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 선거는 텔레비전 손 안에 있다
  • 徐明淑 기자 ()
  • 승인 1995.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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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 토론회 개최 각축전… 후보들도 ‘안방 승부’ 전력 “기획 프로 빈약하고 왜곡·편파 여전” 비판도
“정치는 이제 더 이상 의회가 아니라 텔레비전에서 벌어지고 있다.”(요세프 클라인)

정당보다는 후보가, 후보보다는 언론이 주도하는 현대 정치의 양상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요즈음 한국에서도 ‘선거전이 유세장이 아니라 텔레비전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전개되고 있다. 수많은 유권자들이 선거가 시작되기 전부터 텔레비전 수상기 앞에 몰려들고 있고, 동네마다 직장마다 ‘어제 텔레비전에 누가 나왔더라’ ‘내일 어떤 후보가 나온다더라’는 것이 주요한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 ‘정치 보도에 관한 한 텔레비전보다 한 수위’라고 자부해온 신문 매체조차 이 엄연한 현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신문마다 후보 토론회가 텔레비전에 중계된 뒤 지지율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보도’하기에 바쁘다. 대다수 후보들은 선거 전략에서 텔레비전 전략을 사실상 최우선 순위로 삼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가.

“신문보다 TV가 더 위력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방송사 간의 사운을 건 경쟁이 작용했다. 이번 선거전에서 유권자를 텔레비전 수상기 앞에 끌어당긴 최초의 이벤트는,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이 주관한 서울시장 후보 3인 초청 토론회 녹화 중계(5월 23~26일)였다. 그러나 방송 3사는 외부에서 마련한 이 계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더욱이 관훈토론회는 후보를 따로 따로 부르는 방식이어서 한계가 지적돼온 만큼, 방송 3사는 후보 동시 토론회를 성사하기 위한 경쟁전에 일찌감치 돌입했다. 14대 대통령 선거전 때 후보 동시 초청 토론을 기획해 놓고도 김영삼 후보측의 완강한 거부로 뜻을 접었던 터라, 이번만큼은 어떻게든 성사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방송가를 지배했다.

첫 승자는 발 빠르게 ‘서울시장 세 후보 동시 초청 토론회’(5월 27일)를 해낸 공영 방송 KBS였다. 처음으로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방송가에서 뛰어난 방송 감각을 지닌 인물로 알려진 김병호 보도본부장. 개표 방송을 준비하고 있는 보도제작국이 진행 실무를 맡고, 보도국 정치부장이 세 후보 섭외를 책임졌다. 엄격한 보안 아래 마치 ‘작전’처럼 진행됐던 이 일이 성사되자, KBS 간부진은 승리의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양희부 보도제작국장은 “세 후보가 동시에 한자리에 모인 것은 선거 방송 최초가 아니라, 선거 보도 사상 최초의 일이다”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KBS측이 한 발짝 앞서 후보 토론회를 성사하자 MBC는 발칵 뒤집혔다. 방송사 내에서는 ‘최고 방송의 자부심이 손상되고 직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린 이 사태를 고위 간부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분위기까지 형성됐다. 5월30일 문화방송 공정방송협의회에서는 노동조합 간부들이 이례적으로 ‘서울시장 후보 토론회가 무산된 까닭’을 회사 고위 간부들에게 따져 묻는 일까지 벌어졌다. ‘선거 과열 보도를 자제해 달라’는 정부 쪽의 은근한 요구에 편승하다 보니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이 노조측 주장이었다. 이 자리에서 고위 간부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도 토론회 성사를 위해 애썼지만 이미 KBS측에 약속을 해놓은 한 후보 쪽에서 완강하게 거절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후보간 자유 토론회’를 먼저 유치하려는 2라운드 싸움에서는 뒤늦게 놀라서 덤벼든 MBC측이 승리했다. 후보 등록 개시일인 6월 11일 서울시장 후보 세 사람을 자유토론회장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MBC의 한 고위 관계자는 “KBS가 처음으로 후보 동시 초청 토론회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토론이라고 보기 힘들다. 우리 방송 토론회는 후보 간의 자유 토론인 만큼 한 단계 더 진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MBC는 지난 6월2일 9시 뉴스데스크 시간에 서울시장 세 후보를 불러내는 데 성공해 1라운드의 패배를 간접적으로 만회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후보들의 출연은 마치 생방송처럼 그럴듯하게 연출됐지만, 사실은 몇 시간 전에 녹화한 것이었다. 후발 주자인 SBS는 동시 초청과 자유 토론 어느 쪽의 기록도 세우지 못한 대신, 후보를 한 사람씩 불러내어 청문하거나 인천시장 후보 토론회를 시도하는 등 ‘접근의 차별화’에 주력하고 있다.

이렇듯 본격적인 선거전에 돌입하기 전부터 시작된 방송 3사 간의 치열한 대결은 선거 운동 기간의 유세 방송과 개표 방송에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14대 대통령 선거 때 이미 컴퓨터그래픽과 첨단 기술을 동원해 ‘최고 수준의 개표 방송’ 경쟁을 벌였던 방송 3사는 방송 사상 처음으로 4개 선거 결과를 동시에 보도해야 하는 이번 개표 방송을, 방송사의 축적된 기술을 십분 발휘할 최대의 기회로 여기고 있다. 각 방송사는 개표 방송 전략을 철저히 보안에 붙이고 있을 정도다.
유권자 30%가 ‘영상세대’

텔레비전이 선거전에서 위력을 떨치는 요인을 방송사 간의 경쟁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김재범 교수(한양대· 신문방송학)는 “대중 사회에서 방송매체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매체는 없다. 특히 선거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선거는 논리만이 아니라 감성까지 동원되는 행위다. 선거전에서는 시각을 통해 논리만을 전달하는 정적인 신문 매체보다는, 시청각을 통해 논리와 감성까지 전달하는 텔레비전이 훨씬 위력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텔레비전은 ‘체질적으로’ 선거의 속성과 잘 맞아 떨어지는 매체라는 것이다.

바쁜 시간을 쪼개 유세장까지 직접 가지 않으면 못 보고, 가더라도 자세히 볼 수 없는, 후보의 이마에 송송 맺힌 땀방울과 미묘한 억양까지 여과 없이 전달하는 텔레비전 방송의 위력은 시청자의 반응에서도 입증된다. 관훈토론회가 중계된 뒤 컴퓨터 통신에는 갖가지 ‘관전평’이 쏟아졌고, KBS ‘후보 초청 토론회’가 진행되는 동안 하이텔에 개설한 청취자 의견 난에는 담당자들이 비명을 지르리만큼 다양한 의견이 올라왔다. 이 프로그램을 진행한 보도제작국의 한 PD는 “패널들의 질문 수준에서부터 ‘패널들이 왜 그렇게 영어를 많이 쓰느냐’는 데에 이르기까지 반응이 대단했다. 텔레비전의 위력을 새삼 절감했다”고 말했다. 한 여론조사 기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관훈토론회를 시청했다고 답한 응답자 가운데 10% 가량이 ‘토론회를 보고 난 뒤 후보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텔레비전이 지니는 본질적 특성 외에 20대의 취향과 특성도 텔레비전이 위력을 떨치는 데 한몫 거들고 있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한국 유권자층의 30%를 차지하는 20대가 ‘컬러 텔레비전의 영향을 받고 자란 세대’라는 사실이 텔레비전의 영향력을 증폭시키고 있다고 진단한다. 코리아리서치센터 이흥철 이사는 “특히 20대의 정보 의존률은 전통적인 신문 매체보다 텔레비전이 훨씬 높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영상 매체에 익숙해진 세대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선거 변수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후보들은 자연히 텔레비전을 크게 의식하고 있다. 텔레비전 토론회나 녹화 방송이 있을 때마다 후보들은 방송사에 양복과 넥타이 색깔까지 자문을 구할 정도로 ‘화면에 잘 비치기 위해’ 애쓴다. 후보 유세 보도가 본격화하면, 텔레비전 화면을 감안한 후보들의 노력도 더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텔레비전 보도의 집중 표적으로 떠오른 서울시장 후보 ‘빅 3’ 진영은 승패의 관건이 텔레비전에 달려 있다고 판단하고, 저마다 그 대비책을 강구하고 있다(22쪽 상자 기사 참조).

그러나 정작 텔레비전이 그 위력만큼 제 기능을 다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가 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역기능을 하고 있다는 비판론마저 나온다.

우선 텔레비전이 지나치게 후보 중심으로 흥미 보도에 치우친 나머지 선거 그 자체에 대한 의미 있는 접근이나 기초적인 정보 제공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방송개혁국민회의 선거방송대책본부와 〈한겨레신문〉이 전국 15개 도시 7백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들은 ‘후보 중심의 흥미 보도’(34. .3%)와 ‘선거 관련 방송 시간 부족’(23.8 %)을 선거 방송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또한 응답자들은 방송을 통해 제공되는 정보량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41.5%가 부족하다고 대답했다.

이번 4대 선거는 60년 이후 35년 만에 자치단체장을 주민 손으로 뽑는 데다 달라진 통합선거법에 따라 치르는 첫 선거다. 방송이 지닌 공익성에 비추어 선거가 지니는 의미, 무엇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직선 단체장의 역할과 한계 등을 다루는 기획 프로그램을 제작해 보도해야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KBS가 ‘세계의 지방자치’ ‘선거법이 어렵다’ ‘각종 여론조사’ 등 일부 기획 프로그램을 내보낸 정도가 고작이다. 다른 민영 방송은 아예 그 정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지역 민방, 시청률 의식 ‘서울시장 보도’ 촌극도

이는 서울시장 선거 관련 보도량과 후보 초청토론회에 쏟은 각 방송사의 열의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MBC는 지나치게 적다고 지적되는 전체 선거 보도량의 28.1%, SBS는 21.2%, KBS는 7.8%를 각각 서울시장 관련 보도로 메웠다. 지역 민방에서조차 시청률을 의식해 ‘지역민과는 상관없는’ 서울시장 관련 보도를 내보내는 촌극까지 빚었다. 뒤늦게 지역 민방들은 해당 지역 단체장 토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지만, 실현 여부는 알 수 없다(18쪽 표 참조).

선거 기획 프로그램의 빈약함은 시청률만을 의식한 방송사의 상업주의와 지자제의 의미를 축소하여 열기를 가라앉히려는 정부의 분위기가 맞물려 나온 결과로 해석되고 있다. MBC 강성구 사장은 지난 5월 확대간부회의 석상에서 “지방 선거에 대한 의미를 과도하게 부풀리는 일은 결국 경제·사회적으로 심각한 후유증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KBS 역시 ‘조용한 선거 분위기’로 끌고 가야 한다는 기조가 지배하고 있다. KBS 보도국의 한 고위 간부는 선거 보도가 지나치게 적다는 지적에 대해 “정치에 관심이 없을수록 좋은 게 아니냐. 그래야 선진국으로 간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그러나 방송국 간부가 거론한 선진국 가운데 하나인 영국의 경우, 방송국들은 선거 기간에 돌입하기 전부터 지겨울 정도로 선거 관련 방송을 내보낸다. 다양한 유형으로 토론회를 마련하는가 하면, 매주 ‘의료’ ‘건강’ ‘교육’ 식으로 주제를 달리해서 각 정당의 정책 차별성을 부각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방송 3사가 6월 ‘보훈의 달’을 맞아 대대적인 보훈 특집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방송사의 고위 간부는 간부 회의에서 “6월을 맞아 우리의 안보 현실을 다시금 되돌아볼 수 있는 다양한 특집과 기획물을 준비했으면 한다”고 지시했다.

선거 앞두고 대대적 보훈 특집 준비 ‘눈길’

다른 방송사에서도 역시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지난해만 해도 6월에 방송 3사가 모두 6·25 특집 다큐멘터리나 드라마를 제외하면 눈에 띄는 편성을 별로 하지 않았었다.

MBC 최문순 노조위원장은 “시청률이 낮다는 이유로 선거 기획 특집을 마련하는 데 인색한 방송국측이 보훈 특집에는 지나치게 열성적인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민주당 박계동 의원은 “방송이 이번 선거를 6·25 마인드로 끌고 가느냐, 6·29 마인드로 끌고 가느냐에 따라 선거전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보훈 방송’이 6월 정국을 지배할 경우, 집권당인 여당 후보들에게 유리하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는 것이다.

위력을 가진 방송이 제 구실을 다하지 않는 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역기능을 하는 대목도 없지 않다. 선거 때마다 끊임없이 제기돼온 왜곡·편파 시비가 바로 그것이다.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왜곡·편파 시비가 완전히 사그러들지 않았다. 방송 전문가들도 후보와 관련한 보도나 후보 토론회 같은 직접 보도에서는 어느 정도 공정한 접근이 이뤄지고 있지만, ‘대구 참사 보도’ ‘민주당 돈봉투 사건’ 등 정치·사회 보도에서 드러나듯 ‘여당에 불리한 기사는 죽이고 야당에 불리한 기사는 살리는’ 왜곡된 관행은 아직 살아 있다고 진단한다. 방송개혁국민회의 선거방송대책본부는 집중적으로 모니터하여 왜곡 편파의 여러 유형을 지적하고 있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강명구교수(서울대·신문방송학)는 “선거전에서 방송의 비중은 나날이 증대되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방송사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 방송은 정치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것이 파행을 낳는 근본 요인이다”라고 지적한다.

선거전을 좌우하는 절대 권력으로 등장한 텔레비전. 그러나 이 거인은 아직도 정치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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