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의 본거지 부여의 민심
  • 丁喜相 기자 ()
  • 승인 1995.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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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사람들 “밉지만 한번 더 밀자”…JP, 대권 의지 내보이며 바람몰이
인구 12만명이 사는 충남 부여군은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고향이자 정치 아성이다. 민자당 탈당 이후 정치적 재기를 노리는 김총재에게 요즘 부여는 각별한 곳이다. 그는 부여군지구당 창당대회를 열어 자신이 지구당위원장을 맡은 지 1주일 만인 지난 4월25일 고향 부여를 다시 찾았다.

초조감마저 엿보이는 김종필 총재의 장기간 고향 나들이 목적은 물론 바람몰이이다. 그는 부여군내 18개 읍면을 빠짐없이 돌면서 가는 곳마다 `‘JP바람’을 호소했다. 중간에(4월27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대의원 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자민련 대전·충남 지부 창당대회조차 그에게는 잠시 고향을 벗어나는 막간의 행사일 뿐이었다.

김총재의 바람몰이는 4월25일 부여읍에서부터 시작됐다. 이 날 부여 청소년수련회관에 6백여 주민이 모인 자리에서 김총재는 “고향인 부여에서 12만 군민이 돌똘 뭉쳐 저와 정치적 생사고락을 같이하겠다는 뜻을 모아주십시오. 부여가 그렇게 되면 그 바람이 공주 서천 보령 논산 서산 당진 온양 천안 조치원 금산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질 것입니다. 나아가 대전광역시로, 충북과 전국 곳곳으로 뻗어가 앞으로 있을 몇 고비 선거를 넘기면 저의 소망이 이루어질 것입니다”라고 호소했다.

이어서 그는 부여군 초촌면을 시작으로 나흘 동안 17개 면소재지를 순회하는 과정에서도 표현은 약간씩 달랐지만 고향이 `JP바람의 진원지가 돼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가는 곳마다 약 2백~3백명이 주민이 모였는데 그는 그 자리에서 바람몰이를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번 선거는 내년 총선의 기반이고, 내년 총선은 다음에 있을 더 큰 선거의 기반입니다. 고향에서 의지를 확실히 보여줄 때 제가 큰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초촌면 연설)

“저는 이제까지 그저 2인자, 3인자 자리에서 윗분 모시며 정열을 불살라 왔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1인자 자리에서 정열을 불살라 봉사해야겠다 맘먹고 이렇게 고향 주민들에게 부탁드리러 왔습니다.”(규암면 연설)

‘녹색 태풍’의 눈으로 떠오른 부여

“YS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놨더니 그 뒤부터 사람이 변하더군요. 걸핏하면 어제를 욕하고, 인사가 만사라면서도 곳곳에 가신들이나 집어넣고, 그래서 나라 꼴이 엉망이 돼 도저히 같이 못하겠다고 나왔습니다. 배곯고 있는 나라를 31년 동안 이렇게 발전시킨 사람들을 욕하는 YS는 삽질 한번 안해본 사람입니다. 제가 곤란한 상태에 있다가 고향분들이 저를 지켜 주셔서 오늘 이렇게 섰습니다. 마지막 한 가지 남은 일을 맡아 고향과 나라를 위해 보답할 테니 저의 근원인 여러분들이 뭉쳐 주십시오.”(외산면 연설)

87년 이후 각종 선거 때마다 그가 고향에서 얻은 득표율은 70~80%에 달했다. 때문에 새삼 고향 구석구석을 누비는 그의 강행군은 단순한 지지 확보 차원이 아니었다. 차기 대권 의지까지 내보이며 고향을 `‘녹색(자민련 상징색) 태풍’의 눈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그만큼 민자당 탈당 이후 그가 처한 절박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김총재의 호소를 듣는 주민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이다. 동원된 당원들의 경우 한결같이 ‘충청도가 똘똘 뭉쳐 현정권에 본때를 보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일반 참석자들은 김총재가 피력하는 차기 대권 의지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들도 고향을 찾아와 안타깝게 호소하는 김총재의 말년 정치운에 동정을 감추지는 않았다.

못자리를 설치하다 말고 연설회장에 들렀다는 초촌면 김종대씨(48)는 “호랑이도 죽을 때는 고향으로 기어들어온다는데 김영삼 대통령에게 당하고 고향에 찾아와 저렇게 호소하는데 안 받아줄 사람이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한다.
김종필 총재에 대한 부여 군민들의 일반적인 정서는 한마디로 ‘애증’이다. 이것은 그가 그동안 고향과 맺어온 정치 인연을 그대로 반영한다. 김총재는 26년 부여군 규암면 외리 2구(돌말)에서 태어났다. 당시 부친 김성배씨는 규암면장이었는데, 얼마 후 부여면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부여 읍내로 이사해, 김총재는 부여에서 중학교까지 마치고 공주고교를 나왔다.

청년 김종필이 부여와 정치적 인연을 맺은 것은 5·16 쿠데타 직후인 63년에 실시된 6대 국회의원 선거였다. 35세 젊은 나이로 5·16을 주도한 김종필은 이때 고향에서 압도적 지지로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바로 그 해에 공화당 의장이 되었다. 재선 후 68년에는 3선 개헌 반대편에 섰다가 의원직을 사퇴했는데, 이 무렵부터 그는 지역구를 형 김종익씨에게 물려주었다. 그후 김종필씨는 전국구나 유정회 의원 신분으로 등원했다. 공화당 시절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은 2인자로서 국무총리까지 올랐지만 79년 10·26사건 후 신군부에 의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뒤 88년 13대 총선 때 정치 일선에 다시 나선 김씨는 고향을 기반으로 잡았고, 이때 부여는 대전·충남을 휩쓰는 ‘JP바람’의 진원지가 됐다.

JP가 한 일은 백제교 건설 하나 뿐

이처럼 JP가 중앙 정치 무대에서 화려한 활약을 보인 과정은 고향인 부여 주민들에게는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안겨주는 과정이기도 했다. 부여에서는 보기 드물게 중앙 정치 무대에 ‘거물’을 배출했다는 자부심과 함께, 그가 고향 부여를 위해 해준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배신감’을 동시에 키웠던 것이다. 대부분의 군민들은 고향을 위해 김총재가 해놓은 일이 백제교(백마강 다리)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기억한다.

김총재에 대한 부여 군민들의 원망은 지역의 특수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백제의 마지막 고도로서 문화 유적이 풍부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고도 경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방치해 옴으로써 낙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 그것이다. 부여읍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이자성씨는 “아무리 전쟁에 패망한 백제라지만 3국 시대 수도 중 부여만큼 초라하게 방치한 곳은 없다. 문화 유적이 도처에 있기 때문에 그게 발굴·복원되기를 지난 30년간 기대해왔으나 지금까지 이뤄진 것이 없다. 그 과정에서 60년대에는 20만명에 이르던 인구가 지금은 4만명으로 줄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인근 논산에도 대학이 들어서고, 충남에서 가장 오지로 알려진 청양군조차 97년도 전문 대학 개교를 내다보고 있는데, 역사·문화 도시라는 부여에는 전문대 하나 없다는 사실이 낙후성의 상징처럼 거론되기도 한다.

바로 이런 지역 실정이 김총재에 대한 원망과 배신감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총재도 이런 여론을 의식한 듯 군민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에 대한 변명을 내놓기도 했다. “옛 공화당 정권이 신라의 고도 경주에 이어 80년대에는 백제의 고도인 이곳 부여를 대대적으로 개발할 계획이었는데 5공화국 출범으로 무산됐다.” 그는 민자당을 탈당하기 전 자신이 대표로 있을 때 부여가 백제문화권의 특정지역으로 고시된 점을 강조하며, 만년 2인자 자리를 벗어나 1인자가 될 때 고향을 위해 진정으로 보답할 수 있음도 내비쳤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총리 출신이라 국립묘지에 묻힐 수도 있지만 고향 부여에 묻히겠다고 강조함으로써 그에 대한 부여 주민의 원망을 차단하려 안간힘을 쏟기도 했다.

어쨌든 JP에 대해 실망을 느끼는 부여 군민들도 그가 최근 처한 정치적 곤경과 ‘마지막 기회’ 호소 앞에서는 “다시 한번 밀어보자”는 쪽으로 뭉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부여에서는 YS가 JP를 내몬 것이 곧 충청도의 자존심을 짓밟은 것이라는 분노가 팽배했다.

그같은 여론은 JP 진영이 부추기는 측면도 엿보였다. ‘충청도는 핫바지’ ‘멍청도’ 등의 용어가 주민들 사이에 분노의 대명사로 회자되었고, JP를 중심으로 뭉쳐 충청도의 자존심을 살리겠다는 오기로까지 이어지는 분위기였다.

김총재가 고향을 태풍의 눈으로 삼아 전국으로 확산하고자 하는 바람몰이 작전이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속단하기는 이르다. 그러나 적어도 부여에서만큼은 그 작전이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지난 14대 대선 때 김대중 후보 지지운동을 벌여 부여 8만 유권자 중 1만4천여 표를 얻는 데 일조했던 충화면 충화국민학교 유영빈 교사(49)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같은 주민 정서에서는 JP가 지난 87년 정치를 재개한 이래 이번 선거에서 자민련 후보 표가 가장 많이 나올 것 같다. 옛날에 야당 성향이던 사람들도 JP 동정론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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