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지리, 천기누설인가 혹세무민인가
  • 경상·전라도/정희상.김은남 기자 ()
  • 승인 1996.10.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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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에 둘러볼 만한 한국의 대표적인 명당 몇 군데를 소개해 달라고 하자 한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필이면 지금 이 시기에, 왜 그런 위험한 시도를 합니까?”

어머니의 품, 여자의 자궁, 알을 품은 둥지. 명당을 비유하는 수식어는 사람마다 다양하다. 단 그것이 좋은 지역, 좋은 터, 좋은 대지 등을 의미한다는 데서는 일치한다. 한국인에게 명당이란 퍽 친숙하게 다가드는 낱말이다. 그런데 왜 명당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에 그런 부정적인 반응이 돌아왔을까. 그 이유를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선은 음택(陰宅) 풍수의 문제였다. 삶과 죽음을 순환 구조로 받아들였던 옛 조상들은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뒤나 모두 집(宅)에 몸을 뉘는 것으로 이해했다. 단지 그 집이 땅 위(陽宅)냐 땅 속(陰宅)이냐 하는 구분이 있었을 뿐이다. 이 때문에 흔히 양택 풍수를 ‘주택 풍수’, 음택 풍수를 ‘묘지 풍수’라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 도읍이나 마을 위치를 정하는 것을 ‘도읍 풍수’로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

“풍수 지리 믿는다” 71.6%


문제는 오늘날 풍수의 흐름을 주도하는 것이 음택 풍수이지만 그와 동시에 풍수가 미신적인 잡술로 공격받는 가장 큰 이유 또한 음택 풍수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조상 묘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길흉화복이 결정된다는 음택 풍수의 기본 이념은 수많은 지식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왔다. 유가의 ‘효’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지만 가끔 그 도가 지나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를 내다보는 오늘날까지도 음택 풍수를 믿는 사람이 상당수인 것 또한 한국적인 현실이다. 지난 5월 한국여성단체협의회가 서울·경기 지역에 거주하는 1천1백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풍수 지리를 믿느냐는 질문에 부정적으로 대답한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28.4%밖에 안되었다. 나머지는 전적으로 믿거나(5.9%) 믿는 편(65.7%)이라는 응답이었다. 전국토의 1%(970㎢)가 묘지로 뒤덮여 있는 토지 문제, 사이비 풍수 창궐 따위는 모두 이같은 믿음이 부른 부작용들이다.

 
음택 풍수에 대한 믿음이 지나쳐 그 폐해를 가장 극적인 형태로 드러냈던 역사적 인물은 흥선 대원군일 듯하다. 가야산 아래 ‘3대에 걸쳐 제왕이 나올 자리’가 있다는 승려 정만인의 말을 듣고 흥선 대원군은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이 구)의 묘를 주저없이 이장했다. 흥선 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명복(고종)이 실제 왕위에 오른 뒷날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도굴 사건(1866년)으로 또 한 차례 유명해진 바로 그 무덤이다.

흔히 풍수가들은 명당을 따질 때 용혈사수(龍穴砂水) 네 가지를 기본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무덤 뒤 주산(主山)의 산줄기(용), 산줄기가 뻗어내려 오다 기가 멈춰 맺힌 자리(혈), 좌청룡·우백호·주작·현무·안산·조산 따위로 지칭하는 주변의 모든 국세(사), 물줄기(수)가 그것이다. 집터나 묘터에 모두 해당하는 구분법이다.

남연군 묘의 경우 주산인 가야산 꼭대기에서 살아 있는 용이 꿈틀꿈틀 힘차게 내려오다 묘터 바로 뒤에서 잠깐 숨을 멈춘 듯한 기세이다. 가야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묘터 좌우를 안온하게 감싸고 있는 모습이나 나즈막한 안산(案山)이 묘 앞에 다소곳이 앉은 모습, 안산 뒤로 저 멀리 수많은 산봉우리가 조정에 도열한 신하들처럼 조산(朝山)을 이루고 있는 모습 등 남연군 묘가 명당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는 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풍수의 역사에서 남연군 묘가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조선 시대 양택과 음택 풍수 간의 관계를 잘 드러낸 사례이기 때문이라고 한동환씨(풍수 연구가)는 지적한다. 신라 말∼고려 초 풍수가 처음 도입될 때만 해도 양택 풍수 중심으로, 주로 사찰 터를 잡는 데 이용되었던 풍수가 조선 시대 유학의 영향 아래 음택 풍수로 바뀌어 가면서 그 도가 지나쳐 양택마저 침범한 대표적인 상징이라는 것이다. 남연군 묘가 들어선 터는 본래 가야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였다. 무덤을 쓰기 위해 가야사 주지를 회유한 대원군은 사정이 여의치 않자 절을 불태우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훗날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은 사죄하는 뜻으로 가야산 안쪽에 새로 절을 지어 바쳤는데, 지금도 남아 있는 보덕사가 바로 그 절이다.

물론 오늘날의 음택 풍수를 조선 말기에 빚어진 이런 극단적인 폐해와 동일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왕이 날 명당’의 위력은 여전하다. 선거 때면 특히 그 수가 급증한다. 어떤 후보는 조상 묘를 명당에 썼기 때문에 ‘천명’을 받아 당선될 것이라는 얘기가 그럴듯하게 유포된다. 모두가 도참 선사의 정통 계승자라고 자처하는 일부 풍수가들로부터 흘러나오는 정보들이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으로 이어지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이런 시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97년 대선 앞두고 ‘땅속 전쟁’ 시작

97년 대선을 앞두고도 ‘조상의 음덕’까지 끌어들여 보려는 ‘땅속 전쟁’은 어김없이 불거져 나왔다. 가장 먼저 공개적으로 드러난 것이 지난해 가족 묘를 이장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 경우이다.

취재진은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묘봉리 산자락에 위치한 김대중 총재의 가족 묘를 둘러보았다. 지난해 육관 손석우씨가 ‘남북 통일을 완수할 영도자가 날 땅’으로 잡아 주었다는 곳이다. 백여 평의 묘역은 맨 위에 김총재의 부모 합장 묘, 그 아래에 전처 묘, 또 한 계단 아래에는 김총재의 여동생 묘가 차례로 자리하고 있다. 약 2m 높이의 비석에는 김총재 형제들을 포함해 아들 딸, 증손자녀까지 직계 가족의 이름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7부 능선에 자리한 김총재의 가족 묘 주변은 크고 작은 산들이 빙 둘러 있어서 산 비탈이지만 바람이 없고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묘지 아래로 약 5백m 떨어진 곳에 이곳 산(농장) 관리인 안용식씨 가족이 살고 있는데, 지난해부터 김총재 가족 묘도 그가 돌본다고 했다. 안씨는 “1년에 쌀 석 섬씩 받고 벌초해 주는데 산소를 쓴 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와 괴롭다. 어떤 때는 버스를 대절해 백∼2백명씩 들이닥쳐 산소를 둘러보고 간다”라고 이곳 묘지에 대한 세간의 집요한 관심을 전했다.

이래저래 김대중 총재의 가족 묘는 앞으로 남은 대선 기간까지 풍수가들 사이에 ‘영도자가 날 명당’인지 여부를 둘러싸고 입방아에 오르는 시험대 역을 톡톡히 하게 될 전망이다.

그러나 ‘영도자’가 나지 않는다 해서 풍수가가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다. 역대 대통령의 조상 묘를 골라주었다는 지관들의 행적을 보면 알 수 있다. 자기가 그 묘를 골라주었다고 앞다투어 선전하던 지관들은 ‘고객’이 비참한 말로를 걷는 순간부터 그 책임을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더 큰 문제는 그것이 가능한 사회 풍토이다. 정부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공식으로는 풍수 지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일이 생길 때면 풍수가를 불러들인다. 공공 기관을 지을 때조차 그렇다(48~49쪽 상자 기사 참조). 비공식 계약 관계이기 때문에 기록이 남지 않고, 따라서 풍수가가 나 몰라라 하는 일도 가능한 것이다. 이에 대해 “풍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중적인 잣대를 바로잡아야 한다”라고 비판하는 김두규 교수(전주 우석대)는 ‘만약 풍수가를 불렀다면 <장택기(葬擇記)>를 제출토록 해 훗날 참고 사료로 쓸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장택기>란 풍수가가 묘를 정하고 난 뒤 그 묘에 관한 풍수지리학적 제반 사항을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풍수에 맞춰 초등학교 헐고 다시 지어

음택과 양택 어느 쪽을 강조하든 모두가 동의하는 대목은 있다. 바로 하늘·땅·사람의 기운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야말로 진정한 명당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취재진은 몇몇 학자와 풍수가가 공통으로 추천해 준 ‘조화로운 땅’을 몇 군데 다녀 보았다. 풍수 지리 문외한도 ‘이런 곳이 명당이구나’ 쉽게 깨칠 만한 입지를 갖춘 곳들이다.

우선 전라도 쪽에서는 인촌 김성수 생가(전북 고창)를 추천하는 이가 많았다. <동아일보>·경성방직·고려대를 세운데다 정계·재계·언론계·학계에서 두루 걸출한 인재를 배출한 인촌 가문인 만큼 이 집이야말로 명당이 아니겠느냐는 가설은 일반인들도 세워 봄 직하다. 인촌 가문이 풍수 지리에 밝았으며, 인촌 조상들이 남긴 유품 가운데 패철(지관들이 사용하는 지남철로 24방위와 살 등의 법수가 기록되어 있다)과 ‘천체보좌도표’가 있는 것을 그 증표로 들 수 있다는 김두규 교수의 설명이 이같은 가설을 더 굳혀 준다.

전북에서 손꼽히는 만석지기 저택답지 않게 검소하게 지어진 이 집은 특이하게도 북향집이다. 집은 남향이나 동향 또는 남동향이 좋다는 일반의 상식을 깨뜨리는 배치이건만 마당에 서면 따뜻하고도 넉넉하다는 느낌이 든다. 뒷산(학봉)이 남쪽에 있는 대신 북쪽은 훤히 트여 있기 때문이다. 흔히 북향 집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기 쉬워 피한다고 하는데, 인촌 가문은 이같은 속신을 과감히 무시하고 기의 흐름에 따라 집의 방향을 정한 것이다. 뒷산 좌우로 날개가 뻗어나가 마을(‘인촌’이라는 호는 마을 이름에서 딴 것이다) 전체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청룡·백호도 훌륭하게 갖춘 셈이다.

마을 전체가 명당으로 꼽히는 곳도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에서 산다는 주민의 자부심이 매우 강한 마을로는 경북 경주시 장동면 양동리를 들 수 있다. 이 마을에 들어서면 조선 후기 어느 양반 마을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1백50여 호에 이르는 전통 기와집과 초가가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양동 마을은 15세기에 이루어진 전형적인 마을(여강 이씨·경주 손씨 집성촌)로, 설창산을 주봉으로 하여 내리뻗은 세 줄기 구릉에 자리한다. 지세가 ‘물(勿)’자 형이라 해서 주민들은 역대로 이 ‘물’자 형을 손상시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에 대한 그들의 풍수지리적 집착은 88년 마을 앞 초등학교를 헐고 방향을 바꿔 새로 지은 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즉 당시 마을 앞을 가로지른 초등학교 건물이 마을 형국을 ‘물’자에서 ‘혈(血)’자로 비치게 한다 해서 건물을 헐고 방향을 바꿔 새 교사를 지은 것이다. 양동 마을은 조선조 유학자 우재 손중돈(1463∼1529)과 조선 성리학 5현 중 한 사람인 회재 이언적(1491∼1553)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언적은 손중돈의 생질로서 당시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두 사람이 한 방에서 태어났다 해서 그곳이 잘 보존되어 있다.

 
청룡·백호·주작·현무가 감싼 하회마을


양동 마을은 조선조 때부터 풍수사들이 ‘3현 출생지지’로 예언한 곳이다. 두 성현이 나온 후 아직 세번째 성현이 나오지 않아 주민들은 그의 출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요즘도 이런 소문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출가한 손씨 여성들이 출산을 위해 이 마을을 찾아오지만 주민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수백 년간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오는 명당 마을의 전통 때문인지 얼마 전 방한한 영국 찰스 왕세자와 베트남 총리도 이 마을을 둘러본 뒤 깊은 관심을 표하고 갔다 한다.

하회탈과 민속 문화로 일반에 널리 알려진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 마을은 예로부터 전국의 풍수가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 칭찬해 온 ‘천하 명당’이기도 하다. 낙동강 7백리 물줄기가 남서쪽으로 진행하며 흐르다 부산에 이르기까지 오직 한 군데 동쪽으로 물이 흐르는 곳이 있으니 예로부터 이곳을 ‘물돌이동(河回)’이라 불렀다. 마을 앞 낙동강 맞은편에 깎아지른 듯 솟아 있는 부용대에 오르니 하회 마을은 태극 형상으로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가 포근히 감싸안은 한떨기 꽃과 같았다. 발 아래 천길 낭떠러지 밑으로 보이는 낙동강 물에는 오늘도 굵다란 잉어들이 헤엄치고 있다. 하회 마을 1백30여 호 뒤로는 풍수지리상 주산인 화산이 자리잡고 있고, 좌측에 남산, 우측에 화산 줄기, 앞쪽에 원지산이 드리워 풍수 문외한이라도 청룡·백호·주작·현무가 감싸는 형국의 명당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명당은 인재를 배출한다는 말을 입증하기라도 하듯이 하회 마을은 유학자 겸암 유운룡과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을 지낸 서애 유성룡이 출생한 곳이기도 하다. 풍산 유씨 종가(양진당)는 증손 유상붕씨가 지키고 있는데 취재진이 방문했을 때는 출타 중이었다. 종가에서 가을 고추를 다듬고 있던 김명규 할머니(82)는 일제 때 박대통령과 구미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동기인데, 유씨 종가에 시집와 60년 넘게 살고 있다며 마을 전설을 들려준다.

“겸암과 서애 어른 8대조 할아버지인 유난옥 어른이 풍산에 살다 하루는 이곳에 들러 천하 명당임을 알고 터를 닦았다. 그런데 자꾸 담이 쓰러지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뒷산 암자를 찾아 스님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3대에 걸쳐 적선을 해야 그 자리가 받아들일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때부터 유난옥 어른은 동구 밖에 초막을 치고 오가는 나그네·거지 들에게 평생 적선을 했고, 그 일을 유언으로 남겨 3대를 이어 계속했다. 그 뒤 4대째 유종혜 어른이 집을 짓자 아무 탈이 없었다. 그래서 그분이 입향조가 되었고 서애 유성룡 어른은 중흥조로 모시고 있다.”

풍수 이론상 완벽한 명당 터란 흔하지 않다. 따라서 옛 사람들은 주변에서 알맞은 여건을 찾아 그곳을 명당으로 만든 예도 많다. 풍수상으로 흉한 기운을 발산하는 곳에는 초목을 심어 그 기를 약하게 하려 했고, 땅 기운이 약한 곳에는 탑을 세워서라도 자기네 삶터를 기가 살아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애썼다. 지금도 이런 마을이 남아 있다. 마이산을 끼고 옹기종기 붙어 있는 전북 진안 일대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풍수는 ‘믿음’이 아닌 ‘앎’의 대상


진안군 정천면 월평리 원월평 마을의 경우 새마을운동 때 신작로를 내면서 헐어 버린 마을 입구 돌탑을 90년대 들어 다시 세웠다. 이 마을에 사는 장창섭옹(77)에 따르면, “돌탑이 사라진 후 교통 사고로 마을 사람이 죽거나 외지에 나간 젊은이들이 비명횡사하는 일이 잇달아 탑을 다시 세웠다”는 것이다. 해마다 정월 초사흗날 탑제를 올리는 의식도 부활시켰다. 그 후에는 아직껏 큰 사고가 없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입구가 휑하니 뚫려 있는 마을은 마을 앞에 나무를 심거나 돌탑을 쌓아 나쁜 기가 들어오는 것을 막았는데 풍수에서는 이를 ‘비보(裨補)’라 부른다. 이를 조사한 이상훈씨(진안 제일고 교사)에 따르면, 진안 일대에 이런 비보 탑이 있는 마을만 스물세 곳에 달한다.

취재진이 돌아본 명당 지역은 풍수사들이나 지리학자들이 추천한 곳에 국한했지만 그렇다고 나머지가 흉한 터라는 뜻은 아니다. 조상 대부분은 바람막이 구실을 해주는 뒷동산 산자락 품에 안겨 앞으로는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곳을 삶터로 정하고 그 산천의 기운으로 마을이 평안하고 인재가 출현하기를 희구했다. 이곳에서 해맞이·달맞이를 하고 기우제도 올렸으니 전국 방방곡곡 마을을 품고 있는 산마다 어찌 보면 우리 민족의 심성을 길러주고 희로애락을 같이해 온 명산이요, 명당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현대 산업 사회로 접어들면서 이같은 전통적 자연관은 발 붙일 곳을 잃었다. 자연은 인간이 정복할 대상으로 바뀌었고, 그 결과 우리가 물질 문명의 혜택을 입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반대 급부로 자연은 기어코 우리에게 ‘역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물질 문명 발달과 비례해 대량의 환경 파괴가 잇달았고, 이는 우리 삶의 터전을 위협하게 되었다.

21세기를 코앞에 두고 새삼스레 조상들의 풍수적 자연관을 돌아보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자연을 대접해 줄 때에만 인간도 행복하고 쾌적한 삶터를 보장 받을 수 있다는 교훈을 뒤늦게야 깨달은 것이다. 이에 따라 비록 혈이 잘린 도시 공간에 살지라도 될 수 있는 대로 땅과 자연의 질서에 맞춰 삶의 공간을 꾸리고자 하는 현대적 풍수 이론과 실천 방안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52~54쪽 기사 참조). 이제 풍수는 ‘믿음’이 아닌 ‘앎’의 대상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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