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혈맹이 아니라 경쟁국이다
  • 구종서 (삼성경제연구소 상무·정치학 박사) ()
  • 승인 1995.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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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우방, 영원한 적 없는 ‘정글의 법칙’에 예외 없어… 경제력 강화·균형 외교가 한국의 살길
우리 역사에서 미국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배신과 갈등의 순환적 반복이었다. 그 근원은 1866년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미국 상선 셔먼호가 미국 상품을 싣고 대동강에 들어와 평양에서 지방 관서를 상대로 통상을 하자고 강요했다. 그들이 조선 정부의 퇴각 명령을 거부하자 평양의 관민이 이 배를 불살라 선원들은 모두 사망했다.

1871년에는 군함 3척으로 구성된 미국 해군의 동양함대가 인천 앞바다에 침입하여 통상 교섭을 요구했다. 조선 정부가 불응하자 그들이 강화도를 점령하여 전쟁이 일어났다. 이것이 신미양요다.

미국이 저지른 최대의 배신은 1905년의 태프트-가쓰라 비밀 조약이다. 그것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이 양해하는 대신 미국은 일본의 한국 병합을 양해한다는 제국주의적 조약이다. 조선이 한창 수난을 당할 때 미국은 이처럼 한국을 주저없이 희생시켰다.

1919년 일제 지배 하의 한민족이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3?운동을 일으켰다가 일제에 무참히 진압됐다. 그때 이승만은 스승인 윌슨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여지없이 묵살됐다.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윌슨은 그 대학 총장이었다.

미국의 제1 목표는 예나 지금이나 ‘자국 이익’

6?5 직전 소련·중국·북한이 연합해 남침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된 상황에서 미국이 남한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하여 민족 내전의 참상을 부른 것도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배신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행위는 모두가 국가 이익을 기준으로 한 미국 대외 정책의 산물이다.

이처럼 미국은 자기네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동맹국을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나라다. 그런 행위는 같은 백인종 국가에 대해서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문화와 인종이 다른 동양 민족에 대해서는 아주 명백하게 되풀이해 왔다.

현재 미국 대외 정책의 목표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는 자국의 안전 보장이고, 둘째는 현재 확보하고 있는 세계 패권을 유지하는 것이며, 셋째는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력을 키우는 것이고, 넷째는 미국이 추구하고 있는 가치를 확산시키는 것이다.

첫째로 지적한 ‘안전 보장’은 비단 미국만의 국가 목표는 아니다. 그것은 모든 주권 국가에 공통된 목표이자 우선 순위가 가장 높은 국가 목표다. 미국의 경우 인접한 캐나다와 멕시코를 포함하여 북미·중미·남미 모두를 포괄하는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안전 보장의 대상 지역으로 삼고 있다. 대서양과 태평양 사이에 놓인 이 아메리카 대륙에 적대적인 세력이 침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미국 대외 정책의 목표이다.

둘째의 ‘패권 유지’는 소련이 무너진 이후 유일한 패권 국가가 된 미국이 현재의 우월적 지위를 계속 유지하려는 것을 말한다. 냉전 시대 미국의 주적(主敵)이던 소련이 붕괴함으로써 미국을 중심으로 단결돼 있던 서방 동맹 체제도 그 일체성이 이완되어 서서히 해체되어 가고 있다. 미국에 국가 안보를 의존하던 나라들이 미국의 보호 속에서 강화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이제는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려 하고 있다. 미국은 지금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시아의 중국과 일본, 유럽의 러시아와 독일(또는 유럽연합)을 계속 견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셋째의 ‘경제력 강화’는 패권 유지를 위한 필수 수단이다. 90년대 이후 국제 정치에서 경제력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소련 붕괴로 군사력의 비중이 축소되자 일본·독일 등 경제 강국들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지금 미국은 패권 유지를 위해 경제력 강화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미국이 대외 정책 중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중시하는 것은 바로 경제 부문이다.

넷째의 ‘가치 확산’은 문화 제국주의 현상의 하나이다. 미국은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 원리, 기본적으로는 인권 보장 원칙을 최고의 이상적 가치로 추구해 왔다. 미국은 이같은 가치를 실현할 공간을 국내에 한정하지 않는다. 이를 전세계에 확산시키고, 그런 가치가 유린되는 것을 저지하는 데 중요한 정책 비중을 두고 있다.

미국의 정책 목표(안전 보장·패권 유지·경제력 강화·미국적 가치 확산)와 정책 수행 원칙을 알면, 최근 미국이 취하고 있는 변화된 행동의 배경과 의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역내 국가들이 세력 균형을 이루어 서로 견제해야만 미국의 안전이 보장되고 국제 평화가 유지된다. 미국이 태평양공동체 결성에 그치지 않고 대서양공동체 결성을 추진하는 것은 그같은 외교 전략에서 나온 정책이다.

러시아가 무력해진 지금 미국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려면 이 지역의 만만찮은 나라들, 즉 중국·일본·한국을 적절히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무기가 중국에 대한 인권 압력, 일본에 대한 경제 압력, 한국에 대한 북한 카드이다. 한국·중국·일본은 최근 국가 경제력이 강화되고 동서 냉전이 종식되면서 미국에 대한 저항을 강화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국제 패권을 위협하는 심각한 도전이다.
높은 안보 의존도로 대미 관계 폭 좁아

한국의 약점은 남북 분단과 안보 의존이다. 미국은 북한과 화해하고 북한을 원조하여 한국을 견제해 나가고 있다. 이것은 한반도·한민족을 분리 지배(divide and rule)하는 방식이다. 이는 북한 카드를 써서 한국을 견제하려는 기도이기도 하다. 국가 안보를 미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대미 관계에서 선택할 폭이 아주 좁을 수밖에 없다.

미국은 그들의 국가 안보와 세계 패권 유지, 경제력 회복을 위해 필요하다면 한반도 분단의 영구화나 동맹국의 희생까지도 서슴지 않을 수 있다. 이미 우리는 태프트-가쓰라 비밀 조약이나 월남에서 미군의 일방 철수, 그리고 최근의 북한 정책 등에서 그러한 미국의 모습을 똑똑히 보아 왔다.

냉전이 종식됨에 따라 국제 관계도 변하고 있다. 과거의 동맹 체제·적대 관계가 근본적으로 수정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미국 국방대학 선임연구원 패트릭 크로닝은 “지금 우리(미국)는 북한과 유연한 동맹(loose alliance)을 추구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한 바 있다. 클린턴은 “미국 외교의 중심 과제는 경제이고, 안보 정책의 중심 과제는 통상이다. 유리한 통상을 관철하기 위해 미국은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렇듯 변화한 미국의 실체를 정확히 알고 그런 전제 위에서 대미 관계겢肉?정책을 펴나가야 한다.

이처럼 갈등과 경쟁이 격화하는 세계에서 우리가 살길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경제를 발전시켜 물리적인 힘을 강화하고 정신적으로 주체성을 다지는 일이다. 그것은 민족주의이다. 세계가 국제화하고 개방될수록 민족주의는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명제이다. 원심력이 강해지면 구심력도 강해져야 안전이 보장된다. 국제화가 원심력이라면 민족주의는 구심력이다.

둘째는, 주변 국가와의 균형과 선린이다. 우리 주변에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 사회주의권과 자본주의권이 대립돼 있었다. 냉전이 끝난 지금은 미·일·중·러와의 산술적인 등거리는 아니지만 형평 있는 균형과 선린이 유지돼야 한다. 우방인 미국·일본은 우리의 최대 시장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기술과 정보를 줄 수 있는 선진국이다. 새로운 인방이 되어 있는 중국과 러시아는 우리의 잠재적인 시장일 뿐 아니라 우리의 국가 통일과 민족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인접 강대국이다. 이들 4강 사이의 세력 균형과 4강과의 선린 유지는 우리 외교의 기본 원칙이어야 한다.

국제 정치란 원래 정글의 법칙 위에서 이루어져 왔다. 거기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국도 없다. 오직 영원한 국가 이익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방과 적국을 항상 이런 잣대로 보고 대처해야 한다. 분명히 미국은 이제 우리의 혈맹이 아니다. 오직 경쟁국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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