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자치인가 중앙 자치인가
  • 박성준 기자·박병출·나권일 주재기자 ()
  • 승인 1995.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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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재정 한계로 첫걸음부터 비틀…조직·인사권 발 묶여 진정한 ‘풀뿌리 행정’ 힘들어
민선 단체장 시대가 열린 지 76일째 되는 9월14일, 서울 보문동에 자리잡은 성북구청. 오후 3시가 되자 현관 앞에 대기하고 있던 24인승 승합차에 구청장을 비롯한 일단의 구청 공무원들이 우루루 올라탔다. 사람을 다 태운 승합차는 곧 시동을 건 뒤 청사 뜰에 빽빽이 들어찬 차량 사이를 비집고 어디론가 서둘러 빠져나갔다. 이 차는 주민 투표로 첫 민선 구청장이 된 진영호 청장의 지시로 구청이 특별히 주문해 제작한 구청장 집무 전용 승합차이다. 차 안에는 작은 간이 탁자와 전화 1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구청장 일행을 태운 승합차가 멈춘 곳은 성북구 관내 돈암1동사무소. 일행은 동사무소에 도착해 마중나온 동사무소 직원과 인사를 나누기 바쁘게 이 건물 2층 회의실에 마련된 임시 집무실로 올라갔다. 기획예산과·도시계획과·주택과 등 구청내 주요 부서 책임자 전원이 배석한 가운데 구청장이 주민들의 민원을 현장에서 직접 청취한 뒤 즉석에서 해결 또는 조처하는 이른바 ‘이동 구청장실’ 집무가 시작된 것이다.

국가 사무가 태반, 지방 고유 사무는 ‘쥐꼬리’

구청장이 사무실을 옮겨다니며 민원을 듣는 모습은 민선 단체장 시대를 실감케 하는 사례 중 하나다. 그러나 동시에 성북구 사례는 민선 단체장 체제의 한계를 확인케 하는 현장이기도 했다. 이 날 이동 구청장실에 모인 주민들 사이에서 가장 심각하게 제기된 민원은, 관내를 통과하는 도시고속화도로 건설 현장에서 먼지와 소음이 너무 많이 발생하니 방음벽을 설치해 달라는 것이었다. ‘노후한 상수도 시설을 개선해 달라’‘미아리 텍사스촌의 야간 호객 행위를 근절시켜 달라’‘○○아파트 앞에서 차량이 좌회전할 수 없어 불편하니 조처해 달라’‘○○통○반 수돗물이 끊겨 걱정이니 해결해 달라’는 등 다른 민원도 줄을 이었다.

구의회 의원 등 주민 대표들의 발언을 묵묵히 듣고 난 뒤 청장이 비로소 말문을 열어 전체 민원에 대한 입장부터 밝혔다. “구청이 재량껏 처리할 수 있는 문제는 한시도 미룸 없이 즉시 처리하겠다. 하지만 구청이 해결해 주고 싶어도 마음대로 안되는 사안들이 있으니 이해해 달라”는 것이었다. 구청장의 이같은 발언은 개별 민원에 대한 심의·답변 과정에서 빈말이 아님이 입증됐다. ‘○○통○반 수돗물 문제는 구청이 여러 번 조처해 달라고 사정했으나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 소관이어서 구청으로서도 어쩔 수 없다’ ‘○○아파트 앞 좌회전 문제는 법규상 불가하다는 답변이 경찰청에서 왔다. 차선책으로 U턴 문제를 협의중이지만 이것도 구청 권한 밖이어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이동 구청장실 집무가 끝난 뒤 구청으로 돌아가는 승합차 안에서 청장은 다소 무거운 어조로 지난 두달여 업무를 수행한 소감을 밝혔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임기가 끝날 무렵 주민들에게 낙제점을 받지 않을 구청장이 과연 몇이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주민의 손으로 뽑은 지자제의 꽃’‘본격 지방 시대를 이끌어나갈 주역’등 요란한 찬사 속에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던 기쁨도 잠시뿐 각급 단체장들의 심신은 피곤하기 그지없다. 주민 자치 시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사방에서 주민 민원이 봇물을 이룬다. 반면 중앙 정부는 중앙 정부대로 행정 권한이 중앙으로 집중해 있던 권위주의 시절의 관행과 타성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단체장을 상급 기관의 지시와 명령에 순종해야 할 심부름꾼 정도로만 여긴다. 게다가 익히 알려진 것처럼, 극히 몇몇 곳을 제외한 자치단체의 살림살이는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지역 주민의 요구를 만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빈약해 단체장의 애간장을 녹인다. 서울·부산·경남·전남 등 광역 자치단체 15개는 물론 전국 2백30개 시·군·구 기초 자치단체의 장들이 최근 한결같이 내뱉는 푸념은 ‘할 일은 많고, 권한은 없다’또는 ‘돈 쓸 곳은 많은데, 쓸 돈은 없다’이다.

현재 일선 단체장을 가장 괴롭히는 문제는 쓰레기·교통·방범·대민 봉사 등 주민 생활에 직결되는 사무를 집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서울시와 광역 단체는 민생·치안 부문 경찰 예산을 경찰청에 주고 있지만, 이 부문에 필요한 경찰 인력을 마음대로 부릴 수 없다.

답답증을 느끼는 문제는, 사람만 뽑아 놓고 일할 여건을 주지 않은 상황에도 있다. 사무집행권·조세징수권·자치단체 인사권 등 행정 사무와 권한을 이양하는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총무처가 국내에서 시행되는 법령 3천1백69개를 대상으로 조사해 작성한 〈중앙·지방 사무총람〉에 따르면, 법령에 명시된 각종 권한 가운데 국가 사무의 비율은 무려 75%에 이른 반면, 지방 위임 사무와 지방 사무는 각각 12%와 13%에 불과했다(위 표 참조).

국가 사무란 외교·안보·국방·물가·금융·수출입 정책 수립 등 중앙 부처나 그 소속 기관 등 국가가 직접 처리하는 사무를 뜻한다. 지방 위임 사무란, 중앙 정부의 사무이기는 하지만 자치단체의 장에게 위임한 사무로서, 구체적으로 새마을금고 설립·도시설계 승인·상품권 발행 등록·염전개발 허가 사무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에 비해 지방 사무란 자치단체 고유의 사무로서, 자치단체 조직·예산 사무 외에 건축업 허가·농어촌 도로 정비 허가 등이 고작이다. 그만큼 법에 규정된 사무는 수적으로 적을 뿐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빈약하다.
중앙부처 대 지자체, 지자체 대 지자체 마찰 속출

이와 반대로 원래 지방 단체의 사무가 아닌데도 억지로 떠맡는 사무는 터무니없이 많다. 부속 법령에 의해 일거리만 가고 권한은 주어지지 않는 이른바 ‘위임 사무’가 많다는 애기다. 총무처 조사에 따르면, 지방자치단체의 사무는 고유 사무를 포함해 전체 법령상 사무의 25%만 소화하게 되지만 이는 계산상의 수치일 뿐이다.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안희정 연구원은 “사무의 가짓수가 워낙 많고 자치단체간 상황이 달라 일률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지만, 현재 지방자치단체가 처리하는 전체 사무 가운데 고유 사무가 45% 정도, 정부나 상급 단체로부터 위임 받은 사무가 55% 정도 처리된다고 보면 정확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민선 단체장 체제 출범 이후 이같은 중앙과 지방간 또는 자치단체 상호간 행정 사무 및 권한 배분의 불균형 문제는 곳곳에서 마찰음을 내며 단체장의 의욕을 꺾고 있다. 특히 문제가 심각한 현장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초 단위가 되는 각 시·군·구 기초 단체들이다. 대전시 유성구(구청장 송석찬)에서는 민선 구청장이 관내 일선 학교의 급식 시설을 지원해 주기로 결정하고 예산을 잡았다가 ‘제 맘대로 구 예산을 집행한다’고 내무부가 시정 명령을 내려보내는 등 말썽을 빚은 일이 있었다.

내무부 지시의 근거는 유성구청이 지방재정법의 재정집행 관련 규정을 어겼다는 것이다. 지방재정법 제16조 1항에 따르면,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중장기 재정계획을 세워 지방 의회에 보고하고, 이를 내무부장관에게 제출해야 한다. 더 직접적인 제약은, 지난 6월 말 내무부가 지자제 선거가 있기 직전 일선 지방자치단체에 내려보낸 ‘95년 하반기 지방재정운용 지침’에 들어 있다. 주요 내용은 ‘국가 시책을 추진하기 위해 지방비 부담이 따르는 일체의 사항’에 대해서는 내부부장관과 협의 없이 지시하는 지방자치단체의 지방비 부담 행위를 금지한다는 것이다. 모처럼 지역 주민의 지지를 받아가며 시행을 앞두고 있던 유성구의 사업 계획은 이같은 내무부 조처로 일단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

남산 1·2호 터널 관리 소재를 두고 서울시청과 중구청이 공방을 벌이는 모습은 행정 사무기능 배분 문제를 둘러싼 광역 단체와 기초 단체간 갈등의 본보기로 꼽힐 만하다. 문제의 발단은 서울시가 한 해 26억원이 드는 남산 1·2호 터널 유지·관리 사무를 구청에 떠넘기면서 시작됐다. 지자제법상 2개 구에 걸친 공공 시설물은 광역이 책임진다는 규정을 무시하고 서울시가 조례와 훈령을 통해 남산 1·2호 터널의 유지 관리 책임을 중구에 넘긴 것이다. 구청이 애초 이의를 제기했던 부분은, 사무를 위임할 때 그 사무에 대한 비용을 부담하도록 되어 있는 법률을 무시한 서울시가 이 문제에 대해‘입을 씻은’ 것이었다. 중구청은 아예 ‘위법 개연성’이 있는 서울시의 사무 위임 행위 자체를 철회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행정 사무와 권한의 귀속 문제에 대해 할말이 많은 것은 광역 단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광역 단체 또한 사무를 이양하지 않으려는 중앙 정부와 갈등을 빚고 있다. 그 중 한 가지 사례가 부산시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항만법 시행령 개정을 둘러싼 갈등이다. 지난 7월 건설교통부는 부산시가 관할해온 서낙동강 앞바다와 가덕도 일대 공유 수면을 모두 해운항만청이 관리토록 하는 항만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건교부가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하려는 취지는, 공유수면관리법과 항만법이 서로 다르게 규정하고 있는 부산항의 항계선을 일치시켜 정책 수행과 개발 사업을 추진하는 데 통일성을 기하자는 것이다.
법령 앞에 무력한 단체장의 위상

하지만 부산 시민은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며 건설교통부 방침에 반발하고 있다. 개정안이 그대로 시행되면, 부산시가 지금까지 관리해온 수영만과 광안리 해수욕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바다에 대한 관리권을 해운항만청에 넘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문제는 부산시 경제 회생의 유일한 출구로 평가받고 있는 ‘가덕도 종합개발 계획’과도 직결되어 있다. 개정안이 시행될 경우, 부산시는 일일이 해운항만청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공유 수면을 매립하거나 공작물을 설치할 수 없어 중앙 부처의 간섭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지방 재정을 마련하는 문제도 지자제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요소이다. 특히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재정자립도가 취약한 농촌 지역의 경우, 자치단체의 자율성을 해칠 것으로 지목되는 제1 주범은 행정 권한이 아니라 ‘돈줄’인 것으로 평가된다. 지자제 실시로 말미암아 도가 군의 재정에 개입하거나 보조할 수 있는 기능이 현저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은 자체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앙 정부, 특히 내무부 재정국을 직접 상대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재정자립도 9.8%로 전국 최하위권을 맴돌고 있는 전북 진안군의 임수진 군수는 “군수가 재정 지정을 요청하기 위해 서울로 가는 것은 바른 지방자치가 아니다. 그런데도 농촌 지역의 대다수 단체장들은 조금이라도 더 정부 지원금을 타내기 위해 중앙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벌써부터 우리 군을 포함해 우리와 사정이 비슷한 몇몇 군의 군수가 지연·학연을 총동원해 중앙 정부 관리와 끈을 대려는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다”고 밝힌다(26쪽 상자 기사 참조).

일선 단체장은 물론 지방자치 문제 전문가들 대부분은 명실상부한 지자제를 조속히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각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자립도를 높이고 각종 법령을 정비해 중앙으로 집중된 행정 사무를 지방자치단체에 적절히 넘기는 외에, 자치단체장이 힘을 갖고 사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단체장의 위상을 인정해 주고 조직·인사에 관한 정부 통제부터 풀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단체장의 모든 힘은 조직·인사권에서 나오는 법인데, 지방자치법·지방공무원법·지방공무원임용령 등 각종 관계 법령은 이를 엄격하게 제한해 놓아 오히려 단체장들의 손발을 묶고 있다는 것이다.
“중앙 통제 줄여야 지자제가 산다”

예컨대 관련 규정에 따르면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4분의 1을 통할하는 서울시장이 월급 이외에 판공 목적으로 쓸 수 있는 돈은 월 2천5백만원에 불과하다. 서울시 정무 부시장의 판공비는 1천2백만원으로 제한되어 있다. 이같은 판공비 액수는 내무부 규정에 의해 전국의 광역단체장에 똑같이 적용된다. 서울시 이해찬 부시장은 “서울시 전체 인구로 보나 시청이 부양할 공무원 식구 수로 보나 시장의 월 판공비를 다른 광역단체와 똑같이 제한하는 것은 행정 구역의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지의 소산이다”라고 지적한다. 기초 단체의 경우도 이같은 불합리성은 예외가 아니어서, 최근 서울시 중구청은 상주 인구를 기준으로 하여 매겨진 부구청장 직급을, 한 해 행정 수요(유동 인구)가 50만명을 넘는 구청 실정에 맞춰 현행 3급에서 2급으로 재조정하라고 촉구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방 행정 조직과 인사에 관한 권한을 중앙 부처가 틀어쥐고 내놓지 않으려는 데 있다. 자치단체에서 기획관리·예산·감사 업무는 행정 실무의 핵심 분야로서 당연히 그 지방 실정에 밝은 공무원, 즉 지방 공무원이 맡아야 한다. 그런데 중앙 정부는 각종 법령을 통해 이같은 요직을 모조리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가 공무원으로 채우게끔 한 것이다. 게다가 정부는 ‘지방자치단체의 행정 기구와 정원 기준 등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등으로 각 단체가 둘 수 있는 과·담당관의 수는 물론, 단체장 비서 요원의 정원까지 ‘꼼꼼하게’ 제한해 놓았다. 가령 서울시의 과·담당관 설치 범위는 ‘71개 이내’로 제한되어 있다. 일선 시·군·구 등 기초 단체의 경우 단체장은 계 단위 개편에만 권한을 갖고 있다. 이런 사정으로 관내에 불량주택이 많아 재개발 사업이 시급한 기초 단체의 경우, 사업 추진을 위해 재개발과를 신설하려다가 과 설치 범위에 관한 규정에 묶여 부득이 포기하거나 편법을 강구하는 사례도 있다. 지역 특성에 맞는 사업을 추진하려고 해도 번번이 조직·인사 규정의 벽에 가로막히는 것이다.

내무부는 민선 단체장 체제가 가져올지도 모를 일시적인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당분간 ‘철저한 보완 작업’을 병행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단체장을 선거로 뽑는 이상, 현재 활동중인 단체장들이 재선을 의식해 주민 요구에 무조건 영합해 중앙 정부에 무리한 요구를 하는 등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고 걱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행정 전문가들은 이같은 정부 논리를 일부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진정한 지자제를 꽃피우기 위해서는 책임보다는 권리를 더 많이 고려해 주는 의식 전환을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병준 교수(국민대·행정학)는 “지자제의 성패는 자치단체 간의 경쟁에 달렸다. 그런데 문제는 중앙 정부가 자치단체로 하여금 경쟁조차 할 수 없게끔 모든 수단을 통제하고 있는 현실에 있다. 결국 이같은 교착 상태를 해소하지 않고서는 지자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경고한다.

민선 단체장 체제가 출범한 뒤 한동안 신문·방송을 비롯한 언론 매체에는 24시간 민원편의제·행정실명제·이동 구청장실제·여론조사팀제 운영 등 주민을 위한 각종 아이디어 행정을 민선 단체장들이 펴고 있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보도됐다. 하지만 지금 그같은 내용의 보도가 언론에 오르내리는 횟수는 눈에 띄게 줄었다.‘내 손으로 뽑은’ 단체장 가운데에는 벌써 중앙 정부와의 싸움에서 두 손을 들고 ‘지방 독립·주민 자치’ 실현이라는 원대한 꿈을 포기한 사람들이 생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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