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사정을 정치권이 모르는 이유
  • 李敎觀 기자 ()
  • 승인 1998.10.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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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정책기획자문위 소속 학자들이 ‘밑그림’ 제공했을 가능성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가 9월17일 정치권의 한 인사를 은밀히 만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검찰이 정치권을 사정해 정국이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데 현재까지 진행된 사정을 볼 때 여권으로서는‘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는 또한 이번 정치권 사정이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평가를 좌우하는 중차대한 사안인데도 자기로서는 사정에 일절 개입할 수 없는‘곤궁하기 짝이 없는’처지라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고위 관계자는 김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평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사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박상천 법무부장관이나 김태정 검찰총장에게 문의할 수도 없는 처지이다. 그래서 그는 대검 수사기획관 출신인 박주선 법무비서관을 찾아가 귀동냥하는 선에서 사정의 진행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앞서의 정치권 인사에게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소수 세력 한계 극복이 최종 목표

현재까지 검찰의 사정 대상에 오른 비리 사건은 청구·경성·동아 그룹으로부터의 ‘검은돈’ 수수, 그리고 국세청을 통한 한나라당의 대선 자금 불법 모금 네 가지이다. 청구 사건과 관련해서는 홍인길 전 의원(구속)과 김중위·이부영(한나라당) 김운환(국민회의) 의원이, 경성 사건과 관련해서는 정대철 국민회의 부총재(구속)와 이기택 한나라당 전 총재권한대행이, 동아 사건으로는 백남치 한나라당 의원이, 국세청 사건으로는 서상목 한나라당 의원이 사법 처리될 예정이다.

청와대 참모진과 국민회의 지도부 처지에서 검찰의 이같은 사정이 고민스러운 것은 사법 처리 대상자 대부분이 한나라당 인사들이기 때문이 아니다. 고민의 핵심은 이들 정치인이 사정의 ‘끝’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는 특히 청구 사건에서 알 수 있는데, 현재 검찰로부터 소환 요구를 받은 김운환·김중위·이부영 의원은 대구·경북 지역 출신이 아니다. 이 사건과 관련한 핵심 정치인은 한나라당 중진인 김 아무개 의원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서 검찰이 청구 사건을 끝까지 수사할 경우 그 끝은 김 아무개 의원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런 상황이 발생할 때 과연 국민회의 지도부와 청와대 참모진이 이를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스럽다는 것이다. 이들이 이같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5·6공 시절에 현 집권 세력과 정치 자금 부분에서 보이지 않는 관계를 맺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김의원이 사법 처리될 경우 엄청난 정치적 혼란이 발생할 개연성이 높다고 보기 때문이다.

국민회의 지도부와 청와대 참모진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또 다른 점은 사정이 여·야를 불문하는 것이라고 강조되었기 때문에 여당 의원들에 대한 사정도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국민회의 의원들에 대한 사정은 호남 지역 물갈이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자민련 의원들에 대한 사정은 다른 문제다. 물론 자민련 의원들에 대한 사정을 김종필 총리가 동의하더라도 이는 호남·충청 간에 지역 갈등을 초래해 DJP 연합 와해까지 초래할 수 있다.

그렇다고 김대통령이 이쯤에서 사정을 중단할 수도 없다. 그럴 경우 국민이 납득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지적한 한나라당 김 아무개 의원이나 여당의 비리 의원들을 놓아 둔 채 사정을 끝내면 한나라당이 현재 제기하고 있는 의혹들, 즉 이번 정치권 사정은‘이회창 죽이기’와‘반DJ 정치인들에 대한 보복’이라는 비판을 그대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따라서 김대통령으로서는 정치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사정을 시작했다가 진퇴 양난에 처한 형국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이는 김대통령이 이번 정치권 사정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국민회의 지도부와 청와대 참모진을 배제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여권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이번 사정이 정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시작된 것은 김대통령에게 정치권 사정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그룹이 비정치권 인사들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 그룹은 ‘제 2의 건국 운동’프로그램의 하나로 사정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소식통은, 이 그룹이 국민회의라는 소수 정치 세력이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기 위해 김대통령에게 제시한 아이디어는 정치권 사정을 통한 국민적 신당 건설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번 정치권 사정의 최종 목표가 이른바 ‘DJ의 국민적 신당 창당’이라는 설(說)과 비슷하다. 이 그룹은 김대통령자문기구인 정책기획자문위 소속 학자들로 알려졌다. 현재 이 위원회의 주축은 최장집 (고려대) 한상진(서울대) 황태연(동국대) 임혁백(고려대) 교수이다.

실제로 이와 비슷한 의견을 제시하는 이 위원회 소속 교수가 있다. 박 아무개 교수는 이번 사정이 신당 창당의 정지 작업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이 위원회가 전반적으로 권력 구조의 변화를 바라지 않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김대통령이 지난해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JP와 연대하게 된 것도 소수 세력이라는 한계 때문이었다는 점에서 이같은 분위기는 전국 규모의 신당 건설을 통해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도모해야 한다는 논리와도 궤를 같이한다.

사실 이같은 논리가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김대통령이 87년 대선 때 재야와 정책 연합을 시도한 것이나, 92년 대선 때 이기택·김정길·노무현 등 부산·경남 출신으로서 민자당에 합류하지 않은 정치인들이 주도하고 있던 꼬마 민주당과 통합했던 것 모두 호남이라는 지역을 기반으로 한 소수 세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지난해 대선 때 JP의 자민련과 연대한 것은 소수 세력으로서 정권을 잡기 위한 마지막 시도였다.

그럼에도 김대통령은 소수 세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지난해 자민련과 연대했는데도 과반수 득표를 하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파트너인 자민련과 약속한 내각제 개헌이 비록‘국민이 원하면’이라는 전제 조건을 단 것이라고 해도 김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김대통령 처지에서는 이같은 불안 요인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전국 규모의 신당 창당이 절실하다고 인식할 개연성이 높다.

그러나 이번 정치권 사정이 이처럼 소수 세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목표를 갖고 진행된다 하더라도 정치 현실에 대한 고려가 미흡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사정이라는 수단으로 전국 규모 신당 창당을 실현할 수 있을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 이는 정대철·이기택 두 사람이 사법 처리 대상이 된 것도 김대통령이 당초 의도한 것이 아니고 검찰의 사정 과정에서 초래된 불가피한 부산물이라는 점에서 엿보인다.

검찰 내부에서도 혼선 있는 듯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검찰 내부가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는 지도 의심스럽다는 점이다. 과거 정권에서는 대검 중수부장이 전국 지검·지청의 수사를 일일이 보고받고 조율하는 검찰 내부의 ‘민정 수석’기능을 해왔다. 그런데 지금 대검 중수부는 자체 수사에만 매달리고 각 지검·지청은 검찰총장과 차장에게 수사 결과를 사후 보고하는 양상이다. 그러다 보니 상부의 지침이 없이 각 일선 검사가 경쟁적으로 해당 지역 출신 정치인들의 구린 곳을 뒤지고 있는 실정이다.

검찰 내부는 이처럼 사정의 자체 논리에 따라 일정 부분 ‘무정부 상태’ 양상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같은 현실로 인해 김대통령이 사정을 통해 추구하는 목표가 현실화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김대통령이 소수 세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국민적 신당을 건설하기 위해 염두에 두고 있는 지역의 정치인들이나 정치 세력을 의도적으로 사정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어도 그것이 여의치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김대통령은 정치권 사정의 범위를 필요 없이 넓히지 않으려고 유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번 사정의 보이지 않는 주체로 알려진 비정치권 세력이 사정을 애초부터 정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로 인한 정치적 혼란이 정치 자금 문제에서 결코 자유롭다고 할 수 없는 김대통령을 비롯한 집권 세력에도 미칠 개연성이 없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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