 3천 년 동안에 이루어진 고대 이집트 문명은, 기원 후 2천 년을 눈앞에 둔 인류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을 문명의 원천인 것이다.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과 1822년 샹폴리옹의 상형 문자 해독이 열어놓은 고대 이집트에 대한 서양의 열광은 2백 년을 이어져 내려 왔다. 서양뿐 아니라 최근 한국에서 일고 있는 고대 이집트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투탕카멘의 관에 적혀 있는 다음과 같은 경구에서 연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어제를 보았다. 그리하여 내일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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