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홍의 질주, 무엇이 문제였나
  • 金芳熙·李哲鉉 기자 ()
  • 승인 1997.08.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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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발 확장·1인 독주·정치적 행보 등 무리수 전문 경영인 ‘정도’ 이탈…정부·금융기관마저 등 돌려
두 번에 걸친 기아그룹의 채권금융기관 대표자회의는, 비슷한 시기 전세계 언론을 탄 크메르 루주군의 폴 포트 인민 재판과 다를 바 없었다. 60여 명에 이르는 은행과 종합금융사 대표는 김선홍 기아그룹 회장을 불러 앉혀 놓고 일방으로 몰아붙였다. 궁지에 몰린 김선홍 회장은 말 그대로 ‘한번만 봐 달라’는 말을 연신 거듭했다.

그러나 그 말을 고분고분 들어줄 금융기관 대표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가 경영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무조건 물러나야 한다는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다. 이런 방침은 7월30일 첫 대표자 회의가 열리기 이틀 전 주요 채권 은행 대표들이 모여 대책을 사전 조율하는 자리에서 확정되었다.

김회장은 당장 물러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첫번째 회의에서 집중 난타를 당하고 회의 장소인 은행회관(서울시 중구 명동)을 빠져나가는 데도 큰 곤욕을 치른 그는, 8월1일 열린 두번째 회의에서는 약간 나아 보였다. 전날 현대와 대우가 기아 계열사 가운데 부실 규모가 가장 큰 기아특수강을 공동 경영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청와대·경제 부총리도 ‘퇴진’ 요구

첫번째 회의 때와 달리 순순히 기자들의 취재에 응한 그는 “경영 정상화가 되지 않을 경우 퇴진하겠다는 경영권 포기 각서를 제출했으며, 이를 보완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시중에 떠도는 제3자 인수설에 대해서는 한마디로‘착각은 자유’라는 말로 응수할 정도로 꽤 여유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기아의 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의 권우하 상무는 어떤 일이 있어도 김회장의 사표와 이에 대한 공증을 관철하겠다는 뜻을 분명히했다. 어쨌든 김회장 퇴진 문제는 기아그룹 처리와 관련해 가장 핵심적인 주제가 될 것임이 분명해졌다.

지난 7월15일 제일은행이 기아그룹 주요 계열사를 부도유예협약 적용 대상으로 선언하기 직전까지도, 김회장은 금융기관 대표들이 자기에게 등을 돌릴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기아 계열사 사장을 지낸 한 인사는 “김회장은 제일은행장으로부터 더 지원해 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으나,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한국의 대표적 전문 경영인이라는 상징적 존재인 자신이 있는 한,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는 않으리라고 판단했다는 얘기다.

김회장이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확인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제일은행의 선언 이후 기아그룹 회생을 논의하기 위해 청와대와 협의하는 과정에서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이 김회장 퇴진을 완곡하게나마 거론했기 때문이다. 면담을 마치고 나온 뒤 김회장은 기아그룹 관계자들에게 “결국 나더러 나가라는 얘기더구만”이라고 되뇌임으로써 비감한 심정의 일단을 드러냈다. 강경식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제일은행의 선언 직후 김회장이 한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기아가 어려워진 것은 외부의 음모 세력 탓’이라고 한 것을 두고 매우 노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회장이 경영 실패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지는 못할망정 남 탓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김선홍 회장으로서는 그동안 든든한 후원자라고 믿었던 금융기관과 정부 관료들이 일순간에 모두 적으로 돌변했다는 사실을 실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회장은 그가 즐겨 쓰는 표현 그대로, 여전히 기아그룹의‘대표 사원’이다. 그는 15년 가까이 재계 서열 8위인 기아그룹을 이끌어 왔다. 창업주나 그 후손이 아닌 전문 경영인으로서, 무엇보다도 고사(枯死) 직전까지 갔던 국내 2위 자동차 업체를 봉고 신화를 통해 구해낸 인물이다. 이 때문에 그는 국민에게는 ‘대표 경영자’이기도 했다. 그에게 ‘한국의 아이아코카’라는 애칭이 늘 따라붙었던 것도 바로 그의 이런 상징성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김회장에 대한 금융권·정부의 인식과 보통 사람들이 가진 이미지 사이에는 왜 이렇게 큰 간극이 벌어졌을까. 도대체 기아에서는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특수강 설비를 고향으로 옮긴 까닭

우선 김선홍 회장 퇴진 요구의 직접 원인이 되는 경영 실패 문제. 기아그룹이 몰락하게 된 주요 원인은 피상적으로 보면 제2 금융권이 자금 회수에 나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나, 구조적으로 보자면 계열사 가운데 하나인 기아특수강의 경영이 매우 부실했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지난해 그룹 전체 적자액의 68%인 8백79억원을 손해 보았으며 3년간 적자 누적액은 2천억원에 달했다.

기아특수강에 대한 투자 타당성 문제는 이 회사가 92년 서울에 있는 특수강 생산 시설의 제강 능력을 두 배 이상 늘려 전북 군산 지역으로 확장·이전할 때 제기된 바 있다. 당시 특수강 산업은 국내 최대 비철제조업체인 삼미특수강이 설비를 확장해 공급 과잉 기미가 있었다. 그러나 김선홍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은 특수강 경기를 낙관했으며, 그후에도 군산 공장 설비를 계속 확장했다(96년 말 현재 72만t). 여기에는 1조원이 투입되었다.

기아그룹 내부에서는 기아특수강에 대한 공격적 투자를 김회장의 출신지(전북 익산)와 연결해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전 당시 상황을 잘 아는 기아그룹의 한 관계자는 “족벌 경영인이 고향을 배려하는 것이야 미담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전문 경영인이 취할 자세라고는 볼 수 없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룹내 일부 소장파 경영진과 관리직 사원들은 지난해부터 특수강을 매각하라는 건의를 제기해 왔다(실무자 10여 명이 김회장 집으로 몰려가기까지 했다). 김회장이 이를 묵살한 배경 역시 출신 지역에 대한 배려에서 찾는 이들이 많다.

지난해 초부터 특수강의 부실화는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심해진 것으로 보인다. 가동률은 50%대로 떨어졌고, 95년까지 3년 동안의 적자 총액이 1천4백억원에 육박했다. 당시 기아그룹의 경영 상황을 평가한 외국 증권사의 한 신용분석가는 “특수강 업계의 기업 여건이 극도로 악화하고 있으며, 기아는 삼미보다 더 나쁘다고 판단한 적이 있다”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삼미가 부도를 낸 뒤에도 기아가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해 총체적 대응을 하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기아그룹은 계열사인 아시아자동차가 1차 부도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벌어지고 난 지난 6월23일에야 자구책을 내놓았다.

무엇보다도 자동차 전문 그룹이라는 이름이 무색해질 정도로 주력 업종을 여러 가지로 벌여 놓은 데 대해 김회장이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기아산업(90년에 기아자동차로 변경)을 모체로 한 이 그룹은 김회장 체제에서 철강·무역·건설 업종 등을 망라한 28개 계열 기업군으로 바뀌었다. 그가 경영권을 맡기 전인 70년대에도 기아는 일부 자회사를 인수하거나 설립했지만, 모두 자동차와 관련 있는 업체들이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기로 하고 기아 문제에 대한 인터뷰에 응한 재경원의 한 고위 관계자는 “김선홍 회장은 다른 재벌의 무리한 선단(船團)식 경영을 흉내내다 기아그룹의 부실을 자초한 만큼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망한 회사 다녔던 아버지가 되고 싶은가”

기아그룹 내에서 김회장의 위상이 어떤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기아의 경영권을 장악하게 되었는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44년 김철호씨가 경성정공이라는 이름으로 창업한 기아산업은 80년대 초반 석유 파동과 경제 불안의 여파로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82년 2월께는 2세 경영인이던 김상문씨가 자기가 보유한 주식을 쌍용그룹에 처분하려는 움직임마저 보였다.

이를 막은 것이 기아 사원들이었다. 특히 당시 일부 소장 임직원들은 2세 경영인을 상대로 한 설득 작업에 성공했다. 이에 따라 김상문 전 회장은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떠나면서, 보유 주식에 관한 일체의 권리를 위임한다는 증서와 김선홍 기아기공 사장을 모기업인 기아산업 사장(회장은 민경중 아시아자동차 사장)에 임명한다는 밀지(密旨)를 남겼다. 공채 1기인 김선홍 신임 사장은 당시 기아 임직원 대부분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던 터였다.

그는 사장으로 취임하자마자 모든 임직원을 모아 놓고 사사(社史)에 기록될 만한 명연설을 했다. ‘망한 회사에 다녔던 아버지로 기억되고 싶으냐’는 요지의 이 연설은 구사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기아는 82년부터 흑자로 돌아서는 대반전을 이루었다. 이는 당시 승용차 생산이 금지되어 있던 이 회사가 봉고라는 승합차를 만들어 대인기를 끈 덕분이기도 했으나, 크게 보자면 자동차가 본격 보급되기 시작했고, 경제 회생에 적극적인 5공화국의 시대적 분위기 덕도 있었다.
자본금 수십 배 증자…‘실권주 행방’에 의혹

김선홍 회장은 회사 규모를 급격하게 확장하는 과정에서 자본금 규모를 수십 배 증자했는데, 이는 창업주 후손들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잇단 증자로 창업주 후손들의 지분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증자 과정에서의 실권주(失權株) 행방을 둘러싸고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현재 김상문 전 회장은 신병을 치료하며 해외에 체류하고 있다. 그의 장남(김석환씨)은 기아 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2남인 김주환씨는 <시사저널>과 가진 전화 통화에서 “회사가 뒤숭숭한 마당에 과거 얘기까지 재론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서 당분간 우리 가족은 함구하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그의 말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이 문제는 언제고 다시 불거져 나올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김선홍 회장은 87년을 고비로 강력한 1인 지배 토대를 완성했다. 여기에는 회사를 살린 것도 키운 것도 김회장이라는 사실을 자타가 공인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현재는 이런 점이 오너 1인의 결정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여느 재벌이나 다를 바 없는 경영 유형을 낳았다고 자성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김회장은 출근길 차안에서 포스트잇(소형 메모지)에 현안에 대한 아이디어를 적어 비서진에 건네곤 한다. 그러면 그것은 기안이나 결재에 우선하는 회장의 결정 사항이 되곤 했다.” 기아그룹 한 관계자의 말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전문 경영인이자 자동차산업의 대부로서 김회장은 지나치게 정치적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이는 우리 기업주들의 고질적 병폐이기는 했으나, 김회장의 경우는 전문 경영인으로서 취약한 입지를 강화하려는 동기가 더 크게 작용한 듯하다. 김영삼 정부 들어 관계가 악화했다는 관측도 있었으나, 김회장 자신은 오히려 최소한 두 번 이상 경제 부총리 하마평에 오르내렸다. 진원지를 알 수 없는 이 풍문에 대해 김회장은 ‘설령 제의를 받더라도 기아를 떠나지 않겠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그는 6공 당시 집권 여당의 영입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밖에 기아그룹 안팎에서는 김회장이 필요 이상으로 언론계와 정치권 관리에 공을 들여 왔다는 얘기도 나돈다.

이런 분위기에서도 기아그룹 내부에서는 김회장 퇴임이 몰고 올 파장 때문에 공식 비판은 삼가고 있다. 기아자동차 노동조합 고용곤 사무국장은 “제3자 인수를 막기 위해서라도 김회장 유임이 필수다”라고 주장한다. 평소 기아그룹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던 김회장의 소신대로라면, 다행스런 상황 전개인 셈이다. 그러나 기아그룹 일각에서는 ‘기아 살리기’가 곧 ‘김선홍 살리기’와 동일시되는 것 자체가 기아가 정상적인 전문 경영인 체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고 보기도 한다.

어떤 주장에 더 귀를 기울이더라도 상관 없다. 김선홍 신화를 만드는 데 일조했던 정부와 금융권은 이제 전문 경영인으로서 김선홍 회장에 대해 과거와는 180도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러고 보면 신화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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