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 차원 ‘일손 주기 운동’ 확산
  • 김 당 기자 ()
  • 승인 1996.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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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차원의 ‘일손 주기 운동’ 시작…북한 경제 회생에 도움
남북 경협이 활발해질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북한 교역 전문 업체와 사회단체를 중심으로 민간 차원에서 북한 주민 돕기 운동이 추진되고 있다. 정식 명칭은 ‘북한 주민에게 일손 주기 운동’이다. 이 운동의 취지는 민간 교류를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가내수공업을 비롯한 임가공사업을 위탁해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한국은 이를 통해 사양 산업의 부족한 인력난을 해소하자는 것이다.

이 운동을 생각해낸 이는 지난해 1월 북한의 나진·선봉 지대에‘개방용 철조망’을 납품한 북한 교역 전문 업체 씨피코국제교역의 노정호 사장이다. 노사장은 그후 철조망을 공급한 대가로 중국 연변의 용흥집단공사와 합작해, 국내 최초로 나진·선봉 지대 현지 법인 설립 인가를 따내고 토지 3천여 평에 대한 50년간 임차 계약을 맺어 화제가 되었다.

북한 “컵받침 천만개 만들 준비 끝냈다”

노사장은 그동안 새로 거래해온 중국 ○○무역공사(요령성 심양시·총경리 박○○)로부터 북한 사회안전부 소속 조선동흥무역회사(평양시 보통강구) 등 무역회사를 소개 받아, 북한 청진시 주민 5만여 명을 동원해 컵받침(코스터) 등 지공예품과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품 같은 봉제품을 위탁 가공해 생산해 오고 있다. 4월 말 현재 반제품 5백만 개를 만들어 시제품을 반입한 상태이다.

노사장의 아이디어를 높이 사 ‘범국민운동’으로 전개하는 이는 사단법인 韓中문제연구소 박광식 소장(32쪽 인터뷰 참조)이다. 박소장은 1차로 컵받침 20만개가 반입되는 5월 말께 가칭 ‘북한 주민 일손 주기 운동 추진협의회’ 창립 대회를 갖고, 북한 주민에게 일손을 주는 임가공 사업을 국민 운동으로 확산시킬 예정이다.

이 운동이 관심을 끄는 까닭은, 분단 이후 사실상 최초의 대규모 민간 협력 사업인 데다 남북 경제협력의 한 모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이 국민운동으로 확산되면 생필품난에 허덕이는 북한 주민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수출을 통한 북한 경제난 해소에도 이바지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운동의 전망을 밝게 하는 것은 이같은 협력 사업을 북한 주민들이 간절히 원할 뿐만 아니라 정무원 경공업부 등 북한 당국도 지대한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씨피코와 거래하는 북한 무역회사들로부터 온 팩스 문서(아래 상자 기사 참조) 등에 따르면, 현재 이 사업 위탁 가공을 받은 북한 무역회사들은 심각한 원자재난에도 불구하고 이를 직접 생산해 주문품을 납품할 만큼 이 협력 사업에 기대가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원래 이 운동의 취지는 한국에서 폐지와 헌 옷 같은 원자재를 모아 부자재와 함께 제품 규격대로 재단해 북한에 보내면 북한 무역회사들이 주민을 동원해 컵받침과 봉제품을 만들고, 이를 한국측이 반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정상 한국에서 원자재를 보내지 못했는데도 동암무역회사 등 북한 거래선들은 폐지·니스 같은 원·부자재를 자체 마련해 컵받침 천만개를 만들 준비를 끝냈으리만큼 적극적이다.

한국에서 ‘일손 주기 운동’이 확산되면 북한의 유휴 노동력을 토대로 상당한 협력 성과를 거둘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사업이 북한 전역으로 확산되어 단기적으로 북한이 경제난을 해소하는 데 이바지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 주민 일당 1달러…사업 경쟁력 탁월

사업의 경제성을 보더라도 이 운동의 전망은 밝다. 노사장에 따르면, 북한 제품은 한국산 컵받침이나 봉제품에 견주면 투박하고 조잡하지만 값이 싸고 북한 주민 수십만 명의 땀과 정성이 뱄기 때문에 실향민이 많이 쓰고, 기업 판촉물·행사 기념품으로 인기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현재는 한국 반입(수출)용으로 국한되어 있지만 기술 지도를 해 품질을 향상시키면 대외 수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노사장이 이처럼 자신하는 것은 북한의 싼 인건비가 갖는 경쟁력 때문이다.

노사장에 따르면, 북한과의 계약 조건은 컵받침의 경우 반제품 1개당 노임은 한국돈 1백50원. 주민 한 사람이 집에서 하루 평균 5개 정도 만들 수 있는 100% 가내 수공업품이다. 따라서 주민 한 사람당 하루 7백50원(1달러) 벌이이다. 주로 부녀자와 노인층을 동원한 부업이지만 북한 노동자들의 월급이 1달러 수준임에 비추어 사실상 본업보다 더 큰 부업이다. 이는 세계적으로 하루 1달러짜리 인건비를 찾기가 어렵고 공장(설비투자)이 필요없다는 점에서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지공예품 원자재(헌 신문지, 헌 책, 헌 전화전호부 등)는 한국에서 각급 학교와 시민·환경 단체와 언론기관 등을 통해 대량 수거할 수 있기 때문에 제품 아이템만 개발하면 얼마든지 일손 주기 운동을 북한 전역에 확산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일손 주기 운동이 확산되면 남북교역의 심각한 반출입 격차를 줄이는 데도 이바지할 것으로 보인다. 통일원의 남북교역 현황(88~95년 말 현재)에 따르면 통관 기준으로 반입 규모는 8억7천6백84만달러인데 비해 반출은 1억8백47만달러(쌀 지원 제외)로 8 대 1의 격차를 보이고 있다. 한·중 합작사인 동룡해운은 지난해 처음으로 남북한 컨테이너 직항로를 뚫었는데, 관계자에 따르면 북한에서 올 때는 물건을 싣고 오지만 갈 때는 빈 배여서 아직은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북한이 구매력이 없기 때문이지만, 갈 때 헌 신문지 같은 원자재를 실어 보낸다면 한국의 폐품 재활용과 직거래 운송 활성화 그리고 외화벌이라는 1거3득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일손 주기 운동은 한국 경제의 경쟁력 제고와 북한 경제의 회생을 위해서도 남북한 모두에게 당장 필요한 사업(운동)이라는 점에서 큰 기대를 모을 만하다는 지적이다. 이 운동을 지원하는 최영택 교수(서경대·통일문제연구소장)는 “시기적으로도 매우 적합하고 북한 경제에 대한 실질적인 도움과 개방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기대할 수 있는 구심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전망했다. 북한 경제 전문가들에 따르면, 특히 이 운동은 북한의 ‘8·3 인민 소비품 생산운동’과 결합할 경우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84년 8월3일 경공업제품 전시장을 현지 지도한 김정일 당비서가 발기한 ‘8·3 운동’은 생필품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추진하는 전군중적인 대중 소비품 생산 운동이다. 이태섭 주임연구원(현대경제사회연구원 통일경제센터)에 따르면 8·3 인민 소비품이란 공장·기업소가 부산물·폐산물을 이용해 생산한 식료품·옷감·잡화·공예품·가구류·전기제품을 통칭한다. 주된 참여자는 노동자·사무원으로 정년 퇴직한 연로자, 주부나 일정한 직장이 없는 피부양가족, 협동농장원과 그 가족이다. 이 운동에 참가할 것인지 여부는 주민들의 자발적 의사에 따라 결정하나, 자발적 참여도가 대단히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생산품을 국영 상점이나 직매점에 자유롭게 판매해 그 수익금을 분배하는 인센티브제를 적용하기 때문이다.

북한 동포는 고기보다 고기 잡는 법 원한다

따라서 북한 당국도 이 운동의 생산 단위와 생산자 수를 더 확대하는 것을 정책 목표로 삼고 있다. 현재 전체 소비재에서 8·3 인민 소비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늘고 있는데, 91년 북한이 최대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던 배경도 8·3 운동 때문이라는 관측마저 나오는 실정이다. <뉴스위크> 최근호(5월1일자)도 북한을 다녀온 전문가나 학자를 인용해 8·3 운동이 △북한에서 상대적으로 성공을 거둔 유일한 공업정책(노틸러스연구소 피터 헤이즈 박사) △90년대 들어 현재까지 북한이 존속할 수 있었던 한 방편(위스콘신 대학 경제학과 리하이상 교수)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이태섭 연구원은 “본디 가두 여성(가정 부인)과 퇴직 노동력을 대상으로 한 부업 성격이었던 이 운동이 본업보다 생산성이 높은 성과를 거둔 것은 국가의 가격 통제를 벗어난 인센티브제 때문이다. 8·3 운동 생산품에 대한 수출 통계는 잡히고 있지 않지만 일부는 수출도 하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북한이 적극 추진하는 8·3 운동과 무역제일주의, 그리고 한국에서 전개하는 일손 주기 운동이 결합하면 상승 효과를 일으켜 단기적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물론 ‘부스러기 산업’인 8·3 운동이나 일손 주기 운동의 성과를 산업 발전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권오기 통일원장관의 취임 일성은 북한 주민과 정권을 분리해 대하는 정책을 펴겠다는 것이었다. 지금 북한 동포들이 바라는 것도 ‘고기’보다는 ‘고기 잡는 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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