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권력 이동’에 제3의 물결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6.0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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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초반·후반 이어 세번째 경영권 이양 ‘붐’… 동생 승계 증가가 특색
나이:59세
출신지:영남
혈액형:B형
주소:서울 용산구 한남동
학력:좋은 대학은 아니지만 미국에 유학, 경영학 전공


어떤 이력이 눈에 띄는가. 나이에 비해 학력이 괜찮다는 점? 부촌(富村)에 산다는 점?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만 가지고는 이 이력의 소유자가 수만 명을 이끌며, 해마다 5조원어치를 파는 사람이라고 짐작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이력서가 30대 재벌 총수의 평균 신상명세서(서울경제신문사 추정)가 되기 위해서는 꼭 한가지가 더 필요하다.

특이 사항:재벌 총수의 장자 혹은 장손

평균이란 개념이 그렇듯, 30명 모두가 이 특이 사항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창업주가 총수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대우·한진·롯데·동부·한라·고합·우성 그룹이 여기에 속한다. 3남이 물려받은 삼성·동국제강·한보 그룹과 동생이 승계한 선경·쌍용·삼미, 사위가 이어받은 동양그룹도 예외에 속한다.

벌써 3대째 대물림을 하는 사례도 있다. 지난해 경영권을 승계한 LG그룹(회장 구본무)과 백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두산그룹(회장 박용곤)이 여기에 속한다. 코오롱그룹도 1월29일 이웅렬 부회장이 아버지의 경영권을 승계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든 이 ‘왕위 세습 의식’은 80년대 초반부터 급격히 잦아지기 시작했다. 재벌 창업주들이 이 시기를 전후해 죽거나 경영 일선에서 은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80년대 후반기가 또 한 차례 고비였고, 비자금 파문 이후 지금은 세 번째 ‘붐’이다.

우선 현대그룹이 전격적으로 회장을 교체해 경영권 승계를 앞당겼고, 삼미그룹도 김현철 전 회장 동생인 김현배씨가 회장으로 경영권을 행사하게 됐다. 삼미그룹은 김 전회장이 해외 법인 경영에만 전념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코오롱그룹과 금호그룹의 승계 작업도 곧 이루어질 전망이다. 금호그룹은 동생(박정구 그룹 부회장)이 박성용 현 회장의 뒤를 이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경우는 80년대의 잇단 대권 승계와는 다소 다른 배경을 가진 듯하다. 과거 두 번의 예가 전적으로 각 그룹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이번은 회사 바깥의 여론도 많이 작용했다. 비자금 파문으로 각 그룹 총수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 데다가 현 정부가 세대 교체 바람을 재계가 수용해 주도록 압력을 넣은 측면이 크다. 결론적으로 각 그룹으로서는 분위기를 일신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던 것이다.

LG그룹과 함께 일찌감치 3세 이양 계획을 발표했던 코오롱그룹만 예측 가능했던 거의 유일한 경우다. 이웅렬 부회장은 이동찬 현 회장의 외아들로, 89년 그룹 기조실장을 거쳐 91년 부회장에 올라 그룹 경영 관리와 이동통신을 비롯한 신규 사업을 총괄해 왔다. 창업주가 회장인 7개 그룹 가운데서도 경영권 승계 작업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21세기 초반까지 승계 작업이 문제가 되지 않을 그룹은 대우·동부·고합 정도뿐이다. 이 세 그룹 회장들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데다가 정력적으로 경영 일선에서 뛰고 있다. 경영권 승계가 유력한 그룹으로는 한진과 우성을 꼽을 수 있으며, 30대 그룹은 아니지만 태광·극동건설 그룹도 사정이 비슷하다고 알려져 있다.

승계 형태는 장자에게 주요 그룹의 경영권을 몰아주는 점이 특징이다. 재벌 연구가들이 ‘장자 불균등 상속제’라고 일컫는 이 방식은, 오랜 유교적 관습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큰 아들이 아닌 자식이 경영권을 물려받은 경우는 창업주가 장자를 못미더워했거나 눈 밖에 났을 때뿐이다.

현대·선경 그룹처럼 과거에 드물게 있었던 동생 승계가 요즘 들어 장자 승계 못지 않게 자주 발생하는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현대의 경우는 창업주가 사실상 경영 전권을 쥐고 직함만 물려주었고, 선경은 2세들이 어린 상황에서 창업주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발생한 승계라는 점에서, 최근 쌍용·삼미·금호 그룹에서 보는 동생 승계 작업과는 그 의미가 약간 다르다.
특히 요즘 승계 작업에서는 경영권자들이 자진해서 실질적인 경영권을 동생에게 넘겨줬다. 충분히 승계 준비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창업주가 경영권을 내놓겠다는 결심을 굳혔기 때문이다. 이런 새로운 유형의 승계가 잇따르는 것은, 최근의 대물림 작업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갑작스럽게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또한 창업주들이 아직도 2세 경영자들의 경영 수업이 충분치 못하다고 불안해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생 승계의 경우는 현대그룹처럼 2세 승계로 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과도 체제인지 여부가 불투명해, 상당수 그룹에서 경영권의 향방을 둘러싸고 혼선을 빚을 가능성이 크다.

또 하나 마무리 과정에 있는 승계 작업에서 주목할 것은, 각 그룹이 어떤 형태로 쪼개질 것인가 하는 점이다. 경영권을 승계하지 못한 2,3세 대부분이 현재 그룹 경영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분가(分家)는 필연이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에서는 제일제당·한솔제지·신세계가 완전히 분리됐고, 제일합섬도 최근 떨어져 나갔다. 미원그룹이나 동아그룹도 완전히 분리된 형태다. 특히 미원그룹은 86년 창업주인 임대홍 미원그룹 명예 회장이 동생인 임정홍씨(도림산업 회장)와 재산 분쟁을 겪으면서 형제 간에 완전 분가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현대·효성·한진 그룹처럼 한 그룹 안에 통합돼 있으면서도, 형제 간에 사실상 구획이 돼 있는 경우도 있다. 현대그룹은 경영에 참가하고 있는 6형제가 느슨하나마 서로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 상태이며, 효성그룹은 3형제, 한진그룹은 4형제가 그룹 경영을 분할한 상태다. 김영삼 정부 들어서도 한화그룹이 분가를 둘러싸고 재산 분쟁을 겪음에 따라, 재계는 각 그룹이 형제 간의 완전 분리 형태를 더 선호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현대그룹이 쪼개질지, 쪼개진다면 어떤 형태가 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2,3세 경영인들, 경영권 흔들릴 수도

2,3세 경영인에게 닥칠 문제는 바로 그들의 이력서 안에 숨겨져 있다. 자기들의 아버지가 자수 성가라는 화려한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데 비해, 이들의 이력서에는 어디를 살펴보아도 스스로 이룬 경력이 아직 없다. 평사원보다 훨씬 고속으로 진급해 그룹에서 제 2인자 자리에 올라앉았을 따름이다. 이들 가운데 능력에 부치는 사람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관리 능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난 30대 그룹의 경우는 2,3세 경영인이 회사를 망쳐놓은 경우가 거의 없으나 그밖의 회사들은 그렇지 못한 사례가 점차 늘고 있다.

또한 과거에는 선택 받은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보장 받았던 경영권도 흔들릴지 모른다. 아직 상호 출자를 통한 계열사 지분이 30% 이상 있기는 하나 총수 개인 지분은 5% 안팎이기 때문이다. 21세기 초 2,3세 총수들의 과거사를 다시 작성하게 된다면, 그 길목에 이르는 5년 간이 가장 큰 고비였다고 쓰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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