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 무기화’ 강공, YS의 위험한 도박
  • 김 당 기자 ()
  • 승인 1996.0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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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 강요는 역효과 초래할 수도…인도적 접근 필요
정부의 대북 정책 기류가 심상치 않다. 특히 김영삼 대통령과 청와대의 기류가 그렇다. 김대통령은 12월19일 서부전선을 방문해 군의 동계 작전 태세를 점검하는 자리에서 “북한이 ‘한계 상황’에 왔기 때문에 어떤 도발을 할지 모르는 위험한 상태이다”라고 말했다. 북한의 도발 위험을 경계하는 발언은 역대 군통수권자들이 전선을 방문할 때 늘 해온 말이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여느 때와 달리 도발 위험 배경을 북한의 ‘적화 통일 야욕’으로 보지 않고 ‘한계 상황에 왔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12월10일 열린 안보장관회의에서도 김대통령은 현재의 북한 상황을 어디로 추락할지 아무도 모르는 ‘엔진이 고장난 비행기’에 비유했다. 이같은 지적과 비유에는 그만큼 북한의 경제난·식량난이 심각한 데서 오는 불확실성과 긴박한 인식이 깔려 있다. 한마디로 현재의 북한 사정이 굶어 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이므로 싸우기를 택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북한은 12월22일 우성호 선원 송환 방침을 전격 발표했다. 지난해 5월 나포된 우성호의 선원 송환 문제는 그간 정부가 천명해온 대북 쌀 지원 재개를 위한 전제 조건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이는 어느 때보다도 강경책을 구사하고 있는 한국 정부로부터 쌀 지원을 얻기 위한 북한의 ‘성의 표시’로 해석될 만한 징표였다. 또 이는 한계 상황에 이른 북한이 한국 정부의 대북 강경책에 사실상 백기를 든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었다.

그에 대한 해석이 어떻든 중요한 것은 청와대가 북한의 성의 표시(또는 백기)에도 불구하고 대북 강경 일변도를 늦추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달리 말해 북한측이 더 많은 성의 표시(또는 완전한 항복)를 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실제로 정부는 우성호 선원 송환이라는 중요한 전제 조건이 충족된 뒤에도 휴전선에 추가 배치된 병력 및 장비의 후방 철수라는, 쌀 지원을 위한 새로운 전제 조건을 내걸었다. 식량의 무기화인 셈이다. 김대통령은 새해 국정 연설(1월9일)에서 그 점을 분명히했다.

김대통령은 새해 국정 연설(1월9일)에서 ‘북한이 남북 간의 긴장을 완화하고 호혜적 입장에서 경제난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북한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데 적극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듣기에 따라서는 적극 지원 의사를 밝힌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사실상 북한의 무조건 항복을 강요하는 전제 조건이 걸려 있다.
우선 김대통령은 북한이 경제난·식량난을 겪는 원인을 과다한 군사비 지출과 공산주의 경제체제의 비능률에 따르는 구조적 문제라고 평가했다. 일시적 지원으로 해결될 성질이 아니라는 인식이다. 또 김대통령은 북한이 동족을 위협하는 백만명 이상의 군사력을 유지하는 데 모든 국력을 쏟아부으면서 국제 사회의 구호를 바라는 것은 ‘민족에 대한 배신이며 죄악’이라고까지 단정했다. 구호를 요청하기 전에 먼저 자세 변화와 자구 노력을 보이라는 주문이다.

북한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처럼 김대통령이 대북 강경책을 고수하고 있는 배경에는 △김대통령의 대북 인식 변화 △정부 내의 강경론 우세 △6·27 지방선거 이후 달라진 정치 상황 등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북 ‘널뛰기 발언’으로 상징되는 김대통령의 대북 인식 변화이다.

취임 초기 김대통령의 유화적 대북관은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라는 취임 연설 대목으로 상징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유화책은 취임 백일 만에 ‘핵무기를 가진 상대와 악수할 수 없다’는 강경책으로 급선회한 뒤로 주요 고비마다 널뛰기 식으로 오락가락해 왔음을 알 수 있다(<표2> 참조).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김대통령의 대북 강경 발언이 북한의 대남 비방과 밀접한 함수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김대통령이 취임 초의 민족 우선 정책 기조에서 강경 기조로 바뀌게 된 첫 번째 고비는 94년 2월로 관측된다. 이 때 김대통령은 서해에서 표류하던 북한군 2명을 인도적 차원에서 송환했는데도 북한이 ‘남한이 북한 병사를 납치해 귀순을 종용하다가 이들의 영웅적 투쟁으로 어쩔 수 없이 돌려 보냈다’고 선전한 것을 듣고 북한의 이중적 태도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는 후문이다.
그뒤로 북한이 정상회담 제안을 해올 때까지 김대통령은 강경한 ‘안보 일변도’ 정책을 견지했다. 그러다 정상회담 제안 이후 유연한 대응으로 바뀌었으나 시간이 흘러도 대화 움직임이 없자 다시 강경 기조로 돌아섰다. 특히 95년 6월 북한과 비밀 협상을 해 쌀 지원을 약속하고 북한으로부터 우성호 선원 석방과 대남 비방 중지 약속을 이끌어냈으나 이를 지키지 않자, 김대통령은 공개적으로 “북한의 이같은 약속 위반에 배신감과 실망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김대통령이 강경 기조로 선회한 데는 자신에 대한 비방과 정부내 강경론의 득세가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국가안전기획부의 분석에 따르면, 북경 쌀회담이 결렬된 이후 김대통령에 대한 북한의 비방 횟수는 1일 1백30회로 급증했고 최근에는 1백80회까지 격증했다.

또 안기부를 중심으로 한 대북 관련 부서에서도 ‘대남 적화 전략이 불변임을 입증하는 실례’ 보고등을 통해 대북 강경책을 부추기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 계기로 핵 협상 고비 때에도 북한의 비방을 상투적인 수법으로 치부하고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고 유연하게 대응했던 김대통령의 대북 인식이 ‘못된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거나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식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같은 대북 강경책의 근거가 상당 부분 북한에 대한 정보 독점과 부정확한 정보 판단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그같은 정보 판단이 정확하다 하더라도 동족을 상대로 사실상 식량을 무기화한 한국의 강경책은 인도적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는 미·일 등 국제 사회의 대북 식량 지원과 대비될 수밖에 없다. 대북 정책의 궁극적 목표가 북한을 고립 상황에서 국제 사회로 편입시키는 것이라면 한계 상황에 이른 북한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아사냐 전사냐 택일을 강요하는 현재의 대북 강경책은 위험한 도박이라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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