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소프·이창주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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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6.0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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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주 교수·데니소프 러시아 외무부 제1 부국장 대담/“미·북한 수교 준비 완료”
<시사저널> 편집자문위원이자 모스크바 대학 경제학부 초빙 교수인 이창주 교수와 발레리 데니소프 러시아 외무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제1 부국장의 한반도 정세에 대한 심층 대담을 싣는다. 이교수와 데니소프 부국장은 김일성 주석 사망 후 한국의 대북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앞으로 미·북한 관계가 급진전함에 따라 변화할 한반도 주변 정세에 대해 적절한 대응책을 제시했다. 특히 데니소프 부국장은 러시아의 현역 고위 외교관이자 한반도 전문가로서 러시아·미국·중국이 한반도 문제를 보는 시각을 명쾌하게 제시했다. 이교수와 데니소프 부국장 간의 대담은, 최근 전개되고 있는 한반도 정세에 대한 국내의 일부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이창주:96년은 한반도 상황에 중요한 변화가 예상되는 해로서 남북관계와 동북아 국제 정치에 새로운 질서가 형성될 전망이다. 첫째 미·일·중·러 4강의 남북 교차 승인이 완료되는 해가 될 것이다. 둘째, 북한의 국제 사회 편입이 본격화할 것이다. 주변 네 나라에 의한 남북 교차 승인이 이루어지면, 이미 북한과 경제 관계를 맺고 있는 프랑스·독일·캐나다·이탈리아 같은 서방 선진국들도 발전된 형태의 협력이나 외교 관계 수립을 추구할 것이다. 셋째, 북한의 개방·개혁 정책이 상당 부분 진전될 것이다. 북한이 비중을 두고 있는 국제 관계 개선 정책과 경제 발전 우선 정책에 따라 각종 국제 행사 참가, 국제 교역, 상품전 개최,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 개발 계획 확충, 합영법 등 해외 자본 유치 법규 보완 같은 다각적인 노력으로 점진적인 개방·개혁 조처를 할 것으로 보인다.

데니소프:남북한은 72년 7·4 남북 공동성명으로 통일 3대 원칙을 선언했고 92년 2월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만들어내는 등 분단된 민족 간에 획기적인 관계를 이루었다. 당시 주변국들은 이러한 남북 간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지지와 희망을 표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합의가 실현되지 못하고 불신과 대결의 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제 한반도는 새로운 환경을 맞게 되었다. 오랫동안 적대 관계이던 미국과 북한 간에 사실상 수교 관계가 시작되고, 반목 상태이던 러시아와 북한의 관계가 우호적인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금년에는 북한에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현실적으로는 식량난과 경제난을 타개하려고 적극적 대외 정책을 마련할 것이다. 한국 정부는 새롭게 전개되는 한반도 상황을 정확히 분석하여 적극적이며 진취적인 대응과 전략·정책을 세워야 한다고 본다.

북한, 군부 동요·권력 투쟁 조짐 없어

이창주: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국제 정치학자나 전문가 들은 한국의 대북 정책이 지난 2년간 철저하게 실패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또 그동안 한국의 관련 학자들이나 정책 입안자, 언론이 북한에 접근하는 방식이나 정보 분석 등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한다. 미국 국무부 차관보를 지낸 로버트 매닝씨는 한국내 북한 문제 전문가라는 이들이 김정일에 대해 ‘건강이 나쁘고 정신적 질환 등 이상이 있는 사람이다’라든가, ‘정신의학적으로 분석해본 김정일 ’‘권력 장악에 실패한 김정일’ ‘김정일의 망명 준비’ 등 현재까지도 실제와 전혀 다르고, 남북 관계 개선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방식으로 북한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러한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미국은 94년 북한과 핵 협상을 본격화하기 전 북한에 대한 정보 분석과 평가에서 김일성 주석 사후 북한의 정치·사회·군부는 매우 안정적이고 김정일 비서의 확고한 장악 아래 국가 경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안다. 북한 체제처럼 이해하기 힘든 특수한 체제의 정치 집단을 상대로 핵 협상을 타결한 미국의 외교 정책은 인내와 정책의 일관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94년 제네바 핵 합의문,
95년 콸라룸푸르 핵 협상 타결까지 강온의 다양한 협상 전략을 전개했지만, 미국의 북한 정책은 본질적으로 미국의 국익을 우선한 유화 정책이었다.

데니소프:북한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 대체로 미국·중국·러시아가 의견을 같이하고 있으며, 이 세 나라의 분석과 평가가 정확하다고 본다. 북한에서는 현재 확고부동하게 김정일의 권력 장악과 승계가 끝났다고 본다. 93년 4월 김일성 주석이 살아 있을 때 북한은 국가 헌법을 수정하여 최고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최고군사위원장에게 북한의 국가 원수 직을 수행할 권한을 부여했다. 따라서 김정일 군사위원장이 국가 주석 및 노동당 총비서 직을 갖게 되는 절차는 형식 이상의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중국·러시아가 이 문제와 시기 또는 절차에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나는 외교관 생활의 거의 전부인 15년 동안을 평양에서 보낸 사람으로, 북한의 정치 권력이나 군부에 어떠한 동요나 투쟁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한국은 북한에 비해 체제나 경제, 외교적으로 월등한 비교 우위에 있다. 그리고 같은 민족이다. 또 필연적으로 하나의 국가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따라서 한국의 대북 정책은 다른 이해 당사국과 차이가 있어야 하며, 민족 정책의 일환으로 정책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미·일·중·러, 남북한 등거리 외교 시작

이창주:한국 정부는 지금까지도 미국의 대북 관계가 한국과의 관계의 종속 변수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 나는 96년을 미·일·중·러가 남북한과 등거리 외교 시대를 여는 원년으로 규정한다. 최근 미국의 동향을 보면 북한과의 관계에서 이미 독자적인 행보를 시작했으며, 워싱턴과 평양에 연락사무소 개설 및 경제단체 진출 계획과 일정 및 준비가 사실상 완료된 상태라고 보는 것이 정확한 인식이다. 김정수 유엔주재 북한 차석 대사는 본인과의 대화에서 금년 상반기에 북한의 외교대표부가 워싱턴에 설치될 것을 암시하였으며, 최근 유엔대표부에 북한 외교관이 늘어나는 것을 보아서도 사실상의 수교 준비가 끝난 것으로 보인다. 북·일 수교는 일본이 적극적이기 때문에 앞으로 북한의 정책과 태도에 달려 있다.

데니소프:러시아도 미국과 북한 간에 연락사무소 설치에 대한 제반 준비와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판단한다. 러시아는 이러한 양국 관계를 적극 지지한다. 또 북·일 수교도 가능한 한 빨리 성사되기를 바란다. 북한이 국제 사회에 참여하는 것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 미국과 러시아의 일치된 견해이다. 현 단계에서 한국 정부를 포함한 관련국들은 북한 체제를 인정해야 하며, 간섭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물론 정례적인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와 미국, 러시아와 중국 간에 필요할 때 협의 채널이 가동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는 그동안 러시아가 주장해온 한반도 문제를 위한 국제회의 개최 주장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증거이며, 북한도 이를 찬성하고 있다. 러시아는 북한측에 61년 체결한 조·러조약 개정 초안을 보냈다. 또 관련국과도 협의가 있었다. 우리는 새로 체결하게 될 조약이 북한으로 하여금 고립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북한의 의사와 초안을 기다리고 있다. 초안의 내용을 밝힐 수는 없지만 시대 상황에 맞게 개정한다는 데는 북한도 원칙적으로 동의했다. 러시아의 북한 정책 핵심은, 북한이 고립되는 것을 막고 국제 사회에 편입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창주:최근 북한은 이른바 3대 부족 현상, 즉 식량·에너지·외화 부족이라는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다. 이중에서도 재해와 흉년으로 발생한 식량난은 상당히 심각한 상태이다. 그러나 북한 문제를 다루면서 주목해야 할 사항은, 지난 5년간 공산권이 몰락한 이후 경제적·정치적으로 고립 상태이던 북한이 핵카드를 이용한 생존 전략으로 국제 사회와 거대한 미국을 상대로 투쟁한 대외 정책이 성공적 결과를 가져왔으며, 그 덕분에 고립 상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결과는 미·일·중·러 모두 정치적 조건이나 흥정이 아닌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에 식량을 지원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적어도 북한이 최악의 상태에 빠지도록 방치하지 않겠다는 것이 동북아 관련 국가들의 인식인 것 같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아직도 정치적인 조건과 거래에 의해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데니소프:북한의 경제 상황이 심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경제적 위기 상황을 북한 정부가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그 근거의 첫째는, 북한이 개혁·개방의 규모를 늘리고 속도를 높여가고 있으며 이에 대한 서방 기업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북한의 정책은 경제 발전에 총력을 기울이는 경제 우선 정책이 될 전망이다. 둘째, 미·일·중·러를 중심으로 한 관련국의 북한 지원 정책이 최소한 제한적인 수준으로라도 이루어질 것이며 교역 규모도 늘어날 것이다. 셋째, 식량 위기로 말미암아 북한에서 사회적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미·일·중·러는 물론 한국도 원치 않는다. 따라서 다른 나라는 물론 경제 사정이 여의치 못한 러시아도 식량 지원 문제를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여기에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 북한 경제는 한국 경제의 도움으로 상당 부분 발전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이 간접 교역 방식이지만 한국은 북한의 최대 교역국 가운데 하나이다. 북한 경제가 발전하는 데 최대 과제는 남북간 상호 협력 체제 구축에 있다. 김달현 전 북한 정무원 부총리가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이후, 북한은 북한에 투자하는 한국 기업들을 위해 남포 지역에 최고급
초대소와 위락 시설을 건립했다.

이창주:현재 남북 관계가 사실상 얼어붙어 있는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한국 정부, 남북 관계 개선 기회 놓쳐

데니소프:내가 볼 때 남북간 감정적 대립의 큰 원인은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의 상대인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 다른 한쪽 상대인 김영삼 대통령의 대응 정책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한반도 분단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이고 획기적인 남북 관계 개선 기회를 한국 정부가 놓친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한국 정부가 미국의 영향력에 편승해 미·북한 회담 과정에서 대북 강경 고립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북한 당국자는 이 부분을 누누이 우리에게 강조했다). 한국 정부는 대북 강경 정책을 지양하고 적극적인 대북 정책을 세울 필요성이 있으며, 주변국과의 협력 계획과는 별도로 동일 민족 차원의 대북 접근 방식을 추진해야 할 때라고 본다. 지금의 북한은 자기들의 어려운 경제적 처지와는 반대로 상당히 자신감을 갖고 있다. 현재 북한의 대남 정책 특징을 보면, 정부 차원의 당국간 관계나 접촉은 피하면서 한국 국민에게는 유화 정책을 전개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국제 관계에 비중을 두어 외국과 협력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예정이다. 즉 한국 배제 전략을 고수하겠다는 것이다. 한국은 북한에 정보 채널과 민간 사절을 자유롭게 왕래시킬 수 있는 주변국들에 비해서 여러 가지로불리한 처지이다. 현재의 대북 관계 환경에서 한국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합리적인 대북 관계 개선책은 민간 교류의 폭을 넓혀 나가는 것이다. 가능한 한 제한을 풀고 한국의 학자, 경제인, 문화·예술·종교인이 자유롭게 북한과 교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북한 당국은 북한을 방문한 한국 인사가 귀국 후 감옥에 들어가지 않으면 모두가 한국 정보기관의 프락치라고 주장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남북 문제는 당사자끼리 해결하고 성취해야 할 과제이며 목표이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한국이 인내하고 노력함으로써 견고한 불신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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