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뿔이 흩어질 민주당 잔류파
  • 吳民秀 기자 ()
  • 승인 1995.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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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속력 허약해 뿔뿔이 흩어질 가능성 높아
때때로 정치 지도자의 언설은, 그 ‘말의 전모’보다는 ‘여백의 실체’에 더 비중이 실리기도 한다. 언론도 늘 여백을 밝혀내는 데 힘을 쏟는다. 그래서 그런지 경륜이 쌓일수록 정치 지도자들은 침묵으로 말하는 법을 즐긴다. 이는 특히 김대중 이사장의 특기다. 정치 지도자들이 오랫동안 말을 아끼다가 던지는 단 한마디의 파급 효과는 엄청나다.

김이사장이 오랜 침묵과 장고 끝에 입을 열었다. 요컨대 민주당을 포기하고 신당을 만든다는 것이다. 지방 선거에서 대승을 거두고서도 김이사장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정치권과 언론은 말로 드러나지 않은 그의 생각의 갈피를 추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민주당에서는 ‘DJ의 이상한 침묵’이라는 얘기까지 나돌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김이사장이 말을 했기 때문이다.

이기택 총재 ‘정치 미아’ 위기

지금 민주당에서는 말이 넘친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신당 얘기다. 현재 민주당 의원들의 말에는 더 이상 여백의 미학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당 작업을 추진하는 동교동계와 민주당 잔류 쪽으로 마음이 기운 세력 간에 비난이 난무한다. 공식 석상에서는 한국 정치의 미래에 대해 나름대로 정세를 분석하는 따위의 고상한 말도 하지만, 사석에서는 상대방의 장래를 저주하는 인신 공격성 발언까지 서슴지 않는다. 어느 것이건 때가 때인 만큼 표현이 직설적이다.

김이사장이 신당 창당으로 가닥을 잡은 배경은 여러 가지로 거론되고 있지만, 동교동계 측근 의원들은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민주당에는 당을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 많다’는 점을 꼽는다. 즉 대권까지 내다보는 김이사장의 향후 행보를 위해 ‘내부 걸림돌’을 이 기회에 완전히 제거하겠다는 생각이다. 동교동이 신당을 창당하면 민주당내 반DJ 세력은 자동으로 떨어져 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동교동이 ‘당을 함께할 수 없는 사람’ 1순위로 꼽는 이는 이기택 총재이다.

지난해 말 12·12 군사반란자 기소 관철 투쟁 이후 사사건건 동교동과 대립해온 이총재는, DJ 신당설이 튀어나온 이후 여러 가지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총재는 처음에는 신당설을 자신을 주저앉히기 위한 압박용 카드로 이해했다. 그래서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고 응수했다. 짐짓 정통 야당의 법통을 이총재측이 차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DJ 신당설이 기정 사실로 굳어져 가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게 됐다. 요즘 이총재 진영은 의원이 몇명이나 신당으로 빠져 나갈지를 계산하면서 계보 의원들을 단속하느라 분주하다. 자칫하다가는 ‘정치 미아’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86년 신민당 때 양김에 반기를 들었다가 처절하게 몰락한 이른바 ‘이민우 파동’ 얘기가 이총재 진영에서 악령처럼 떠도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그렇다고 이총재에게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깨알이 백번 굴러봐야 호박이 한번 구르면 아무 소용없다’는 정치판의 생리를 7선 의원인 이총재는 체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이총재로서는 숨가쁘게 진행되는 신당 추진 작업을 지켜볼 도리밖에는 없다. 그에게는 신당 추진을 저지할 만한 힘이 없다.

이총재의 한 측근 인사는 “민주당이 선거에 패한 것도 아닌데 DJ가 신당을 만들겠다고 나선다면 국민적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게다가 구여권까지 끌어들여 대권을 장악하겠다는 속셈이다. 현재 이총재가 구사할 수 있는 전략은 정통 야당의 깃발을 지키면서 정치권 내에서 명분을 쌓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일단 신당을 흠집내고, 야권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공간을 확보하는 쪽으로 움직이겠다는 얘기다.

그러나 현재 야권에서 이총재의 공간은 지극히 협소하다. 민주당 잔류 세력들조차 이총재의 지도력에 강한 회의를 드러내고 있다. 이번 지방 선거를 거치면서 영남권 야당 세력에 대한 장악력도 현저히 떨어졌다. DJ 신당설이 나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민주당내 영남권 위원장들 사이에서는 ‘KT 몰아내기’ 연판장을 돌리자는 얘기까지 나왔었다.

이부영 부총재 ‘개혁 신당’에 기울어

지금 이총재에게는 힘이 없다. 정치판에서 힘이 없는 자의 무기는 ‘말’이다. 이총재는 “신당이 5·6공 세력을 영입하려고 나서고 있지만, ‘호남당’또는 ‘DJ당’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결코 성공하지도 못할 것이다”라고 동교동을 향해 험한 말을 퍼부었다. 앞으로도 “그동안 꾹 참았던 말을 쏟아내겠다”고 한다.

힘이 없기로는 잔류 쪽으로 마음을 굳힌 다른 세력들도 마찬가지다. 개혁 신당 세력인 정치개혁시민연합에 깊이 관여해온 이부영 부총재 역시 현재로서는 말을 앞세울 수밖에 없다. 이부총재는 민주당 총재단 회의에서 “신당 논의 중단을 결의하자”고 제안했지만, 동교동계로부터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그는 민주당보다는 개혁 신당 쪽에 마음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DJ 신당의 윤곽이 드러나면서, 반양김 정치 세력 결집을 표방하고 있는 개혁 신당에는 반사적으로 가속도가 붙었다.

지난 7월6일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정치개혁시민연합에는 많은 현역 의원이 얼굴을 내밀었다. 민주당의 이부영·이 철·장기욱·김원웅·박계동 의원, 자민련의 조순환 의원, 무소속의 서 훈 의원, 그리고 민자당의 손학규 의원이 그 면면들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개혁 신당 세력이 향후 정치권의 이합집산에서 또 다른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이번에 막강한 힘을 과시했던 20~30대 유권자를 의식한 몇몇 민주당 의원들의 합류도 예상된다.

반DJ 바람 때문에 초반에 선전하고도 부산시장 선거에서 패한 노무현 부총재의 거취도 관심거리다. 노부총재는 선거 기간에 DJ의 지역등권론을 정면으로 반박했고, 선거 직후에는 언론을 통해 동교동계 의원들과 설전을 벌였다. 노부총재는 “DJ 신당은 옳지도 않고 정치적 성공 가능성도 없다”면서 신당 참여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고, “지역 대결 구도를 막기 위해서는 YS와 DJ가 화해하는 길 뿐”이라며 양김 연대론을 펴기도 했다.

노부총재는 일단 민주당에 남을 예정이다. 그러나 이기택 총재가 이끄는 민주당에도 별로 기대를 걸고 있지 않은 눈치다. 신당 추진이 분명해지기 직전 노부총재측과 동교동측과의 접촉이 있었지만,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는 선에서 끝났다. 노부총재의 한 측근은 “노부총재 입장은 DJ도 아니고 KT도 아니다. 당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노부총재는 부산 지역에 뿌리를 내리는 데 진력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영남 야권의 새로운 주자로 떠오른 노부총재에 대해 김이사장은 ‘약간의 미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동교동 가신그룹은 노부총재를 ‘당을 함께 하지 못할 사람’으로 찍고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노부총재측도 마찬가지다.

현재 동교동계는 민주당 현역 의원 중에서 80여 명 정도가 신당에 합류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이기택계와 이부영 부총재, 노무현 부총재, 개혁모임내 일부 의원, 그리고 몇몇 전국구 의원의 민주당 잔류가 확실해 보인다. 잔류파는 대부분 지역구 사정상 내년 총선에서 ‘DJ당’ 간판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이다.

여하튼 이들은 반DJ라는 측면에서는 서로의 이해 관계가 일치하지만, 단일한 대오를 형성할 정도로 결속력이 강하지는 않다. 민주당 내에서는 “8인8색이라고 비판 받던 과거 꼬마 민주당 시절의 결속력조차 기대하기 어렵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꼬마 민주당 시절에는 이기택·노무현·이 철·홍사덕·박찬종·장기욱·장석화·김광일 의원이 모두 제 색깔을 지니면서도 한 울타리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정가에서 현재의 민주당 잔류파들이 끝까지 한 울타리에 남아 있으리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꼬마 민주당 시절부터 정치적 운명을 함께해온 의원들조차, 통합 민주당을 거치면서 서로 소원해졌기 때문이다. 이들 중에는 심지어 서로 적대적인 사이로 관계가 악화된 경우도 있다. 더구나 꼬마 민주당 때는 야권 통합이라는 적극적 목표가 있었지만, 지금은 ‘반DJ 신당’이라는 소극적 목표를 공유하고 있을 뿐이다. 김이사장의 마음이 떠나자마자, 민주당은 중심을 잃은 채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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