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헌 칼로 정면 승부 나선 YS
  • 文正宇·李叔伊 기자 ()
  • 승인 1997.06.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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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 결심’으로 DJ에 대선자금 맞불…野 대응 따라 정국 향방 갈릴 듯
갑자기 먹장구름이 몰려오더니 거친 비바람이 불고 번개가 청와대 비서실 피뢰침을 강타했다. 5월30일 김영삼 대통령의 담화가 끝난 직후의 일이다. <삼국지연의>나 <삼국유사>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대자연의 조화와 복잡한 인간사에 상관 관계가 있을 리 없겠지만 김대통령의 담화 이후 정국은 말 그대로 난기류에 갇혀 있다. 두께를 알 수 없는 검은 구름이 꾸역꾸역 몰려들고, 금세라도 뇌성벽력을 동반한 폭우가 몰아칠 기세이다.

정국이 이 지경으로 꼬인 것은 물론 김대통령의 담화 내용 때문이다. 야권에서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김대통령의 담화 내용은 일반의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담화의 제목부터 92년 대선 자금 내역 공개와 그에 대한 사과나 반성이 아닌, ‘정치 개혁에 관해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이었다. 원죄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나 참회보다는 죄를 낳은 정치 구조를 뜯어고치겠다는 데 더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

여권 내부에서조차 담화 내용에 부정적 반응

김대통령은 담화에서 대선 자금 문제는 자기 혼자 책임질 일이 아님을 두번 세번 강조했다. 김대통령을 포함해 정치권 전체가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할 일이며, 이 문제와 관련해 국민 앞에 떳떳이 고개를 들 수 있는 정치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정치권 전체를 물귀신처럼 끌고 들어가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진실한 자기 고백이나 반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김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한 뒤 야권뿐만 아니라 여권에서조차 ‘고작 저 정도 얘기를 하려면 무엇하러 담화를 발표했느냐’는 소리가 많이 나왔다. 그런 말이 나오게도 생긴 것이, 김대통령이 대선 자금 문제로 위기를 맞게 된 것은 단순히 대선 자금 액수가 엄청나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선 자금 문제가 정치권에서 현안으로 등장한 것은 95년 10월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천문학적 액수의 비자금을 감춰놓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였다. 당시 일반 국민과 정치권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노씨로부터 정권을 물려받은 김대통령에게 쏠렸다.

노씨가 부정한 방법으로 긁어 모은 자금 중 상당액이 김대통령의 대선 자금으로 흘러들어 가지 않았겠느냐는 것이었다. 김대통령이 대선 때 쓰고 남은 돈을 비자금 형식으로 관리해 오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제기되었다. 92년 대선 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주요 정당 후보들이 모두 법정 한도를 훨씬 뛰어넘는 돈을 썼다는, 삼척동자도 모두 아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시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액수 문제가 아니라 부도덕한 그 돈의 성격 때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김대통령은 노대통령이 탈당해 중립 내각을 구성한 뒤에는 한푼도 지원을 받지 못했다는, 매우 모호한 표현을 써서 국면을 타 넘었다. 검찰을 장악하고 있는 여권이 선제 공격을 감행할지 모른다고 불안해 한 나머지 노씨로부터 20억원의 비자금을 받았다고 먼저 실토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에게만 뭇매를 가하고 자기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로 일관했다. 그러다 다시 대선 자금 문제가 불거진 것은 한보 사태가 터지면서부터였다. 현정부가 한보라는 엉터리 기업에 수조원을 지원하면서 끌려다녔던 것은 92년 대선 당시 김대통령이 한보로부터 거액을 지원받았기 때문이 아니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한보의 몸통이 결국은 김대통령의 대선 자금이 아니냐는 것이다. 사실 한보에 거액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여권의 핵심과 관계 공무원이나 은행장 들이 정상적인 판단력을 상실하지 않았다면 한보 사태의 근본 원인은 대선 자금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밖에는 해석할 길이 없다.

김대통령 차남 현철씨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도 대선 자금 문제는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현철씨가 한보를 포함해 대선 때 은혜를 입은 기업들에게 이권과 특혜를 주기 위해 국정에 개입해 온 흔적이 계속 드러났다. 검찰은 그가 대선 때 쓰고 남은 돈을 세탁해 관리해온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 자료를 확보한 상태이다. 김대통령이 대선 자금 문제로 정치적 위기에 몰린 데는 이런 저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김대통령은 이번 담화에서 노씨나 한보로부터 대선 자금을 지원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김대통령은 담화에서 고비용 정치를 청산하기 위한 정치 개혁을 역설했다. 그러면서 ‘여야가 중지를 모아 빠른 시일 안에 안을 만들기 바란다’고 하면서 정치 개혁의 각론까지 제시했다. 그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대중 집회 개최와 사조직 운영 일절 금지,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한 후보들의 정견 발표 기회 확대, 선거 비용 국가 부담, 정치 자금 모금과 집행의 투명화 등 매우 구체적인 방법론을 들고 나왔다. 이를 두고 야권에서는 ‘입법부를 무시했다’‘YS의 독주와 독선 기질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실제로 국회에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김대통령이 세세한 부분까지 언급한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이런 저런 점 때문에 김대통령의 담화 내용에 대한 정치권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다. 담화를 지켜본 민주계의 한 인사는 “연두 기자 회견 때 YS에 대해 크게 실망했고, 이번에는 절망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제 정국과 민심을 읽는 김대통령의 판단 능력이 ‘세미코마’(뇌졸중) 상태에 빠진 것 같다며 개탄했다. 김대통령에 대해 호의적인 한 대선 주자 진영의 참모도 “한보 이후 연속되는 실수와 실언과 오판에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라며 머리를 흔들었다. 김대통령의 이번 담화가 용기 있는 결단이며, 이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신한국당의 공식 논평과는 동떨어진 반응들이다. 결국 여권 내부에서조차 김대통령의 이번 담화를 그동안 상황을 악화시키기만 했던, 지나친 자신감과 오만에서 나온 또 하나의 실책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는 얘기이다.

‘이회창과 거리 두기 신호’ 해석도

예상대로 김대통령의 담화에 대한 여론은 좋지 않다. 담화 직후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약 80%는 김대통령의 담화 내용에 불만을 표시했다. 야당은 김대통령에 대한 공세의 수위를 하야 투쟁으로까지 높여갈 것인지 검토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김대통령은 도대체 무슨 생각에서 이런 알맹이 없는 담화를 발표했으며, 앞으로 정국을 어떻게 끌어갈 작정인 것일까.

여권에서는 김대통령의 이번 담화 발표를 신한국당 대권 구도의 변화를 알리는 중대한 조짐으로 보기도 한다. 본래 김대통령은 공식 담화를 발표하지 않고 신한국당 이회창 대표를 방패 삼아 대선 자금 국면을 돌파하려고 했다. 그를 대표로 내세워 한보의 터널을 빠져나오려고 했던 것과 같은 상황 판단이다. 하지만 김대통령은 이대표가 중국을 방문한 동안에 그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담화를 발표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결과적으로 김대통령의 방패 역을 자임했던 이대표는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고 말았다.

김대통령이 담화 발표 쪽으로 방향을 바꾼 뒤 각종 여론조사에서 이대표 지지율은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는 중이다. 그런 점에서 여권 일부에서는 김대통령의 이번 담화 발표를 이대표와 거리를 두기 위한 김대통령과 민주계의 예비 동작이라고 받아들이기도 한다. 김대통령이 여러 경로를 통해 민심을 알아본 결과 굳이 이대표를 등에 업고 가지 않아도 하야 요구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지 않을 수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담화 발표 쪽으로 방향을 급격히 틀었다는 것이다. 막판에는 이대표를 선택하게 되더라도 최소한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이대표 쪽으로 권력의 중심이 이동하는 것을 막거나, 아니면 이대표가 아닌 다른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는 얘기이다. 이번 담화 발표에는 이대표를 견제하는 한편 대선 자금 문제를 끈질기게 물고늘어지는 야권과 정면 승부를 해 정국을 김대통령이 주도하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DJ가 하야 투쟁 결심하면 사태 급변할 것”

그런 관점에서 김대통령이 담화에서 언급한 ‘중대 결심’이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민심이 김대통령의 하야를 바라지 않는다면 남는 문제는 야당의 공세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차단할 것이냐이다. 김대통령이 야권을 향해 자신을 계속 벼랑으로 몰면 혼자 죽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대통령의 담화가 나오자마자 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이 ‘국민과 야당에 대한 공개적인 협박’이라고 흥분한 것은, 김대통령이 야당을 겨냥해 칼날을 겨누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권의 한 고위 인사는 김대통령의 담화 발표 직후 사석에서 “우리는 야당의 대선 자금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를 갖고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야당의 공세가 거칠어지면 DJ의 대선 자금을 폭로해 맞불을 놓겠다는 암시이다.

물론 김대통령이 말한 중대 결심이 야권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라는 견해도 있기는 하다. 여야의 개혁 입법 협상이 지지부진할 경우 긴급 명령을 발동하거나 자신의 신임과 연계해 국민 투표에 부쳐서라도 정치 개혁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권 일각에서는 김대통령이 내각제 개헌이나 정계 개편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경우의 수들은 김대통령에게 정치적 부담이 크다는 점에서, 그리고 김대통령의 현재 정치 역량이 정치판을 뒤흔들기에는 너무나 위축되어 있다는 점에서 실현될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김대통령은 담화를 발표해 한보와 김현철씨 파문, 그리고 대선 자금 정국을 마무리 짓는 순서에 들어갔지만 야권이 쉽사리 김대통령을 놓아줄 것 같지 않다. 자민련 김종필 총재는 내각제 개헌이라는 김대통령의 중대 결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역으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초강수를 둘 채비를 갖추고 있다. 국민회의는 막바로 김대통령 하야 투쟁에 들어가지는 않겠지만, 김대통령이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중립 거국 내각을 구성하지 않을 경우 점차로 투쟁 수위를 높여간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한 측근은 “지금은 DJ가 YS의 하야를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여론이 뜨거워지지 않고 있지만 DJ가 만약 하야를 입에 담기 시작하면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현재 여론조사에서 DJ 지지자 중 35% 정도만 YS의 하야를 요구하고 있는데, DJ가 YS를 하야시키고 말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면 결속력이 강한 DJ 지지자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김대통령이 벼랑에 몰릴 것이라는 주장이다.

국민회의는 계속 대선 자금 공세를 강화해 김대통령이 신한국당 경선을 교통 정리할 수 없도록 만들어, 여당 경선을 완벽한 진흙탕 싸움으로 만들어놓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 대통령 후보를 9명이나 세워놓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늦어도 9월 초까지는 김대통령이 하야하든가, 탈당하고 중립 내각을 구성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겠다는 일정표를 갖고 있다. 적어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권영해 안기부장, 박일룡 안기부 차장, 강운태 내무부장관, 김기수 검찰총장, 오인환 공보처장관을 그대로 놔두고는 선거를 치르지 않겠다는 것이다.

김대통령이 아무리 벗어나려고 발버둥쳐도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보더라도 완벽하게 발을 빼지 않는 한 그는 비바람 뇌성 속에서 하야의 망령에 계속 쫓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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