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 개발, 어디까지 왔나
  • 중국 길림성 훈춘·丁喜相 기자 ()
  • 승인 1995.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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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훈춘, 나진·선봉과 러시아 하산 묶어 대도약 박차
연길에서 두만강을 따라 하구 쪽으로 내닫는 4백여 리 길은 2차선 포장도로였다. 한반도 최북단 모서리를 돌아 들어가자 강 건너편에 온성군과 새별군(옛 경원군) 산자락이 손에 닿을 듯 펼쳐졌다. 군데군데 ‘조선로동당 만세’ 같은 구호가 적혀 있을 뿐 북녘땅은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반대편으로 뻗은 4백리 길은 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중국은 물론 북한에 생명과 경제력을 불어넣는 젖줄이다. 물동량이 많아 도로에는 화물을 가득 실은 차량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도로 곳곳이 훼손된 모습은 경제 발전을 위한 몸부림을 감당하기에는 이 젖줄이 빈약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두만강 하구에 자리한 인구 16만의 훈춘 시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속한 한 시이지만 그 위상은 세계적으로 주목 받고 있다. 92년 중국 정무원이 결정한 개방 특구이자, 인접한 북한의 나진·선봉 지대, 러시아의 하산 지구와 함께 유엔개발계획(UNDP)이 지원하고 있는 ‘두만강 하구 국제 공동 개발 지구’를 구성하는 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현대강관·동아건설 대규모 투자

훈춘 시는 이런 특별한 위상을 뽐내고 있었다. 길림 성의 다른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대대적인 시가지 건설, 도로 확장, 공장 신축 등 개발 열풍은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였다. 훈춘 시 중심가에 서 있는 대형 입간판은 이 지역의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물이었다.

‘훈춘을 개발하고 두만강을 개발하여 동북아 여러 나라와의 친선 합작 관계를 발전시키자’. 흰 바탕에 붉은색 한글로 적힌 이 대형 입간판 문구는 지난 6월23일 강택민 총서기가 훈춘에 들러 훈시한 내용을 담은 것이다.

훈춘 시 개발의 열쇠는 외자 유치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속도로·철도·발전소·통신망 등 기간 시설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이미 상당 규모의 외국 자본이 훈춘에 들어와 있다. 현재 합영 또는 독자 진출 방식으로 훈춘에 진출한 외국 기업은 모두 1백9개로 홍콩 40%, 한국 30%에 나머지 30%를 일본·북한·러시아·미국·대만이 차지한다.

이들 가운데 한국 기업의 진출은 훈춘 시를 무척 고무하고 있었다. 투자 규모가 가장 큰 현대강관은 독자 기업으로 들어왔는데, 강관공장에만 2천만달러를 투자해 공장을 짓고 있었다. 기계 설비는 부산에서 나진항을 통해 육로로 훈춘까지 들여올 계획이다. 이를 위해 훈춘 시는 기술자 60명을 울산 현대강관에 보냈다고 한다. 금년 말이면 강관이 생산되어 나오는데 1차로 3만t을 뽑아 모두 흑룡강 성 대경유전지대에 공급키로 계약을 체결했다.

두 번째 큰 규모로 진출한 기업은 동아건설이다. 천만달러를 투자한 동아건설은 훈춘 시내 약 1만5천평 부지를 사서 상가 조성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밖에도 동일방직은 5백만달러 규모의 메리야스 생산 공장 건설에 들어갔고, 쌍방울방직도 방직공장 및 여성용 스타킹 생산에 1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하고 훈춘시장과 협의하고 있다. 연합인슈는 5백만달러를 투자해 패널 공장 착공식을 가졌고, 대우그룹은 열병합발전소 건설과 중밀도섬유판·포장지함 생산 공장 건설을 서두르고 있다. 이밖에도 한국 중소기업 30여 개가 진출해 섬유·양말·피복·피혁·봉제 공장을 설립한 상태이다.

훈춘은 한국 차가 대륙으로 달리는 새로운 창구이기도 하다. 지난 한 해 북한 나진항을 통해 대우자동차 1천2백대, 현대자동차 2백대, 쌍용자동차 백대가 훈춘으로 들어왔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한국 기업이 개별 진출을 선호하는 데 비해 일본이나 동남아 기업은 집단 진출을 시도한다는 점이다. 훈춘 시가 역점을 두고 개발하는 훈춘자유무역지대 국경경제합작구 관리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 마루이치 상사는 훈춘에 일본 기업 백여 개를 집단으로 끌어다 공단을 건설하겠다고 제안했다. 또 싱가포르·인도네시아·홍콩·말레이시아에 거주하는 화교 기업인 38명이 지난 8월 훈춘에 찾아와 세미나를 가졌는데, 세계 각국 화교가 하나의 투자 집단을 만들어 투자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런 분위기와 관련해 훈춘 시 인민 정부에서 근무하는 한 조선족 관계자는 “화교는 새로 떠오르는 동북아 경제권의 주도권을 쥐어 보겠다는 의욕이 강하고, 일본은 동해 해상 항로를 장악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같은 훈춘 시의 개발 노력은 결코 중국측의 힘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장 항만을 갖고 있지 못한 훈춘으로서는 인접한 북한의 나진·선봉과 러시아 하산 지구와 협력하는 일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동북아 경제권 성공 여부는 북한·러시아 자유무역지대의 발전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그래서 훈춘 시는 최근 들어 러시아와 북한 (나진·선봉)과의 도로·항만·세관 문제 해결에 집중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훈춘 시 정부 통상구관리위원회 두만강개발사무실 김 철 실장(52·조선족)은 최근 진척된 사항을 이렇게 밝힌다. “여기서 나진까지는 93㎞인데 지난 8월 국경 지대에 권하(중국측), 원정리(북한측) 세관을 열었다. 북조선은 원정리에서 나진까지 도로 노반을 이미 넓혀 놓았고, 훈춘에서 권하까지는 비포장도로이기 때문에 양측이 97년까지 포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아울러 오는 2000년까지 이 길을 6차선 고속도로로 확장하기로 나진·선봉 계획과 우리 계획을 일치시켰다. 또 훈춘에서 러시아 보세이트 항과 자르미노 항까지는 각각 56㎞, 77㎞인데 포장이 끝난 단계이다.”

그는 지난 9월 초 약 1주일 일정으로 북한 나진·선봉 지대를 공식 방문해 개발 현장을 둘러보고 백화룡 나진선봉행정경제위원장과 양국 간의 협력 사항을 논의하고 왔다고 한다. 그가 전하는 나진·선봉 개발 진척 상황은 다음과 같다.

“철조망은 벌판 지역 40㎞에 설치했는데 세 곳에 초소를 두고 있었다. 나진호텔은 내장 공사만 남겨둔 상태였다. 숙소라고는 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비파쪽 여관(비파초대소) 하나뿐이어서 고충이 많았는데, 외국에서 큰 손님들이 올 때는 일본으로부터 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퀸페리호라는 배를 임대해 숙소로 사용한다고 했다. 백화룡 위원장은 내년 3월부터 한국인을 포함한 제3국인이 나진·선봉을 입국사증 없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전했다. 훈춘에 비해 2년 정도 개발이 처졌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쪽의 의지가 매우 강해 외부에서 도와준다면 개발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나진·선봉 개발 부진이 걸림돌

취재반은 훈춘 시 관광국을 찾았다. 지난 8월부터 북한과 협의해 소규모 나진·선봉 관광을 진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뒤라서 가능하다면 나진·선봉에 직접 들어가 현장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관광국장은 산하 훈춘여행사와 북한의 계약에 따라 중국인과 중국 거주 조선족 외에는 들여보낼 수 없다고 했다. 지난 8월부터 지금까지 열 차례에 걸쳐 3백50명이 다녀왔는데 모두 중국 국적자라는 것이다.

발길을 돌린 취재반이 다시 찾은 곳은 새별교두보. 이곳은 북한과 중국 간에 공식으로 국경 무역이 이뤄지는 곳이다. 양측에 세관과 초소가 설치돼 있었다. 약 5백m에 이르는 다리에는 통행인이 거의 없고 함경북도 표지판을 단 수산물 냉동차가 중국 세관 쪽에 죽 늘어서 있었다. 훈춘 시의 연간 무역액 2억달러 가운데 1억5천만달러가 이곳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북한산 상품은 농수산물이 주류이지만, 러시아의 화학비료·목재·자동차 등을 북한 무역업자들이 이곳으로 중개하기 때문에 비중이 높아진 것이다.

둘러보면 두만강 하구 개발은 훈춘을 중심으로 용트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완전한 진행이었다. 나진·선봉 개발이 부진한 것은 동북아에 새로운 경제권을 형성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두만강 하구의 격랑으로 볼 때 나진·선봉 개발은 북한에만 시급한 문제는 아니다. 21세기 동북아에서 차지할 위상을 고려하면 한국으로서도 외면해서는 안될 곳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남북한의 경제 협력인데, 북경 3차회담 결렬이 보여주듯이 그에 이르는 길은 아직도 가파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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