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밀가루 몰래 보낸 배경
  • 李敎觀 기자 ()
  • 승인 1997.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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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북한에 밀가루 보내며 무엇을 노렸나
현대그룹이 자금을 지원해 밀가루 3천4백t이 작년 여름 극비리에 북한에 제공된 사실이 마침내 밝혀졌다. 하지만 두 가지 의문은 남는다. 우선 정부가 대북 식량 지원을 금하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순수 민간 기업이 밀가루 공급 사업을 주도하는 일이 가능했겠느냐는 의문이다. 이는 이 사업을 중개한 북경 대북 무역 관계자들이‘밀가루 공급 사업은 청와대 비서실이 주도한 것이다’라고 한 증언이 신빙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 다음 의문은, 현대그룹이 밀가루 공급 사실이 밝혀질 경우 닥칠 위험을 무릅쓰고 자금을 댄 속사정이다.

대북 밀가루 공급 사업을 청와대 비서실이 주도했다는 증언을 사실이라고 전제하면, 이는 그 목적이 무엇이었든 간에 김영삼 정부의 대북 정책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공급 계약 체결 이전부터 지금까지 정부는 북한이 △대남 비방 중지 △한반도에서 남북 당국자 회담 개최 △북한 당국의 직접 요청 등 세 가지 전제 조건을 수용해야만 식량 지원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그런데도 청와대가 정부 방침을 어겼다는 것은 정부가 남북 관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회 일각의 의혹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면 청와대 비서실이 밀가루 공급 사업을 주도한 목적은 무엇일까. 1차 목적은 2002년 월드컵을 유치하기 위해 북한의 지지를 얻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사저널>이 이와 같은 근거를 처음 포착했던 시점은 작년 11월께이다. 당시 이 사업을 중개한 북한의 대외경협창구인 금강산국제무역개발총회사의 한 고위 관계자는 <시사저널>과 가진 인터뷰에서 “청와대의 목적은 월드컵 유치를 위해 북한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있었다”라고 밝혔던 것이다.

다만 문제는 청와대 비서실이 밀가루 공급 자체를 부인하는 상황에서 밀가루 공급 사실이 월드컵 유치와 정말로 관련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그는 이와 같이 증언했다. “나는, 청와대 비서실로부터 밀가루 공급 사업을 부탁받은 재미교포 사업가 김양일씨를 도와서 이 사업을 중개한 금강산국제무역개발총회사 박경윤 회장과는 함께 대북 사업을 하는 막역한 관계이다. 그런데 96년 봄 어느 날인가 박회장이 사석에서 내게 김양일씨가 이 사업을 하게 된 전후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청와대 비서실이 월드컵 유치와 관련해 도움을 얻기 위해 북한 당국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밀가루를 공급하기로 기획한 시점은 95년 10월 이전일 가능성이 높다. 밀가루 공급 계약이 10월 말이기 때문이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계약서에 따르면, 당시 한승수 청와대 비서실장의 부탁을 받은 김양일씨가 북한의 광명성총회사와 밀가루 공급 계약을 맺은 시점은 95년 10월30일이다.

“월드컵 유치 위해 대북 접촉” 안기부 건의 묵살

밀가루 공급 계약 시점을 보아 청와대가 당초 북한 당국에게 기대했던 ‘월드컵 유치와 관련한 도움’이란 남북한 공동 개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계약이 월드컵 유치 신청 마감 시한인 95년 11월6일을 바로 코앞에 두고 체결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일본보다 3년 늦게 월드컵 유치 경쟁에 뛰어들어 불리할 수밖에 없던 한국으로서는 남북한이 공동으로 유치 신청을 해야 유치할 가능성이 높다고 청와대 비서실이 판단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근거는, 밀가루 공급 계약 시점이 정부가 95년 6~10월 진행된 쌀회담을 통해 쌀 10만t을 제공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는 점이다. 게다가 쌀 수송선 삼선 비너스호가 청진항에 억류되는 바람에 쌀 제공에 대한 국내 여론이 몹시 악화하던 시점이었다. 그런데도 극비리에 밀가루 공급 계약이 체결된 배경에는 당시로서 남북한 월드컵 공동 개최말고는 별다른 동기가 없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밀가루 공급과 남북한 공동 개최 추진과의 관련성을 청와대 비서실이 부인하더라도 이를 뒷받침할 근거는 또 있다. 바로 청와대가 정부의 대북 전문 기관을 배제하고 월드컵 유치를 위해 북한 당국과 극비리에 접촉했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사실이 불거진 계기는 국가안전기획부의 대북 사업 부서가 96년 1월 초 남북한 공동 개최를 위해 북한 당국과 접촉하겠다고 청와대에 건의했을 때 당시 청와대 비서실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개입하지 말라’며 묵살한 데서 비롯되었다.

청와대가 건의를 묵살하자 안기부 내부에서는‘도대체 무슨 대북 접촉 채널이 있기에 청와대가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냐’라는 의구심이 많았다. 청와대가 월드컵 유치를 위한 북한의 지지를 얻기 위해 북한 당국과 어떤 접촉을 하고 있음을 안기부가 알아보기 시작한 시점은 바로 이 때이다. 그러다가 안기부는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작년 6월에 밀가루가 단동을 거쳐 북한에 들어가고 있던 때 청와대와 현대그룹의 대북 밀가루 공급 사실을 포착했다.

그렇다면 현대그룹이 자금 지원을 한 배경은 무엇일까. 현대그룹은 처음 밀가루 구입 자금으로 98만6천달러를 대는 과정에서 많이 망설였던 것 같다. 그러나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의 4남인 정몽준 의원이 축구협회장으로 월드컵 유치를 주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북한 공동 개최라는 카드를 통해 월드컵을 유치할 수 있다면 이는 곧 현대그룹에게도 여러 가지 의미에서 좋은 일이기 때문에 자금을 지원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우세하다.

대북 밀가루 공급 사업의 목적이 남북한 공동 개최 추진에 있었다면 현대그룹의 이해는 청와대 비서실의 그것과 맞아떨어진다. 그럼에도 청와대 비서실의 목적이 월드컵 유치를 위해 북한의 지지를 얻는 데만 있었다고 결론을 내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무엇보다도 청와대 비서실이 여러 가지 위험들을 무릅쓰고 대북 밀가루 공급을 주도한 또 다른 중요한 배경으로 자신의 임기 내에 남북한 정상회담을 실현하려는 김영삼 대통령의 의지를 꼽는 국내 대북 전문가들이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청와대 비서실은 정상회담 실현을 위해 조지워싱턴 대학 김영진 교수와 조지아 대학 박한식 교수 등 재미 교포 학자나 사업가들을 비공식 대북 비선으로 가동해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밀가루 공급 사업을 중개한 김양일씨가 지난해 줄곧 평양과 서울을 오가면서 정상회담과 관련해 뛰어다녔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당사자인 김양일씨가, <시사저널>이 작년 9월에 그와 같은 내용의 기사를 보도하자 얼마 뒤인 9월9일 <시사저널>에 직접 전화를 걸어와 보도 내용이 사실이라고 인정한 데서도 드러난다.

김양일씨는 이 전화 통화에서 자신은 청와대 비서실의 요청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실현시키기 위해 활동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전화를 하기 전날에 평양에서 나와 북경을 거쳐 서울에 도착하는 등 몹시 바쁘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만나자는 요청에 대해서도 김씨는 자신의 활동이 극비리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며 끝내 사양했다.
청와대 비서실, 법적·도덕적 책임 못 벗어

자신의 임무가 그처럼 극비에 속하는 것이 사실이었다면 김양일씨가 전화를 건 배경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과 김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와의 관계를 감추려고 하는 생각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취재진의 만나자는 요청을 거절하는 대신 몇 가지 중요한 북한 정보를 줄 테니 더 이상 김현철씨와의 관계를 기사화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시사저널>은 김씨가 전화를 걸어오기 직전인 96년 9월5일자 기사를 통해 김양일씨가 대북 정책과 관련해서 김현철씨를 가까이서 돕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물론 김양일씨가 김광일 대통령 비서실장의 요청으로 중개한 대북 밀가루 공급 사업이, 청와대 비서실이 남북 정상회담을 극비리에 추진하는 과정의 일환이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게다가 전·현직 대통령 비서실장들이 자신들의 직무와 관련이 없는 밀가루 공급 사업을 주도한 배경에 김현철씨가 개입되었는지도 아직 밝혀진 바 없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김양일씨가 굳이 김현철씨와의 관계에 언론이 주목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었다는 점이다.

설령 대북 밀가루 공급이 제3의 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청와대 비서실이 대북 식량 지원과 관련한 정부의 방침을 어겼다는 사실은 법적·도덕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선 법적인 측면에서는 청와대가 통치권 차원에서 밀가루를 공급했다고 해명해도 통일원과의 협의를 거쳐 추진해야만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밀가루 공급 사업은 이와 같은 제도적 절차를 무시했다. 대북 전문가들이 청와대 비서실이 남북교류협력관계법 위반에 따른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지적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도덕적 책임은 청와대의 대북 밀가루 공급이 북한에 식량을 지원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는 민간 단체들의 요구를 정부가 불허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물을 수 있다. 95년 12월26일 기독교 등 6개 종단이 10억원 가량의 성금을 모아 대북 식량 지원을 하려고 정부에 요청했으나 정부는 앞서 언급된 대북 식량 지원의 세 가지 전제 조건을 들어 이를 거부했다. 그런데도 청와대 비서실이 정부와 민간 몰래 식량 지원을 한 것은 정부와 민간 모두를 기만한 처사라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게 되었다. 설령 정부가 대북 밀가루 공급 사실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이는 대북 교역과 관련한 정부의 감독 기능에 중대한 구멍이 뚫려 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정부가 행정적인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결국 청와대 비서실 주도로 이루어진 대북 밀가루 공급 사업은 과연 김영삼 정부의 대북 정책이 합리적으로 입안·수행되는지를 의심케 만든다. 게다가 이 사업의 중개인으로 재미 교포 사업가가 끼어든 사실도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많은 정부 기관과 관계자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정부의 대북 정책을 근본부터 재점검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국내 대북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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