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와 재벌 ‘빅딜 전쟁 비사’
  • 李叔伊·成耆英 기자 ()
  • 승인 1998.07.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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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강공 편 까닭…김중권, 왜 ‘폭탄 발언’했나…박태준 ‘오리발’ 내민 이유…LG·현대의 ‘거부’ 속내
“나김대중, 그렇게 간단치 않습니다. 빅딜, 정계 개편, 반드시 합니다!”

6월16일 오후 3시. 국민회의 지방 선거 당선자 대회에 참석했다가 청와대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한 말이다. 이 차에 동승했던 청와대 한 고위 관계자는 당선자 대회에서의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듯 김대통령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고 전했다. 김대통령이 정치권과 재계 구조 조정에 얼마나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말해 주는 대목이다.

빅딜과 정계 개편은 이제 김대중 정부의 개혁 드라이브를 상징하는 핵심으로 떠올랐다. 취임 전부터 ‘민주적 시장경제론’을 앞세워 재계와 정치권의 자발적인 개혁을 촉구했던 김대중 정부는 취임 4개월이 지나도록 개혁이 지지부진하자 최근 적극 개입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 가운데 전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 ‘빅딜’이다.

김대통령이 방미 중이던 지난 6월10일 김중권 비서실장의 입을 통해 ‘빅딜 임박’ 발언이 터져 나오면서 정국은 순식간에 빅딜 파문에 휩싸였다. 말이 쉽지 빅딜은 한국 경제사를 다시 쓰게 만드는 획기적인 사건이다. 이에 대한 재벌들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은 형국이다. 갖가지 의문을 낳으며 정국을 뒤흔든 빅딜 파문은 삼각 빅딜의 주역 가운데 하나인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이 방북하면서 잠시 수면 아래로 잠복했다. 하지만 빅딜은 6월23일 정명예회장이 귀국하면서 또다시 쟁점으로 떠올랐다.

현재 정부는 빅딜을 성사시킬 여러 장의 압박 카드를 갖고 있는 듯하다. 이미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이 55개 퇴출 기업을 발표하면서 ‘빅딜을 거부하는 기업에 여신 불이익을 줄 것임’을 시사해 퇴출 기업 발표가 빅딜의 예고편이 될 것임을 암시했다. 여기에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공정거래위원회가 5대 그룹 계열사를 상대로 진행하고 있는 부당 내부 거래 조사 결과이다. 이미 정부가 공언한 대로 부당 내부 거래를 조사해 이를 퇴출 판정 자료로 삼는다면 재벌 계열사의 퇴출 대상은 ‘이름도 못 들어 본’ 계열사에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공정위 조사 대상에는 삼성생명·대우중공업·현대전자 등 5대 그룹 주요 계열사까지 포함되어 있다. 게다가 아직 조사가 끝나지는 않았지만, 공정위가 어느 해보다 강도 높은 ‘올 코트 프레싱’을 펼치고 있어 ‘뭔가 큰 게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3대 재벌이 빅딜을 수용하는 대신 공정위 조사의 강도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스몰 딜’을 시도할지 모른다는 추측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이런 시나리오가 실행되던 실행되지 않건 간에 재벌들이 공정위 조사에 그만큼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어서 공정위 조사는 DJ와 재벌이 맞붙은‘빅딜 열전’ 제2 라운드가 될 가능성도 있다.
포스코경영연구소, 빅딜 이론 제공

그렇다면 현재 빅딜 논의는 어디까지 진행되었으며, 빅딜은 과연 성사될 수 있을 것인가. 여권에서 ‘빅딜’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1월 초 국민회의 김원길 정책위 의장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여권에는 빅딜에 관한 아무런 밑그림이 없었다. 여권 인사들의 잇단 빅딜 발언이 ‘정부 개입’이라는 재계의 반발만 불러일으키자 마침내 여권은 강제적 빅딜은 추진하지 않겠다며 한 발짝 물러섰다.

이후 빅딜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듯했다. 하지만 여권 핵심부에서는 자민련 박태준 총재를 중심으로 빅딜 프로젝트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최근 기자와 만난 박총재는 “한국 기업의 최대 문제점은 제조업 분야의 과잉·중복 투자이다”라고 빅딜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이런 빅딜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곳은 포스코경영연구소(POSRI)로 알려져 있다. 연구소측은 공식적으로 관련설을 부인하지만, 이 연구소 황경로 회장은 박태준 총재의 경제특보로 이번 빅딜 과정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포항제철 시절부터 박총재의 심중을 가장 잘 읽는 측근으로 알려진 황특보는 요즘 외부와의 연락을 일절 끊은 채 철저히 잠행하고 있다.

이미 지난 주 <시사저널>이 보도한 대로 빅딜은 당초 삼성의 자동차와 현대의 반도체를 맞바꾸는 선에서 추진되었다. 하지만 자동차를 포기할 의사가 있던 삼성과 달리 현대는 반도체를 포기하지 않겠다며 버텼고, 그래서 결국 LG를 끌어들이는 ‘삼각 빅딜’ 구상이 만들어졌다.

여권 핵심부는 이 삼각 빅딜 안을 가지고 5월 말부터 재계와 집중 접촉하며 김대중 대통령 방미 전에 이를 성사시키려고 애썼다. 대통령이 기업 구조 조정이라는 눈에 보이는 성과를 가지고 미국 방문 길에 나서야 외자 유치에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각 빅딜은 LG의 거센 반발로 난항을 겪었다. 정보통신을 주력 산업으로 키우려던 LG로서 반도체 사업 포기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삼성에 반도체를 내주면 전자 부문에서도 밀린다는 계산이었다. 난처해진 구본무 회장은 아예 외국으로 잠적해 버렸다. 대통령 방미 하루 전인 6월5일 LG그룹 이문호 구조조정본부장(전 회장실 사장)은 자민련 당사를 방문해 박총재에게 참여 불가 입장을 재확인했다. 결국 김대통령은 ‘LG가 거부한다’는 보고를 듣고 미국 방문 길에 올랐다.

그런데 상황은 6월9일 바뀌었다. 다양한 통로로 가해지는 압박을 견디다 못한 LG가 빅딜에 합류키로 결정한 것이다. 구회장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은 이문호 본부장은 9일 박총재를 찾아가 반도체를 포기하겠다고 항복했다. 삼각 빅딜이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이 날 저녁 6시 서울 프라자 호텔에서 김중권 실장을 만난 박총재는 이 ‘빅 뉴스’를 전달했다. 김실장이 반색했음은 물론이다.

박총재를 만나고 돌아온 김실장은 대통령에게 보고하기에 앞서 3개 그룹측에 최종 확인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웬걸! 이번에는 빅딜에 이미 합의했던 현대측에서 발을 빼려는 조짐을 보였다. 김실장은 정면 돌파 작전을 세웠다.

다음날 아침 그는 한국능률협회 조찬 강연회에서 머지 않아 빅딜이 발표되리라는 ‘폭탄 선언’을 했다. 이는 삼각 빅딜을 기정 사실화해 현대의 이탈을 봉쇄하려는 계산된 발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박총재의 반응이었다. 박총재가 “빅딜은 물론 스몰 딜도 모른다”라며 김실장의 발언을 전면 부인했기 때문이다. 해당 기업에서도 때는 이때다 하며 빅딜을 전면 부인했고, 언론은 빅딜 파문을 김실장과 박총재 간의 여여 갈등으로 몰아갔다.

그렇다면 박총재는 왜 자기가 주도한 빅딜을 부인하고 나섰던 것일까. 이에 대해 박총재는 ‘아직 뜸이 덜 들었는데 밥솥 뚜껑을 열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김실장측 견해는 다르다. 박총재에게 빅딜 성사의 공을 넘기려 했던 것이 오해를 낳은 것 같다는 김실장은, 박총재가 ‘빅딜은 필요하다. 조만간 될 것이다’라고 응수했더라면 오히려 일이 쉽게 해결되지 않았겠느냐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김중권 실장의 실수로 마무리되는 듯싶던 빅딜 파문은 김대통령이 김실장의 발언을 재확인하면서 실체를 드러냈다. 김대통령은 6월13일 귀국 직전 가진 기자회견에서 빅딜 가능성을 시사한 데 이어, 귀국 후 6월15일에는 “빅딜을 약속했다가 뒤집은 기업이 있다”라며 빅딜을 기정 사실화했다.
정몽헌, 아버지 건강 우려해 빅딜 보고 늦춰

그러면 현대는 왜 막판에 합의를 번복했을까. 현대가 마지막에 빅딜을 뒤집고 나선 이유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우선 뒤늦게 보고를 받은 정주영 명예회장이 빅딜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 그룹 내부의 정설이다. 현대측의 빅딜 창구는 정몽헌 현대건설 회장으로, 정회장은 소떼 방북을 앞두고 정명예회장의 건강을 걱정해 빅딜 보고를 늦추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소떼 방북 직전 빅딜에 대해 보고를 받은 정명예회장이 ‘쓸데없는 소리 마라. 우리는 오일 쇼크에도 살아 남았다’며 역정을 냈다는 후문이다. 정명예회장이 특히 거부감을 보인 것은 석유화학을 포기해야 한다는 대목이었던 것 같다. 현대측은 삼성과 현대의 석유화학공장이 충남 서산 해안 지역에 철책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는 것과 달리, LG의 석유화학 공장은 전남 여천에 있어 현대와 LG의 석유화학 공장을 합치면 업종 전문화 효과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빅딜의 미래 어떻게 될까

그러나 이런 표면상의 이유보다 정명예회장이 더 신경을 썼던 것은 정몽혁 석유화학 사장인 것으로 보인다. 몽혁씨는 정명예회장의 동생인 고 정신영씨의 외아들이자 유복자. 요절한 언론인 출신 신영씨를 추모해 ‘신영연구기금’까지 만들어 ‘가장 사랑했던 아우’라고까지 표현했던 정명예회장으로서는 몽혁씨 몫의 석유화학을 내주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법도 하다. 현대가 약속을 번복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주판알을 튕겨 본 결과 손해가 많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청와대측은 삼성·LG 등 경쟁 기업의 정보를 현대측에 제공한 사람으로 박태준 총재의 경제특보인 신국환씨를 지목하고 있다. 신특보가 이 기업 저 기업 다니면서 정보를 흘리는 바람에 현대가 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특보는 ‘삼성 음모설’의 주역이기도 하다. 재계에서는 신특보가 최근까지 삼성물산 고문을 지냈고, 동생 응환씨가 현재 삼성구조조정본부 부장인 점을 들어, 빅딜 시나리오가 삼성측에 유리하게 진행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잡음이 끊이지 않자 박총재는 최근 신특보를 불러 자숙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알려진다.

결국 빅딜은 6월19일 전경련 회장단이 “빅딜을 원칙적으로 수용하겠다”고 밝히면서 대세로 굳어졌다. 북한에서 돌아온 현대 정명예회장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관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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