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게 광복은 파멸이었다
  • 丁喜相 기자 ()
  • 승인 1997.09.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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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준 후손들, 감옥·유랑 생활… 송돈호, 일본 영주권 얻으려 안간힘
구한말 이완용 내각에서 농상공부 대신과 내부 대신을 역임한 송병준은 1910년 일진회 총재 자격으로 한일병탄에 앞장선 인물이다. 그 공로로 송병준은 일본 정부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과 황실 및 국유재산 조사국 운영위원장을 지냈다. 현재 방방곡곡에 송병준 명의로 남아 있는 토지는 바로 이 기간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제의 보호 아래 부귀 영화를 누리며 식민지 침탈 정책에 앞장서온 송병준은 25년 뇌일혈로 숨졌다. 그가 사망한 뒤 귀족 작위와 재산은 아들 송종헌에게 습작·상속되었는데, 그 역시 친일파로 분류되고 있다. 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있으면서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한 송종헌은, 상속한 전국 각지의 송병준 토지를 관리하며 용인군 내사면을 무대로 하여 전국적인 세도가로 행세했다.

송병준의 손자 송재구씨는 일본에서 메이지 대학을 나온 뒤 30년대에는 홋카이도에서 ‘조선 목장’을 경영했다고 한다. 이번에 선대의 토지 재산 상속권을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밝힌 송준호씨와 송돈호씨는 바로 송재구씨(76년 사망)의 아들들이다.

민족에게 희망으로 찾아든 광복은 당대 최대 세도가로 행세하던 송병준 후손들에게는 파멸을 뜻했다. 송종헌씨는 광복 소식을 듣자마자 당시 손자 송준호씨와 살고 있던 용인군 내사면 추계리 99칸짜리 대저택과 인근 전답을 긴급히 처분하고 서울로 피신했다. 그러나 그는 48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1년간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49년 뇌일혈로 사망했다. 당시 서울 계동에서 조부 송종헌 내외와 함께 살았던 송준호씨는 이후 실의에 빠진 채 방탕한 유랑 생활로 인생을 보냈다고 한다.
송돈호 “일본의 증조부 땅 되찾겠다”

일제 때부터 유복한 생활을 해온 그는 하루아침에 찾아든 엄청난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폐인처럼 떠돌이 생활과 감옥 생활을 거듭했다고 회고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세상을 등지고 떠돌던 송준호씨는 95년부터 기독교 선교단체가 운영하는 경기도 하남시 감북동 ‘베데스타의 집’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해방둥이로 태어난 송돈호씨는 호적상 송준호씨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 그러나 부친 송재구씨가 부인을 4명이나 두었던 관계로 이들은 배다른 형제이다.

송돈호씨는 그동안 자기가 벌인 토지 상속 소송 사실이 언론에 알려진 뒤 매국노 후손이라는 손가락질과 수모를 가장 많이 받은 후손이다. 현재 서울 역삼동에서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송돈호씨는 4시간에 걸친 기자와의 인터뷰 끝에 “나는 현재 몇몇 단체에 기증한 인천시 산곡동 땅 16만평에 대한 소송을 제외하고는 전국 각지의 증조부 명의 토지 재산 상속권을 국가가 처리하라고 일임한 뒤 일본으로 건너갈 생각이다”라고 밝혔다. 자식들에게 더 이상 친일파 후손이라는 오명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일본행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일본 영주권을 취득하려고 오래 전부터 일본을 오가며 준비해 왔다는 송돈호씨는 “내년이면 국내에서 매국노 후손 송돈호가 땅 찾는다는 뉴스는 없어질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일본을 자주 찾는 이유에는 영주권 취득 외에도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개화파 김옥균 선생과 송병준을 연구하는 일본인들의 모임에 참석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또 증조부 명의로 일본에 남은 막대한 토지 재산 상속을 추진하는 것도 그가 일본에서 살고자 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이에 대해 송씨는 “일본 법률로는 증조부 명의 재산이 있으면 내가 상속받을 수 있다. 중국인들도 그런 재산을 되찾은 선례가 많다. 그러나 아직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없다”라고 밝혔다. 국내에 있는 송병준 명의 토지의 상속 지분권자는 준호·돈호 형제와 바로 아래 동생 중호씨 외에도 박창복씨(송돈호씨 생모) 및 박씨의 딸들인 순호·정호·승희 씨 3자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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