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반3김 세력, 3김에 선전 포고
  • 吳民秀 기자 ()
  • 승인 1995.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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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청년 세력, 개혁 신당 추진… 정국 흐름 바뀔 수도
한때 어느 원로 기업인이 자신의 늙은 피를 몸 밖으로 내보내고 끊임없이 젊은이의 피를 받아들임으로써 왕성한 건강을 유지한다는 끔찍한 소문이 퍼진 적이 있다. 확실히 그 원로 기업인의 체력은 젊은이 못지 않았다. 의사들은 의학적으로 있을 수 없는 얘기라고 언론에 밝혔지만(<시사저널>도 사실을 규명한 적이 있다), 이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 내용은 비과학적이었지만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다. 나중에 그 기업인은 정계에 뛰어들었는데, 이러한 근거 없는 소문은 끝까지 그를 괴롭혔다.

꼭 그 소문 때문은 아닐지라도 여하튼 그 기업인의 정계 진출은 허망한 꿈으로 끝났다. 그 기업인의 기력이 눈에 띄게 쇠잔해졌다는 최근의 언론 보도를 보면, 젊은이의 피를 수혈한다고 늙은 몸이 젊어지지 않는다는 주장은 입증된 셈이다. 그러나 인체가 아닌 사회나 조직에서는 젊은 세대를 받아들임으로써 부실한 몸을 회복하기도 한다. 특히 정치권은 ‘젊은 피’에 대한 집착이 유별나다.

개혁을 지향하는 젊은이들을 끌어들임으로써 건강을 회복하고 권력을 향한 장도에 오르곤 했던 것이 우리의 현대 정치사이다. 실제로 정치권에는 독재 정권에 저항하며 젊음을 불태운 세대들로 층층이 채워져 있다. 4·19세대와 6·3세대, 그리고 70년대 반독재 세력이 대부분 정치권에 들어와서 어느덧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제도 정치권 진입은 기성 정치권에 수혈한다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지금 정치권 일각에서는 ‘세대 간의 전쟁’이 서서히 확산되고 있다. 늘 기성 정치권의 수혈 대상에 머물렀던 30대 청년 세대가 정국을 좌지우지하는 3김을 향해 도전장을 던졌다. 언론은 그들에게 ‘모래시계 세대’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인기 드라마 <모래시계>의 시대 배경을 청년기로 보낸 세대라는 뜻이다.

‘우리는 지역 할거에 기반을 둔 정치 질서를 단호히 배격하며, 정치의 계절이면 어김없이 손을 내미는 기성 세대의 보조자나 수혈 대상자로 전락하지 않을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우리의 힘은 미약하지만 더 이상 차세대가 아니다. 새로운 정치 주체를 만들고 나아가 21세기형 대안 세력을 창출하기 위해 전심 전력할 것이다.’

지난 8월17일 광복 50주년을 맞아 모래시계 세대 천여 명이 세상에 내놓은 청년선언문의 요점이다. 요컨대 ‘남의 몸’을 위해 봉사하는 피가 아니라, 청년 세대 스스로 ‘새로운 몸’을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이 선언문 서명자 명단에는 80년 이후 학생운동의 주역들은 물론이고, 현재 정계·법조계·문화예술계·청년운동계·재야·학계·노동계에서 활약하는 청년층 지도자도 거의 망라되어 있다.

YS·DJ에 뼈아픈 일격

끊임없이 모래시계 세대에 추파를 던져온 YS나 DJ 처지에서는 뼈아픈 일격이 아닐 수 없다. 오랫동안 청년층에 공을 들여온 YS 차남 현철씨 등 민주계와, 30~40대를 대거 영입해 젊은 정당을 만들겠다고 공언한 새정치국민회의 쪽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진영 모두 정계 재편을 염두에 두고 물밑에서 모래시계 세대를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기울여왔기 때문이다(<시사저널> 제301호 참조).
사실 이들은 87년 대선 때부터 양김에 의해 편이 갈려 있었다. 이들의 재야 선배들이 DJ를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세력과 사실상 YS로 후보 단일화를 주장하는 세력으로 갈라섰던 것처럼, 이들도 선배들을 따라서 편이 갈렸다. 그래서 이 날 청년선언문을 발표하는 자리에는 이른바 ‘비판적 지지 세력’과 ‘후보 단일화 세력’, 그리고 백기완 후보를 내세운 ‘독자 세력’ 출신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3김과 전면전을 불사하겠다는 모래시계 세대 역시 과거에는 어떤 식으로든 양김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개혁 신당, YS보다 DJ에 더 부담

그래서 그런지 이 날 청년선언문의 발언 수위는 예상보다 높지 않았다. 이들이 워낙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데다 그간의 정치 경로와 처지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선언문을 다듬는 과정에서 앞으로의 정치 행보와 관련한 대목에 이르러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한 것이다. ‘더 이상 기성 정치권의 수혈 대상이 아님을 엄숙히 천명’하는 것이 이들이 격론 끝에 도달한 결론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청년 세대의 이러한 움직임이 평가 절하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기성 정치권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모래시계 세대의 반격에 대해 “원래부터 반DJ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니 당연히 그럴 것”이라며 애써 못본 체 하던 DJ가 이들을 설득하는 작업에 나섰다. 30대 청년 단체인 ‘푸른 사람들’의 초청 형식으로 8월28일 청년 세대와 대화할 기회를 갖는 것이다. 현재 이 단체 소속인 전 고려대 삼민투위원장 허인회씨가 새정치국민회의에 참여할 것으로 알려짐으로써, 이 날 DJ와 청년들 간의 대화에서는 더욱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YS 진영에서는 일단은 청년 세대의 흐름을 지켜보자는 쪽이다. 30대의 정치 세력화 움직임이, 자기들보다는 DJ쪽에 더 치명적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내 민주계 한 인사는 “대선에서 YS가 승리함으로써 3김 시대는 사실상 끝났다는 것이 이쪽 입장이다. 따라서 우리는 3김 시대를 청산하자는 젊은 세대의 주장에 동의한다. 다만 현재의 지역 정치 구도상 그들이 현실 정치권에서 성공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결국 어느 한쪽으로 줄을 설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시각이다”라고 말한다. 즉, 총선 국면까지 청년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일부 세력을 끌어들이겠다는 생각이다.

현재 모래시계 세대의 정치 세력화 움직임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존재한다. 이 두 가지 흐름은, 내년의 15대 총선에 대한 대응 방식의 차이로 나뉜다. 첫째는, 내년 총선에 대비해서 개혁 신당을 만들고 청년 세대의 힘을 모두 쏟아붓자는 역량총투입론이다. 7월26일 서울 여의도 맨하탄 호텔에서 처음으로 양김을 향해 세대 전쟁을 선포했던 ‘1백50인 서명그룹’이 이들이다. 이들은 9월4일 ‘희망의 정치를 여는 젊은 연대’라는 조직을 공식 발족할 예정이다.

다른 하나는, 15대 총선에서 모래시계 세대는 개별적으로 참여하고, 16대 총선에 맞춰 세력을 규합해야 한다는 준비론적 흐름이다. 이들이 현 정국을 보는 시각은 이렇다. 지역 구도에 근거한 3김 정치를 타파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15대 총선은 3김의 영향력 아래서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 또 한번 좌절하기보다는 힘을 길러 다음 선거에 대비해야 옳다는 것이다.

이 두 흐름이 서로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3김 시대를 넘어서기 위해 모래시계 세대가 본격적으로 정치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점에서는 생각이 같기 때문이다. 지금 여러 분야의 청년 전문가를 포럼 형식으로 조직한 각종 청년단체와 전대협 동우회 등 순수 학생운동권 출신 그룹, 그리고 진작 기성 정치권에 가담한 청년 그룹들은 조직끼리 또는 조직 내부에서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다. 같은 조직 구성원이라고 해도 서로 견해가 다르기도 하고, 자신이 속한 조직의 입장과는 상관없이 개별 행동을 하기도 한다. 모든 조직과 모든 구성원이 복잡하게 얽혀 상호 교직하는 모양새이다. 그러나 두 흐름 중에서, 정당을 만들어 내년 총선에 모든 역량을 쏟아붓자는 주장이 점차 주류를 형성해 가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모래시계 세대만으로 구성된 ‘세대 정당’을 만들자는 것은 아니다. 이들도 한 세대가 그들만의 정당을 건설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무모한 일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반3김 정치 세력화를 주창하고 나선 선배 세대와, 개혁 성향이 강한 기성 정치인들을 모아서 ‘국민 정당’을 출범시키겠다는 포부이다. 기성 정당이 지역 당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이상, 지역 할거 구도를 가로지르는 국민 정당이 필요하다는 논리이다.
물론 주력은 자기들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적 자원으로 보나 패기로 보나 개혁 신당의 미래는 자기들이 책임질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 모래시계 세대의 지배적인 견해이다. 비유하자면 기성 정당의 혈액형에 맞는 젊은 피를 공급하는 방식보다는, 공급자 스스로 ‘젊은 몸’을 찾아 나서겠다는 것이다.

“내년 총선에서 원내 교섭단체 구성”

개혁 신당의 밑그림은 얼추 그려졌다. 신당의 골격을 구성하는 세 축, 즉 ‘젊은 연대’를 주축으로 하는 청년층과 반3김 깃발을 들고 세력 규합에 나선 정치개혁시민연합(대표 장을병 전 성균관대 총장 등), 그리고 민주당 구당모임은 이미 내부적으로 ‘당을 함께 하자’는 합의에 도달해 있다. 오직 절차와 과정만 남았다. 그러나 개혁 신당의 앞날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이기택 총재와 구당모임 간의 당권을 둘러싼 팽팽한 줄다리기로 인해 아직 민주당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청년 세대의 제도 정치권 진입은 이루어질 것이다. 이는 이미 기정 사실로 굳어졌다. 남은 문제는 민주당이라는 정통 야당의 깃발을 들고 3김 세력에게 도전할 것인지, 민주당을 포기하고 ‘또 다른 정당’을 만들 것인지 하는 점뿐이다. 만약 민주당 내부 사정이 정리되지 않는다면 구당모임 소속 의원들이 당적을 정리하고 개혁 신당에 합류할 것으로 관측된다.

시민운동 세력이 합류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서경석 전 경실련 사무총장이 이끄는 ‘바른 정치를 위한 국민운동본부’(국민운동본부)는, 개혁 신당 흐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요컨대 제도 정치권으로 진입해서 직접 정치를 하기보다는 바깥에서 정치 ‘운동’을 하겠다는 것이다. 서씨는 현재 “어떠한 정치적 모색도 하지 않고 있다. 최근의 개혁 신당 움직임과 우리를 연결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개혁 신당을 추진하는 세력들은 국민운동본부에 대한 은근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다. 즉 이회창 전 총리 등 거물급 인사들을 모셔오는 데 서씨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개혁 신당의 그림이 과연 모래시계 세대의 뜻대로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그들의 꿈은 원대하다. 개혁 신당을 추진하는 세력의 1차 목표는 내년 총선에서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사실상 그들의 모든 꿈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벌써 내년 총선 출마자 명단이 나돌고 있다. 장기표씨 등 재야 인사들과 노무현 민주당 부총재 등 기성 정치인들, 그리고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학생운동권 스타 군단, 여기에다 각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청년 세대의 전문가 그룹을 내세우면 승산이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내년 총선에서 이들이 희망을 거는 곳은 여전히 지역색이 강한 농촌보다는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이다. 개혁 신당의 전략적 입지라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이들은 ‘지연·학연·혈연으로 인력을 충원하는 기성 정당은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 낡은 정당’이라고 단정한다. 사실 한국 정치권의 인력 충원 방식은 전근대적이다. 정책 정당이나 전국 정당의 면모는 찾아볼 수 없고 지역이 그 모든 것을 삼킨다.

지금의 정당 구조는 새롭게 성장하는 시민적 욕망을 감당하지 못한다. 한국 사회 곳곳에서 이미 탈산업사회적 징후들이 목격되고 있다. 사회 분화와 함께 사람들의 욕망도 다양해졌고, 이는 점차 지역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그러나 정치는 여전히 이러한 시민적 욕망을 포섭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역의 틀 안으로 움츠러들고 있다.

이렇듯 낙후한 한국 정치의 현실 때문에라도 한국 정치사에 모래시계 세대의 등장이 갖는 의미는 크다. 지금 한국 정치를 주무르는 세대는 대략 50~60년대에 사회에 나왔다. 그러나 그 때에는 사회 진출 통로가 뻔했다. 변변한 기업체도 없었고 은행이나 관계·언론계·법조계 따위가 고작이었다. 반면 지금의 직업군은 50~60년대에 견주면 엄청나게 다양해졌다. 그러니까 모래시계 세대는 선배 세대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라난 것이다. 청년선언문에 서명한 사람들의 면면을 보아도 이런 변화는 확연하게 드러난다. 다양한 전문 분야에서 나름의 식견을 길러온 사람들이다.

“젊은 정치 지망생들의 출세욕을 채우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기성 정치권이 시대 정신의 변화를 구조적으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세력이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변화하는 사회 환경과 보조를 맞추는, 나아가 시대 변화를 앞서가는 새로운 정치 풍토를 만들 것이다.” 청년 포럼 단체인 ‘두라’의 대표이자 제일경제연구소 연구원인 이장원씨의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개혁 신당 추진 세력은 기성 정당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정당을 지향한다. 기성 정당이 몇몇 보스와 가신에 의해 통솔되는 봉건적 성격이 짙고, 또 특정 지역에 의존하는 농민 정당적 특징을 갖고 있다면, 모래시계 세대가 추구하는 정당은 현대 정당·도시 정당다운 전혀 새로운 특징을 갖게 될 것이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개혁 신당이 내년 총선에서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한다면, 이러한 정치 풍토의 변화말고도 현실 정치권의 역학 관계에도 상당한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나라정책연구회 전 정책실장이자 ‘젊은 연대’에서 간사를 맡고 있는 김성식씨는 “개혁 세력이 독자적인 원내 교섭 단체를 구성한다는 것은 현 정국에서 대단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개혁 신당이 수구 경쟁으로 치닫는 현재의 정국 흐름을 되돌려놓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예견한다. 다시 말해서 구 여권 끌어안기에 골몰하는 DJ나 YS에게 개혁 세력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정국 흐름을 ‘수구 경쟁에서 개혁 경쟁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2차 목표는 여기서 시작한다. 즉 한국 정치권의 양대 세력을 개혁 경쟁의 구도 아래 몰아넣은 뒤에, 97년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미약한 세력이지만 국면에 따라 힘을 최대한 활용해서 정치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구상이다. 물론 그런 구상을 현실화하는 1차 관문은 내년 총선이다. 모래시계 세대의 가세로 내년 총선은 치열한 격전장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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