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自己愛가 그들을 살렸다
  • 전상인 (한림대 교수·사회학) ()
  • 승인 1995.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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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 ‘욕심에 찌든’ 기성세대와는 다른 면모…규범적 신세대론에 자극
어지럽고 복잡한 것은 무너진 삼풍백화점의 잔해만이 아니다. 어렵고 힘든 것이 생존자를 찾아서 콘크리트더미를 헤치고 엉킨 철근을 풀어가는 작업만은 아니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마치 고생스러운 배낭 여행 정도 다녀온 것처럼 말하는 박승현·유지환 양과 최명석군의 환생기를 이해하는 것 역시 어지럽고 복잡하고, 또한 어렵고 힘들기가 마찬가지다. 어리다고 할까 단순하다고 할까, 솔직하다고 할까 대담하다고 할까. 도대체 이들은 누구인가?

세간에는 대형 백화점 붕괴라는 희대의 참사에 어울리지 않게 때아닌 신세대 논쟁이 화제다. 대부분의 언론은 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신선한 충격’이라 말하고 있다. 그동안 박한상군과 지존파, 혹은 오렌지족과 폭주족을 지목하면서 신세대를 사회의 일탈자로 치부해 왔던 이들이 갑자기 ‘X세대의 긍정적인 특성’을 거론하면서 ‘신세대 만세’를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전문가’들은 X세대 특유의 강점이 아닌 한국 가정의 전통적 규범 의식이 두 젊은이를 살렸다고 반박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세 사람 모두 평소에도 착하고 성실했을 뿐만 아니라 효심이 남달랐다고 하는 한국 저널리즘의 상투적 습관이 가세한다.

섣부른 ‘X세대 만세’는 금물

어느 쪽이 사실이든, 이번 기회에 보다 더 쉽게 이해되는 것은, 오랜 궁리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개념이 떠오르지 않아 어떤 새로운 연배를 그냥 ‘X세대’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이다. 어쩌면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X세대가 과연 실재하는가 하는 점에서부터 생각을 다듬는 것이 더욱 현명할지 모른다. 상업적인 목적에서건 정치적 목적에서건 X세대의 특징과 속성을 정의하는 것은 항상 그들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기성세대의 몫이었으며, 이때 그들의 언어와 행위는 이번의 박양·유양·최군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관찰자나 분석가에 의해 선택되고 증폭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왜곡되거나 창작되기까지 한다. 우리 사회에서 X세대의 이미지가 패륜아에서부터 영웅까지 다양하다는 사실은, X세대가 그저 담론으로서나 존재할 개연성이 높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세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모양이 아무런 세대론적 차별성을 보여주지 않는 것도 아니다. ‘졸리면 잤다’는 담백한 태도, ‘구해주려면 구해주고 말테면 말라’는 당당한 심경, 혹은 ‘내 이름을 바꿔 부르지 말라’는 차분한 주장 등은 비슷하게 절박한 상황에 처한 구세대에게서는 좀처럼 기대하기 힘든 것들로 보인다. 이는 신세대에게서 보다 더 뚜렷하게 발견되는 바, 일단은 그들이 삶을 더 긍정적으로 살고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언필칭 6·25를 겪고 보릿고개를 넘기는 동안, 살아 남는 것 그리고 잘 사는 일이 가장 소중했던 기성세대들은 대체로 삶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인생을 주로 오기에 가까운 욕심으로 살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세 사람은, ‘우째 이런 일이 하필 나에게’라는 식의 원망이나 비관 대신 주어진 상황을 담담히 수용했다. 그 역설적 결과가 오늘의 ‘인간 승리’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최군과 유양 그리고 박양이 삶에 대한 긍정적 태도를 내면화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세대 특유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조건 때문이었다. 경제적 풍요, 가치의 다원화, 문화적 다양성, 사회적 개방화는 개인의 삶과 운명을 과거처럼 어떤 절대적인 원칙이나 평균적 기준에 얽어매지 않는다. 신세대에게 인생이란 그다지 심각한 것이 아니며 개인적 차원에서의 자유와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그럼으로써 삶이란 투쟁과 부정의 대상으로부터 수용과 긍정의 영역으로 전화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신세대 의식이 막상 현실에서는 복합적으로 혹은 모순적으로까지 외화(外化)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세대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의 것으로 간주하는 한 그 모습은 ‘야타족’이 될 수도 있고 ‘효녀 심청’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최명석군이나 유지환·박승현 양의 생환을 계기로 하여 신세대 논쟁은 이제 새로운 단계에 진입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 방향을 여기서 미리 가늠할 수는 없겠다. 다만 지금까지 그들 또래를 획일적으로 범주화하고 규범적으로 평가하는 데 매진해 왔던 우리 사회의 상업적 문화주의와 도덕적 패권주의에게 만큼은 설 땅을 주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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