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교육 천리길, 첫걸음부터 ‘캄캄’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1996.07.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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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교사·예산 태부족, 교육 방향·수준도 논란…“성인도 성교육 받아야”
 
“스물한 살 난 여대생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성폭행을 당할 뻔했어요. 물론 처녀란 것은 확실합니다. 도망쳤거든요. (중략) 지금까지 수많은 남자를 만났지만 한 달 이상 사귄 남자가 없을 정도입니다. 걱정이 돼서, 아니 죄책감 때문에 정말 사랑하는 남자에겐 냉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화방송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 <내일로 가는 밤>에는 이와 비슷한 내용의 편지가 1주일에 서른 통 이상씩 날아든다. 매주 목요일 방송되는 성(性) 상담 코너 ‘코드명 S’의 인기 카운셀러 이명화 실장(YMCA 청소년상담실)에게 전해 달라는 편지들이다. 개중에는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자기 가슴을 만진 뒤 남자가 불결하게 느껴지고, 사귀던 남자 친구와 첫 키스를 한 후 그 자리에서 토했다는 여대생의 편지도 있다.

그런가 하면 서울 강남의 한 여자중학교 교사는 얼마 전 학생들에게 글짓기를 시키다가 충격적인 일을 겪었다. 주제는 최근 빈발하는 청소년 성폭력 사건에 대해 또래로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글짓기를 하는 동안 교실을 돌던 이 교사는 한 학생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학생은 이른바 ‘빨간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외설스런 글을 써서 친구들과 몰래 돌려보던 중이었다. 평소 모범생으로 귀염받던 여학생이었다.

어린 시절 추행 당한 경험 때문에 남자를 기피하는 여대생과 ‘온갖 방식의 성기 결합’을 난폭하게 묘사하는 여중생. 오늘의 청소년은 이 위태로운 간극을 넘나들고 있다.

 
피임, 가르칠 것인가 말 것인가

90년대로 넘어온 뒤 80년대에 비해 성 관련 범죄는 5.5배가 늘어난 상황이다(한국성폭력상담소 자료). 이러한 ‘성문화의 총체적 위기’ 속에서 청소년은 성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크며, 동시에 성폭력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 또한 큰 집단이다. 이같은 위기의 상당 부분은 무지에서 기인하며, 따라서 실질적인 성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 교육·여성계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국회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신낙균 의원(새정치국민회의)은 “성폭력특별법을 강화하고, 성폭력을 낳는 근본적인 문제인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을 추진하는 등 사회 전반의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라면서, 그러나 이같은 법적·제도적 개선은 성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단기 처방에 그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성교육 강화를 위해 어떤 방식을 택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서울시 교육청이 현재 추진하고 있는 것처럼 성교육을 독립된 과목으로 분리하려는 방식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는 시각도 있다. 최보문 교수(가톨릭의대·신경정신학)는 “일부 뜻있는 학교의 요청을 받고 성교육 강의를 나가려 해도 마땅한 교재를 찾지 못해 맥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라며, 교육부가 성교육 강화 방침을 확정할 경우 교재 편찬과 교사 양성에 예산을 최우선으로 배분하라고 요구한다.

현재 시중에는 성교육용 비디오 30여 종이 나와 있다. 이 가운데 국산은 생물학적인 성지식을 단순하게 전달하거나 순결 교육을 강조하는 데 치우쳐 있고, 외국 번역물은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내용이 가끔 눈에 거슬린다고 최교수는 지적한다. 최근 교사들이 하루 서너 명씩 YMCA 청소년상담실에 와서 비디오를 빌려 갔다는 일화는, 우리의 열악한 학교 성교육 실태를 돌아보게 한다.

성교육의 수위를 어디까지로 정할 것이냐도 논란이다. 외국처럼 피임 기구 사용법까지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장영복 부소장은, 아무리 잘됐다고 평가 받는 외국 성교육도 그것은 우리보다 ‘높은 수준’이 아니라 ‘다른 수준’이라는 시각에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성 의식 향상되자 성폭력 대상 청소년·어린이로

성폭력 예방 교육을 성교육에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 또한 만만치 않다. 심영희 교수(한양대·사회학)는 한국 사회의 성범죄 증가 추세가 구미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경우 60년대 말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가 제기된 데 이어 70년대 중반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성폭력이 최대 이슈로 떠올랐다.

이는 성폭력에 대한 사회 인식이 바뀌면서 ‘가정의 틀을 벗어나지 않게끔’ 억압되었던 문제가 사회적 공론의 장으로 나오게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동시에 여성들의 의식이 향상되면서 성폭력 가해자들이 약한자 곧 어린이·청소년에게 눈을 돌리게 된 측면 또한 크다. 우리의 경우 80년대에 성폭력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데 이어 이제 막 유아·청소년에 대한 성폭력이 문제되기 시작하는 시점이므로, 이에 대처하는 교육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 심교수의 지적이다.

여기 덧붙여 최보문 교수는 청소년뿐 아니라 성인도 성교육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에 대해 사회가 바른 시각을 가지게 될 때 청소년 성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교수는 학부모의 경우 자녀의 성적 성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임으로써 자녀들이 ‘내부적으로 성적 에너지가 꿈틀대면서도 겉으로는 순진무구한 만년 어린애처럼 굴어야 하는’ 갈등을 겪지 않게끔 도와야 한다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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