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말 '신흥 종교' 다이어트
  • 성우제 기자 ()
  • 승인 1996.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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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코르셋>의 주인공 이혜은씨는 ‘한국판 수전 파우터’라 할 만하다. 93년 <미친 짓은 이제 그만!>이라는 베스트 셀러를 펴낸 수전 파우터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1백18㎏이던 몸무게를 6개월 사이에 57㎏으로 줄인 ‘미국 여성의 우상’이다. 신인 배우 이혜은씨가 ‘한국 여성의 우상’으로 단번에 떠오른 이유도 수전 파우터와 같은 ‘살빼기’ 때문이다.

이씨가 “연기가 아니라 살빼기에만 관심을 가져서 섭섭하다”라고 말할만큼 대중, 특히 젊은 여성들은 그의 다이어트 성공에 큰 관심을 보였다. <코르셋> 제작사가 이혜은씨의 살찌우기와 살빼기를 집중 홍보한 결과, 영화 속 배우보다는 영화 밖 배우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2개월 만에 68㎏이던 체중을 52㎏으로 줄인 이씨가 선망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뭇 여성들의 ‘원대한’ 꿈과 욕망을 식사 조절과 운동이라는 가장 상식적인 방법으로 실현했기 때문이다. 살빼기는 젊은 여성들의 희망을 넘어선 ‘신앙’인 것이다.

 
지난 4월 제일기획이 ‘정상보다 마른 체중인 비만지수 20(㎏/㎡) 이하의 20~25세 여성 백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조사 대상자의 85%가 한번 이상은 다이어트를 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조사한 ‘한국인의 보건의식 행태’에 따르면, 국민 4분의 1이 94년 7월~95년 7월 사이에 원하는 몸무게를 만들기 위해 체중 조절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체중 조절 실천율이 이 정도라면 한국 국민, 그 중에서도 젊은 여성 대다수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다이어트에 발목이 잡혀 있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니다. 다이어트는 한국에서 국민의 절대 다수를 사로잡는 신흥 종교요, 젊은 여성들은 그 종교를 열렬하게 신봉하는 신도들이다. 그러나 신흥 종교의 교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회 분위기가 대중을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체중 조절 실천율의 연도별 추이는 남녀 모두 89년 이후 꾸준히 증가했으며, 92년과 95년 사이에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80년대 초반에 들어온 다이어트라는 낯선 개념이 90년대 들어 ‘살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대중 속으로 급속하게 파고든 것이다. 90년대 중반을 갓 넘어선 지금 비만 공포증은 어린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전국민을 포박하고 있다. 그러나 젊은층과 중장년층의 다이어트 강박 관념은 그 성격이 조금 다르다.

중장년층은 90년대 들어 강조되기 시작한 건강을 살빼기의 가장 큰 이유로 꼽는다. 그들이 고혈압·당뇨 같은 성인병으로 병원을 찾으면 의사들의 처방은 한결같다. ‘운동을 하고 살을 빼라!’ 당뇨병 환자가 2백만명으로 추산되는 현실에서, 건강을 위해 살빼기에 몰두하는 중장년층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젊어지고 싶은 중장년층의 욕망이 육체 관리에 개입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이어트에 대한 젊은층의 욕망은 순전히 외모 관리에만 집중되어 있다. 한국 사회에서 뚱뚱한 사람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산업화의 열매를 수확하면서부터였다. 궁핍한 시절 뚱뚱한 육체는 ‘듬직하다’ ‘후덕해 보인다’는 식으로 찬양되었다. 80년대부터 육체 이미지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얼굴 좋아졌다’는 말의 의미가 바뀐 것이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육체 이미지는 90년대 들어 완전히 서양화했다. 수전 파우터의 말을 들어 보자. ‘뚱뚱한 여자는 게으른 성격 파탄자로 낙인 찍히기 십상이다. 여자의 몸이 뚱뚱해지면 선택할 여지와 여러 가지 권리가 줄어들게 된다.’

비만에 대한 미국 사회의 평가는 지금 한국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화 현실이다. 제일기획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 가운데 82%가 ‘(한국 사회는) 살진 사람에게 차별 대우를 하며, 내면보다는 외모를 더 중시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날씬한 몸매를 선호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No 처녀는 용서해도 못난 것은 용서 못해”


뚱뚱한 몸매가 역겨움과 무능과 게으름의 대명사로 받아들여지는 데 반해, 여가와 소비의 상징으로 바뀐 ‘검게 탄 피부’와 ‘날씬한 몸매’는 명예·성공·돈·부지런함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뚱뚱함에 대한 혐오와 날씬함에 대한 선호는, 한국 사회에서 자기뿐 아니라 남까지 억압한다. 풀무원 다이어트센터 유윤희 소장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는 체형에 대한 비아냥거림이 특히 심하다. 뚱뚱한 사람을 이렇게 비하하고 놀림거리로 만드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물다고 유소장은 말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농담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처녀가 아닌 것은 용서할 수 있어도, 못난 것은 용서할 수 없다.’ 다이어트는, 육체 관리에 비교적 둔감했던 젊은 남편들에게도 자기와 아내를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서울 ㅅ기업에 근무하는 ㅂ씨(27)는 동갑나기 남편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남편이 자극을 준다는 명목으로 자꾸 날씬한 여자와 비교하면서 구박한다. 식사 때면 남편이 일일이 간섭해 밥이 목으로 넘어갈 때마다 신경이 쓰이고 소화도 잘 안된다. 남편은 가능하면 굶으라고 말한다. 일요일에는 테니스를 가르친다. 자꾸 이러다 보니 너무 짜증이 난다.” 젊은 남편은 비만으로 인해 게을러 보이는 아내의 남편이 되기가 싫은 것이다.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 관념은 뚱뚱한 사람만을 짓누르는 것이 아니다. 뚱뚱한 사람은 살을 빼려고, 날씬한 사람은 몸매를 유지하거나 더 빼려고 전전긍긍한다. 정상보다 마른 체중을 가진 여성을 대상으로 한 제일기획의 조사에서는 ‘살졌다’고 응답한 대상자가 무려 39%에 달했고, 풀무원 다이어트센터를 찾는 사람들 가운데 적정 체중을 가진 사람이 30%를 넘는다.

마르면 마를수록 좋다는 압박감은 ‘건강을 다소 해치더라도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다’는 생각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강박 관념은 80년대 한국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거식증·폭식증과 같은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이어진다.

중성적 이미지를 풍기는 신세대 여성 그룹 미스미스터는 <콤플렉스를 위하여>라는 노래에서 ‘내가 다른 여자보다 못 생긴 건 알지만 넌 내가 창피하니? 거만에 찬 너의 친구들 표정 속에서 둘러대는 네 모습. 널 죽이고 싶도록 미웠지. 날 대할 때면 무슨 원수처럼 보이겠지. 마치 널 망친 듯이’라며 살의까지 드러낸다.

 
여중고생, 다이어트 강박 관념 심각


한국 사회의 집단 심리인 다이어트 강박 관념은 대중 음악의 주소비층인 청소년, 특히 사회 분위기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중고등학교 여학생에 이르러서는 그 증상이 더욱 심각하게 나타난다. 교실에서 외모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금기 사항이다. 점심을 과자로 때우는 학생도 많고, 신진대사에 필요한 열량을 채우지 않아 체육 시간이나 조회 시간에 쓰러지는 학생이 부지기수이다.

여고생들 사이에 다이어트가 입시에 못지 않은 강박감으로 작용한 것은 92, 93년께부터이다. 당시는 서태지와아이들이 등장한 것과 함께 한국 대중 문화가 화려한 볼거리와 이미지 위주로 급작스럽게 탈바꿈한 시기이다. ‘슈퍼 모델 선발 대회’라는 외국의 낯선 이벤트가 한국에 상륙해, 개성 있는 용모와 늘씬한 몸매를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치켜세워 그동안의 미인 대회와 다른 미적 기준을 제공하기도 했다.

여중·여고생들에게 슈퍼 모델 같은 대중 스타는 장래 희망 가운데 최상위권을 다투는 직업으로 떠올랐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일단 공부하고 대학 가서 살빼자’는 분위기가 교실에서 지배적이었으나, 지금은 좋은 성적만 가지고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날씬함이 자신감과 자존심을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새롭게 추가된 것이다.

‘섭식 장애 클리닉 마음과 마음’의 김준기 원장(정신과 전문의)은, 성장기의 자연스러운 변화가 여중·여고생들에게는 오히려 숨기고 싶은 치부가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큰 젖가슴과 엉덩이는 어딘가 세련되지 못한 퇴폐적인 이미지로 변했다. 작은 젖가슴과 엉덩이가 현대 미인의 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중·여고생들 가운데 만화영화의 주인공 같은 볼륨 없는 ‘1자형 몸매’를 원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날씬한 몸매를 가지려는 한국 사회의 집단 심리가 청소년을 포함한 젊은 여성에게 강박증으로 자리잡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매스컴의 영향 때문이다. 화면에 잘 맞는다는 이유로 영상 매체는 서양식 이목구비뿐만 아니라 날씬한 몸매를 가장 이상적인 미적 기준으로 제시해 왔다.

게다가 온갖 광고에 등장하는 구미 모델들의 몸매는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대중에게 주입된다. 90년대 들어 무차별적으로 진행된 구미, 특히 미국 이미지들의 파상적 공세는 5대양 6대주의 미적 기준을 하나로 통일하는 위력을 발휘했다.

왜곡된 육체 이미지에 희생되는 여성들

패션·화장품 등의 상업 광고와 영상 매체가 제시하는 미적 기준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받아들이는 대중은, 자기 정체성을 그 기준에 맞추는 데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육체 다듬기의 기준과 목표를 제시하는 구미 모델들은 조작된 이미지일 뿐 실체가 아니다. 그 사진과 영상들은 기계를 통해 정교하게 수정되기 때문이다. 거울처럼 여기는 육체 이미지에 근접은 할 수 있어도, 자기의 육체에 그 이미지를 실현할 수는 없는 여성들은 언제나 불만족스럽고 불안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만들 수 없는 육체가 눈앞에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영상 매체 및 광고 이미지와 더불어 ‘다이어트 신앙’을 전파하는 또 하나의 강력한 전도사는 다이어트산업이다. 다이어트 업체와 체형 관리 업체는, 대중에게 다이어트 종교에 참여하지 않으면 마치 구원을 얻지 못할 것 같은 광고 세례를 퍼부음으로써 육체에 대한 관심을 넘어 ‘낙오 공포감’마저 조장한다.

“남자든 여자든 꿈이나 성취하려는 목표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을 때 주변의 이런 분위기에 휩쓸리게 마련이다. 다이어트는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사회 현상이 발생한 후 문화로 정착하면 그 고리는 끊기 힘들다”라고 조혜정 교수(연세대·문화인류학)는 지적했다. 다이어트는 본래 중세 수도자들이 정신을 맑게 하는 자기 수련 방법으로 채택한 것이다. 생산력이 변화하자 노동에서 해방된 육체가 관상용 또는 소비되는 상품으로 탈바꿈하면서 다이어트의 개념도 더불어 바뀌었다.

건강보다는 외모 관리에 편향된 한국 사회의 살빼기 문화는, 누구도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감을 유포하면서 젊은층을 중심으로 겨우 몇년 만에 튼튼한 뿌리를 내렸다. 93년 수전 파우터가 내지른 외침은 왜곡된 육체 이미지에 시달리는 오늘의 한국 사회를 겨냥한 것처럼 보인다. ‘미친 짓은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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