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자당은 그 계기를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의 선거 지원 유세에서 찾고 있다. 6월17일 민자당 박범진 대변인은 “지방 선거는 대통령 선거에서 세번 떨어진 70대 노인의 한풀이장이 아니다. 주민 자치·생활 자치를 위한 지역 일꾼을 뽑는 지방 선거가 김이사장의 개입으로 대권 전초전이 되고 있다”면서 강력히 비난했다.
김대통령의 세대교체론이 DJ·JP 자극
그러나 일꾼 선거·생활 자치를 강조해온 집권 여당 핵심부조차 이번 선거에 담긴 권력투쟁적인 성격을 시인하고 있다.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번 선거는 세대 교체를 시대적 흐름이자 당위로 인식하는 김영삼 대통령과, 지역등권론과 내각제를 내세워 그 흐름에 역류하려는 김대중 이사장과 김종필 총재가 충돌하는 한판이다”라고 못박았다. 사실 `‘3김의 전쟁’은 김영삼 대통령의 세대 교체론에 의해 촉발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대통령은 92년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서부터 “3김 경쟁 시대는 나의 집권으로 끝났다. 이제 3김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주변에 여러 차례 한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해 11월 김대통령이 시드니 방문길에 발표한 `‘세계화 구상’은 정치권의 세대 교체를 강력히 암시하는 것이었다. 김대통령은 그 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대목을 강조했고, 올 2월 전당대회를 거치면서 자신의 세대 교체 구상을 실천에 옮겼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김종필 대표 퇴진과 당 지도부 세대 교체가 단순히 집권당내 개편에 그치지 않고,
‘`3김 시대 청산’이라는 고도의 정치 메시지를 담은 다목적 정치 행위라고 해석했다.
김대통령은 김종필 대표의 탈당과 신당 출범으로 자신의 세대 교체 구상이 오히려 역류에 부딪힌 뒤에도, 세대 교체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김대통령은 지난 4월26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도 질문 내용에 따라 자신의 속마음을 완곡하게, 때로는 단호하게 드러냈다. 이 자리에서 김대통령은 김대중 이사장의 언행과 관련해 ‘스스로 정계를 은퇴한다고 했으므로 은퇴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그의 정치 재개를 환영하지 않겠다는 뜻을 간접으로 나타냈다. 이와 함께 `‘신 3김구도’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반갑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의 이 말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과 권위를 그 누구와도 공유하거나 나눠 갖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한 것으로 풀이됐다. 뿐만 아니라 김대통령은 김이사장의 권력 접근 통로라고 풀이되는 내각제 개헌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반대 의사를 피력했다.
하지만 청와대와 민자당은 이번 선거전 초반까지만 해도 `‘세대 교체’를 화두로 내걸지 않았다. 우선 지방 선거의 정치적 의미를 철저하게 거세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치르는 편이 선거 전략상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자치단체장 직접 선출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면 지방 정부의 독립성이 과대 평가되고 통솔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중앙 정부의 이해와 논리도 가세했다.
그러나 김대중 이사장이 선거전 한가운데로 뛰어들면서부터 여권 핵심부의 분위기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기왕 양김이 선거전에 적극 뛰어든 바에는 그동안 암중모색해온 `‘세대 교체’ `‘3김시대 청산’을 정치 쟁점으로 부각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고개를 든 것이다. 합동연설회와 정당연설회에 단골 연사로 나서는 이춘구 대표와 김덕룡 사무총장 등 민자당 지도부는 날이 갈수록 두 김씨에 대한 공격 수위를 높이고 있다.
민자당, 예상 못한 김대중 행보에 당황
민자당 지도부가 이처럼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김이사장이 이번 지방 선거에 그렇게 빠른 속도로, 깊숙이 뛰어들 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풀이가 있다. 여권의 한 소식통은, 정보기관은 `‘김이사장이 지방 선거 결과가 판명나는 6월27일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일 것’으로 내다보았다고 전한다. 민자당 역시 이번 지방 선거에서 김이사장은 후보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막후 정치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이런저런 정황을 종합해 보면, 민자당 지도부가 예상치 못한 김이사장의 급속한 발걸음에 당황한 나머지 초기의 `‘탈정치·생활 자치 선거 전략’을 포기하고, `‘3김 시대 청산’과 `‘세대 교체’라는 지극히 정치적이면서 속마음을 드러내는 권력 투쟁 양상으로 치달았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민자당 지도부의 정치 공세에는 지역등권론으로 호남표를 묶어내는 김이사장을 공격함으로써, 흩어진 비호남표와 구 여권표를 결집시킨다는 실리적인 계산도 한몫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실제로 선거 초반 민자당 후보에게 불리하게 흐르던 부산시장 선거전의 국면을 전환하는 과정에서 김이사장에 대한 공세가 적지 않은 효과를 낳았다는 것이 민자당의 자가 진단이다.
하지만 민자당은 김대중 이사장에 대한 민감한 정치적 대응으로 말미암아 표리부동하고 일관성 없는 선거 전략을 구사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김광웅 교수(서울대·행정대학원)는 “어떤 선거든 그 나름의 일정한 정치적인 성격을 지니기 마련이다. 그러나 민자당은 지역 선거의 의미를 일꾼을 뽑는 선거로 축소하려는 불가능한 선거 전략을 구사하다가, 후반에는 무원칙하게 정쟁으로 치닫는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한다.
한편 김대중 이사장과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처음부터 이번 선거를 `‘중간 평가’로 규정하고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김이사장은 정치권의 예상을 뒤엎고 시시각각 현실 정치 참여의 걸음을 빨리하며 발언 수위를 높이고 있다. 김이사장은 선거전에 뛰어든 이유를 `‘민주당 당원으로서 집안의 어려운 일을 돕고’ `‘지자제를 있게 한 주인공으로서 좋은 선거를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김이사장의 행보를 연초부터 당 안팎에서 거세게 불어닥친 세대 교체 바람, 예사롭지 않은 지역 분위기, 당내 경선 과정에서 노출된 이상 기류에서 그가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김대통령은 김종필 대표 퇴진을 통해 세대 교체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한편, 예정됐던 김이사장과의 회동을 불발시킴으로써 김이사장의 존재를 간접 화법으로 일축했다. 이에 대해 김이사장 진영이 ‘`산사람을 송장 취급한다’는 분노 섞인 반응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김이사장 자신도 지원 유세 때마다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서운한 감정과 자신에 대한 현정권의 암묵적인 탄압과 박해 구조를 역설하고 있다.
세대 교체 흐름만이 아니다. 선거전을 앞둔 민주당내 정황도 DJ의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당 후보 경선 과정에서 호남 지역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나타나자, 김대중 이사장은 선거관리위원회의 유권 해석에도 불구하고 호남 지역 일원을 누비는 초청 강연을 강행했다. 그러다가 한 발짝 더 나아가 아예 선거 지원 유세에 나서는 쪽으로 성큼 이동했다. 여권의 공세를 빤히 내다보면서도 한 발짝 더 발을 내디딘 것은 `‘수도권의 호남표 이반 현상이 심각하다’는 하부 조직의 보고와 함께 유세 요청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이사장의 행보를 반드시 `위기감 때문이라고 풀이하기는 어렵다. 김이사장은 김종필 총재의 민자당 이탈과 신당 출범으로 `‘반YS 지역연합 전선’ 구축이 가능하다고 내다보고, 지역등권론으로써 그 돌파구를 열었다는 것이 정가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한 정치 평론가는 “김대중 이사장은 김종필 총재의 자민련이 출범하자 지역등권론을 통한 반YS 지역 연합의 가능성을 내다보았다. 김이사장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복원하기 위해 다시 한번 싸움터에 나선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DJ 출정’은 위기돌파와 주도권 잡기 양수겸장
결국 김이사장의 출정은 안팎의 위기 상황을 돌파하는 위기관리적인 측면과, 선거 이후 중앙 정치권의 대격변기에 주도권을 잡기 위한 공세적인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이사장은 지나치게 선거에 깊숙이 참여함으로써 또 다른 현실적인 정치 부담을 안게 되었다는 지적도 만만찮다.
지역등권론은 형식 논리상으로는 전국 각 지역이 어느 한 지역의 패권 구도로부터 벗어나 대등한 목소리를 갖자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맥락으로 환치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김이사장의 지역등권론은 다소 이완됐던 호남 지역의 민주당 지지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는 기여했지만, 비호남 지역 선거에는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22쪽 기사 참조). 김이사장의 지원 유세가 서울·경기 등 수도권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서도 긍정과 부정의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수도권의 호남표를 의식한 고육지책이라는 긍정론도 있지만, 겨우 끌어들인 중산층표를 다시 돌아서게 만드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걱정도 당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세대 교체’와 `‘영향력 복원’을 겨냥한 양김의 전쟁에 김종필 총재가 가세한 이번 선거전은 당연히 선거 이후의 대격변을 예고한다. 더욱이 지방 선거에 바짝 뒤이은 14대 총선 일정으로 말미암아, 선거가 끝나자마자 정치권은 곧바로 총선 정국에 휘말릴 공산이 크다.
“선거 이후 양김 제2 라운드 대결”
정가 관측통들은 민자당이 선거에 낙승할 경우 세대 교체의 물살이 한층 거세질 것이며, 대패할 경우에는 그동안 검찰의 선거법 위반 수사·내사 대상에 올랐던 선거사범에 대한 대대적 사법 처리가 단행될 것으로 내다본다.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세대 교체와 관련해 “김영삼·김대중씨가 40대 기수론을 내건 지도 30년 가까이 흘렀다. 세대 교체는 역사적 필연이고 시대적 흐름이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서울에서 박찬종 후보가 당선된다 해도 이는 민자당의 패배라기보다는 세대 교체를 열망하는 민심이 분출한 것으로 해석돼야 할 것이다”고 말해 묘한 여운을 남겼다.
선거 결과가 어느 쪽으로 나오든 김대통령의 세력 약화가 불가피하고 권력 누수 현상이 가속화하리라는 전망도 있다. 한 정치학 교수는 “결국 시대 흐름은 세계화와 지방화, 즉 세방화로 갈 것이다. 이런 세방화 속에서 중앙 정부의 역할과 통치권자의 권한은 축소되고 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김대중 이사장과 김종필 총재는 이번 선거에서 지역 구도가 현실로 입증되면, 내각제를 고리로 한 반YS 지역 연합 전선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이사장 역시 선거 결과에 따라서는 민자당의 세대 교체 바람과 지역등권론에 대한 당내 비판이라는 안팎의 도전에 직면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이사장 그 어느 쪽도 완승을 거두거나 완패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따라서 정치권에서는 선거 이후 인위적으로 세대 교체를 꾀하려는 김대통령과, 지역 연합을 통해 반YS 전선을 구축하려는 다른 양김의 치열한 싸움이 본격적인 2라운드에 접어들 가능성이 더 많다고 내다본다. 물론 이런 관측은 민심이 어느 한쪽의 명분에 일방적으로 승리를 안겨주는 식의 이변을 연출하지는 않으리라는 대전제 아래서 제기되는 것이다. 물밑 민심이 어떤 이변을 준비하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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