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 황제 포유창 “한국을 원한다”
  • 미얀마 팡상/글·사진 丁喜相 기자 ()
  • 승인 1996.1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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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트라이앵글 ‘패권자’ 세계 최초 밀착 취재/쿤사 항복시키고 아편 80% 장악…광산 개발에 한국 투자 호소
중국 운남성 성도 쿤밍(昆明)에서 서남쪽으로 약 8백30㎞ 떨어진 곳에는 동남아 마약 산지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조그마한 왕국 ‘와방’이 있다. 바로 마약왕 쿤사가 미얀마 정부군에 투항한 뒤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가장 강력한 마약 군벌로 떠오른 와족 연방정부 주석 포유창의 왕국이다.

이곳은 와족의 거주지로 쿤밍에서부터 해발 천~2천5백m의 첩첩 산악을 자동차로 40시간 가량 달려야 나타나는 중국·미얀마 국경 지대이다. 서울에서 꼬박 5일이 걸린 이 험로는 때마침 우기라서 산길 곳곳이 산사태로 막히거나 진흙 웅덩이를 이루어 몇차례 불도저를 앞세우고서야 전진할 수있었다.

10월13일 국경에 도착했다. 국경이라야 너비 백여 m의 남카 강을 사이에 두고 다리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데, 얼마전 홍수로 다리가 떠내려가 나룻배만 오가는 실정이었다. 국경 검문소가 있는 중국측 마을은 주민 5백명이 거주하는 멍리안 현 멍하이다. 마을 장터에는 장이 서지 않는 날인데도 주민 백여 명이 모여 웅성거린다. 그들은 10여 개 임시 도박장에서 도박판을 벌이고 있었다. 허름한 도박꾼들은 판돈을 수백 위안(元)에서 수천 위안까지 걸고 도박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 마을의 한 중국인은 “사회주의 중국에서는 도박이 근절됐는데 전 중국을 통해 허용되는 곳은 이 마을 하나일 것이다. 저 너머 마약 장사 하는 와방 사람들이 돈 쓸 곳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 와서 도박판을 벌이는 것을 특별히 허용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미얀마 정부, 포유창의 통치 공식 인정

중국 국기를 단 검문소에 국경수비대원 4~5명이 한가로이 앉아 있는 모습을 제외하고는 군인은 그림자조차 없다. 과연 광활한 중국 영토가 여기서 끝나는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중국은 외국인이 이곳 국경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지 않지만 건너편 와방 정부와 협의된 특별한 경우에 한해 와방 정부 인사가 안내하면 넘어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기자는 사전에 와방 정부군 총사령관 겸 주석 포유창의 ‘특별 손님’으로 방문키로 되어 있어 마중나올 안내인을 기다렸다.
해질녘에야 와방 정부 광업진흥공사 총경리가 나타났다. 그의 안내에 따라 국경을 넘어 구릉을 약 20분쯤 걸어 올라가니 국경에서는 보이지 않던 커다란 2층 콘크리트 건물과 연병장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와방군 총사령부 건물로, 사령관 겸 와방 정부 주석 포유창이 거처하는 골든 트라이앵글의 심장부였다.

와방군 약 2만명이 있는 총사령부 연병장에서는 군인들이 군사 훈련을 마치고 대오를 지어 숙영지로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박격포와 M16 소총, 중국제 기관총을 들고 있었다. 기자는 사령부 건물 2층에 있는 사령관실로 안내되었다. 건물 입구 양측에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호 병력이 지키고 서 있었다.

2층 사령관 집무실은 가족 숙소와 나란히 붙어 있는데 궁전처럼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유럽산 집기며 와족 전통 문양 걸개 등이 고급스럽게 장식된 이 방의 중앙에는 포유창이 통치하는 와방 지역 지도가 걸려 있었다.

이윽고 와이셔츠 차림을 한 포유창이 기자에게 자리를 권했다. 권총을 찬 포악한 인상을 한 정글의 마약 군벌이 아닐까 하는 선입견이 깨지는 순간 그가 기자를 위로하는 말을 꺼냈다. “교통 사정도 어려운데 이곳에 와준 것만으로도 고맙다. 여기서 조사해 가는 것이 한국에 잘 선전돼 서로 좋은 열매를 맺기 바란다.” 말은 부드러웠지만 작달막한 그는 평생 야전군 지휘관으로서 산악에서 게릴라전만 벌여온 탓인지 무골형 얼굴에 무뚝뚝한 인상을 짙게 풍겼다.

포유창은 자기가 통치하는 와방 지역과 정부, 군대를 소개했다. 2만㎢ 면적에 인구 1백10만명인데, 그의 군대가 장악한 지역에서 40만명이 살고, 나머지 70만명은 와방에서 3백여 ㎞ 떨어진 태국·미얀마 국경 지대에 산다고 했다.

미얀마 중앙 정부와 89년 11월 평화협정을 맺은 뒤 입법·사법·행정 3권과 군 통수권을 공식 인정받고 있다는 포유창은 현재 와방 정부 주석 및 군총사령관 겸 재정부장을 맡고 있다.
군대는 와방연합군으로 약 2만명인데 와족 주민의 경제 활동(주로 아편 재배)을 보호하고, 주변 소수민족 군벌이 침략해 들어오는 것을 방어한다. 군 편제는 3개 사단 외에 남부군구(2개 사단 규모)로 구성되어 있다. 또 독립단위로 경위단·포병단·기동병력단을 두고 있는데 이들은 정예 병력으로 수도 팡상과 사령부를 경호하는 근위부대이다.

와방 정부군의 주요 무기가 뭐냐고 묻자 그는 60~70년대 중국 공산당이 지원해준 소총·박격포·기관총·수류탄이 주종이고 쿤사와 전쟁을 벌여 노획한 무기도 일부 있다고 말한다. 군대에 대한 설명을 해나가던 포유창은 “세계 어느 군사령관을 만나도 이렇게 자세히 자기 군대 사정을 말해주는 곳은 없을 것이다. 이 모두가 한국과 친선 합작을 해보자는 내 각별한 뜻이니 한국에 잘 선전해 달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포유창은 와방 정부가 얼마나 강력하고 안정되어 있는가를 설명하는 데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 외부 세계에 골든 트라이앵글의 마약왕으로 알려진 오명을 벗고 외국 자본을 많이 유치하려는 그로서는 투자 안정성 강조가 기자를 불러들인 궁극적 목적이었던 것이다.

포유창이 와방의 실권자가 된 데는 미얀마 공산당과의 독특한 인연이 있었다. 72년 와방을 통일한 포유창은 당시 미얀마 공산당 중앙위원으로서 일선 사단장을 맡고 있었다. 그가 이 지역의 미얀마 공산당을 전복하고 권력을 잡은 때는 89년이었다. 쿠데타를 일으켜 이곳 사령부를 접수한 것이다. 35년 랑군에서 결성된 미얀마 공산당은 2차대전 후 중국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미얀마 북부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89년 포유창의 쿠데타가 성공하자 40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더칭파덩딘 서기장 및 주요 간부들은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망명했다.

포유창은 쿠데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세계 공산당은 모두 변화하는데 당중앙에서는 등소평의 수정주의를 배격한다며 미얀마 중앙 정부와 화평하라는 중국의 권고를 무시했다. 나는 와방 인민을 위해 군대가 나서서 당의 노선을 바꿔야 한다고 결심하고 89년 4월17일 병건(쿠데타)을 일으켰다. 같은 와족 출신 자오은라이 사령과 함께 그 날 팡상으로 진입한 뒤 자오은라이 사령을 주석으로 옹립하고, 나는 총사령관으로서 군대를 평정했다. 그해 6월 미얀마 정부 키노 장군과 협상을 벌여 화평조약에 서명한 뒤 공산당은 와방연합당으로, 공산군은 와방연합군으로 이름을 고쳤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다른 민족, 다른 당과 모순을 없애고, 중앙 정부와도 모순을 없앴다.”

95년 그의 혁명 동지인 자오은라이 주석이 중풍으로 쓰러지자 와방의 모든 실권은 그가 쥐게 되었다.

포유창은 와방의 역사와 통치자로서의 포부를 주로 설명했지만 아무래도 취재진이 가장 궁금한 대목은 그가 장악한 마약 산지 실태였다. 외부 세계에는 지난 1월 쿤사가 항복한 뒤 그와 경쟁하던 포유창이 골든 트라이앵글의 가장 강력한 패권자로 떠올라 아편 경작지의 80%를 장악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지원제로 모병, 열한 살짜리도 입대

마약 문제를 조심스럽게 거론하자 그는 의외로 상세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자신의 통치 지역이 왜 마약 원산지가 되었는지, 그리고 정부 수입에서 차지하는 마약의 비중, 쿤사와의 관계 및 마약 퇴치를 위한 자신의 구상과 외부 세계에 대한 지원 호소가 그 내용이었다(58~59쪽 인터뷰 참조).

중국 공안과 미국 마약수사국(DEA)은 와방군 부사령관 리주루가 세계적인 마약 거래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또 골든 트라이앵글 마약 거래자 중 쿤사와 웨이수헤캉 두 사람만이 현재까지 미국 뉴욕 법정에 마약 사범으로 궐석 기소되어 있는데, 미국 마약 수사국은 웨이수헤캉이 포유창과 손잡고 전세계에 헤로인을 공급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외부 견해를 들어 그들의 활동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포유창은 이에 대해 “웨이수헤캉은 처음 듣는 이름이다. 외부에서 투자가 들어와 아편 재배가 없어지면 헤로인도 자연히 없어지게 된다”라며 이 문제에 대해 말하기를 피했다. 그의 면전에서 지나치게 민감한 문제까지 파고 든 것이 아닌가 싶어 잠시 질문을 멈추었는데 그가 부인을 불렀다. 그러자 마오타이주와 사천요리가 차려져 나왔다.

올해 48세이며 부인 둘과 자녀 12명을 두었다는 포유창은 술잔이 몇 순배 돌자 이런 표현으로 한국의 관심을 다시 한번 유도했다. “나는 초등학교밖에 안나왔지만 문화 수평(수준)은 고등학교 졸업자 정도는 된다. 이곳에서 돈 많은 사람은 큰 별장을 짓고,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돈으로는 부러울 것이 없다. 이 두메 산골에서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진들 무엇하겠는가. 그래서 도박판과 가라오케가 많이 생겨났다. 나는 수령으로서 그런 돈과 자원을 미개한 우리 민족의 경제 발전을 위해 쓸 수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다.”

술자리가 끝날 무렵 포유창은 배석한 정부 판공실장(공보처장관 격)을 시켜 자기는 내일 일선 부대를 순시하러 나가니 기자에게 정부 인장을 찍은 공식 환영 문건을 전달하고 이곳저곳 안내하라고 지시했다. 사령부에서 하룻밤을 묶은 기자는 이튿날(10월14일) 와방 정부 판공실장과 함께 사령부를 나섰다.

사령부 연병장에서는 병사들이 사격 훈련을 하고, 기슭에서는 포병부대가 박격포 앞에서 지휘관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군인은 대부분 10, 20대 젊은층이었지만 40대 이상도 띄었다. 군인 모집 방법에 대해 묻자 포병부대 지휘관은 “옛날에는 마을 단위로 강제 모집했지만 작년 말 쿤사와 전쟁이 끝난 뒤부터는 자원자만 받는다. 그러나 와족 실정에서는 집에 있는 것보다 군대 가는 게 먹는 것 입는 것이 더 낫다. 현재 열한 살까지 받아들이고 있다”라고 말한다.
2~3m만 파면 광물 자원 ‘무진장’

사령부를 벗어나 능선에 오르니 발 아래 조그마한 시가지가 펼쳐졌다. 한국의 작은 읍 소재지 정도 규모이다. 수도 팡상이었다. 약 만명이 산다고 한다. 팡상 시가지에 들어서니 대부분 중국어 간판에 언어도 중국말이라서 중국의 일부가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다. 가옥은 거의 판잣집이고 중앙 도로변에만 콘크리트 건물이 드문드문 있었다. 유일한 2층 건물에는 커다란 도박장이 들어서 있고, 상가도 주로 가라오케 집들이다. 와방 정부측은 수도 팡상을 앞으로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홍보 대상 지역을 집중 안내했다. 전세계 은행과 결제가 가능한 최초의 은행(풀든은행)이며, 유일한 공장이라는 목재개발공사, 병원, 간이 수력발전소, 건설 중인 담배공장, 텔레비전 수신탑, 우편국, 교회, 불교사원 들이었다.

팡상 시내에서 이루어지는 마약 거래 동향에 관해 안내자는 “정부가 팡상에서 거래하지 못하도록 하는데도 개인적으로 몰래 거래하는 사람이 있다. 여기서는 헤로인 1㎏에 3만 위안(약 3백만원)에 팔리는데, 쿤밍에 가면 10만 위안(약 천만원), 홍콩에 가면 50만 위안(약 5천만원)으로 값이 뛴다. 홍콩에서 다른 나라로 가면 백만 위안(약 1억원)까지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 헤로인은 외국 마약 중개상과 연결된 일부 소수 민족이 비밀리에 거래하지만, 헤로인으로 정제하지 않은 아편은 아편 수확철인 2~3월께 공개적인 거래 시장에서 매매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우리로 치면 추곡 수매와 같은 꼴이다.

기자가 방문한 10월 중순은 마침 와방 지역 산간 곳곳에서 내년 아편 농사를 준비하는 시기였다. 수도 팡상은 해발 6백50m라 아편 재배에는 부적합해 그 장면을 보려면 시 외곽으로 나가야 했다. 안내인을 따라 옛 소련제 지프를 타고 3시간 가량 험준한 산길을 달렸다. 고도가 점점 높아지면서 사방에 끝없이 고산지대가 펼쳐졌다. 와족들은 주로 산 정상 부근에 집단 촌락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집들은 풀과 나뭇가지로 대충 엮은 초막 형태이다.

한 와족 마을에 들어서니 어린이와 아낙네 들이 우루루 몰려 나왔다. 어린이들은 발가벗은 모습이고 어른들도 검붉은 무늬를 수놓은 와족 전통 의상 차림에 맨발이었다. 전기는 물론 교육·의료 등 문명 혜택과는 전혀 거리가 먼 원시 그대로의 삶을 사는 이들은 이방인을 생전 처음 본다고 했다. 이 마을 서기(이장)는 기자를 자기 초막으로 안내한 뒤, 2년 전만 해도 라후족을 제외한 다른 민족이나 외부인이 마을에 들어오면 목을 베어 나뭇가지에 걸어 두었다고 말한다. 이곳 고산지대 소수민족들 사이에서는 와족과 라후족만 친선 관계이고 나머지는 모두 ‘적’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초막 옆 밀림 한켠에는 되는 대로 밭을 일군 뒤 온 가족이 아편씨를 심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옆 잡초 밭에서는 아낙네가 등에 대나무를 엮어 만든 통을 지고 구부려 서서 무엇인가를 담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벼이삭이었다. 고산 지대인 이곳에는 논이라는 개념이 없다. 그저 안남미 볍씨를 산 속에 흩뿌려 놓으면 잡초에 섞여 드문드문 벼이삭이 나오는데 그것을 손으로 훑어 수확하는 것이다. 그렇게 수확이 끝나면 그곳에 불을 지른 뒤 아편씨를 심는다. 이렇게 해서 2~3월께 아편을 수확해 양식과 바꾸어 1년을 넘긴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편 재배를 하늘이 내려준 생명줄로 알고 있는 이곳 주민들에게 그 결과가 외부 문명인에게 얼마나 심각한 해악을 가져오는지 아느냐고 따져 묻는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와방 수도 팡상에서 북쪽으로 1백50㎞를 달리니 용탕 특구가 나왔다. 해발 2천m 안팎의 첩첩 산악은 도처에서 아편씨를 심는 와족들과 피어오르는 연기가 마치 한 장면처럼 겹쳐 있다. 용탕 특구는 지하자원이 집중 매장되어 있는 와방의 지방 정부이다. 특구의 한 관계자는 “노천 광산에서 줍는 주석·은·아연만으로 1년에 4백만 위안(약 4억원)을 벌어들인다. 주로 국경 너머 중국에 파는데, 이중 2백50만 위안(약 2억5천만원)을 팡상의 정부에 올리고 있다”라고 전한다. 기술과 자본이 없어 정확한 매장량은 모르지만 삽으로 2~3m 깊이만 땅을 파면 끝간 데 없이 광물이 널려 있다고 한다.

취재진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50㎞를 더 나아가 중국 국경 마을 서린향(雪林)으로 빠져나갔다. 실제로 고산 지대에서 와방과 중국 간에 국경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데다 양측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이 와족이어서 수백 년간 국경 개념 없이 하나의 공동체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서린향은 운남성 랑창현에 속하는 와족 자치향으로 약 1만3천여 명이 깊은 산골짜기를 경작하며 산다. 차이가 있다면 중국 당국의 행정력이 미치기 때문에 아편 재배는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약 거래자들, 공안원 사살하고 도주

여기서 다시 꼬박 하루 동안 비포장 산악길을 타고 남동진하자 랑창현 소재지가 나왔다. 초저녁에 현 입구에 도착하니 길가에 일제 지프를 가로막아 선 중국 공안 차량이 보였다. 공안 경찰들이 권총을 들고 차량 탑승자 3명을 길가에 엎드리게 하고 차 내부의 짐을 수색하고 있었다. 헤로인 밀매 혐의로 체포된 범인들이었다. 랑창현 공안원 량마오성(49)씨는 최근 변방 지역 마약 실태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운남성과 미얀마 접경에는 90년대 들어 헤로인 중독자가 급격히 늘어 각 현마다 마약 중독자 치료소가 초만원이다. 정부 정책에 따라 헤로인 50g 이상을 소지한 사람은 총살하는데, 그러다 보니 공안원이 너무 많이 희생되고 있다. 마약 거래자들이 적발될 것 같으면 아예 공안원을 사살하고 도주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변방에서 붙잡히는 마약 사범은 주로 미얀마인·라오스인과 소수민족들이라고 한다. 이들이 외부 세계 밀매자의 부탁을 받고 쿤밍으로 날라다 주면 쿤밍에서 다시 상해·홍콩을 거쳐 밖으로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운남성으로 빼내는 마약은 자동차 기름 탱크나 바퀴 속에 숨겨 운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변경 지역에 마약 산지를 둔 중국은 바야흐로 개혁 개방 시대를 맞아 마약 문제로 큰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중국을 거쳐 세계로 빠져 나가는 마약이 늘어 중국은 세계 각국으로부터 ‘차이나 화이트(China white)’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고 있다. 쿤사가 항복한 뒤 골든 트라이앵글은 이와 같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다만 골든 트라이앵글의 새로운 패권자가 된 포유창은 쿤사와 달리 세계적 악명을 감수할 뜻이 전혀 없어 보인다. 뜻밖에도 그는 지금 한국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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