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무소속·자민련 “TK는 우리 땅”
  • 대구/경북·文正宇 기자 ()
  • 승인 1996.0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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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국당 ‘샌드위치’ 신세…자민련은 참신성 부족, 무소속은 후보 난립이 약점
의원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연말 연시를 지역구에서 보낸다. 눈치 안보고 득표 활동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특히 총선을 앞둔 때라면 의원들은 몸이 10개라도 모자란다. 그런데 신한국당 김윤환 대표는 연말 연시에 지역구에 내려가는 것을 망설였다.

누구보다도 김대표 자신이 이 지역 정서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김대통령의 과거 청산 작업에 강하게 반발하는 이 지역 유권자들을 설득할 자신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때는 연휴 때 잡혀 있던 지역구 일정을 모두 취소하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중앙당에 별 일이 없는데 서울에 그냥 눌러앉아 있는 것도 썩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결국 지역구에 내려가기로 결정했지만 귀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여당 대표가 이런 지경이니 신한국당의 다른 대구·경북 의원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들은 결국 올 것이 왔다는 표정들이다. 그것도 총선을 앞두고 최악의 상황에 몰렸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그들 중에는 “지역구에 내려가기가 겁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15대 총선의 대구·경북 지역구 의석 수는 모두 34석(대구 13, 경북 21)이다. 14대 총선 때 신한국당의 전신인 민자당은 대구 의석 11개 중 7개와, 경북 의석 21개 모두를 휩쓸었다. 그러나 그 뒤 이 지역에서 여당 사정은 하루가 다르게 악화했다. 6·27 지방 선거 전에 치른 세 차례 보궐 선거에서 민자당 후보들은 힘 한번 제대로 못써보고 모두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지난 지방 선거 때는 무소속 후보들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대구 구청장 자리 8개 중 민자당이 겨우 2석을 건진 데 비해 무소속 후보들은 5석이나 차지했다. 경북에서는 기초단체장 23개 가운데 민자당이 8석, 무소속이 14석을 차지했다. 여당은 지난 지방 선거에서 사실상 제1당 자리를 무소속에게 넘겨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역 출신 전직 대통령인 노태우·전두환 씨가 구속되지 않았다 해도 15대 총선에서 여당이 고전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한 것은 여당에 대한 반감의 불씨에 기름을 끼얹은 것과 같다. 특히 이곳 정서는 파렴치범으로 몰린 노씨보다는 현 정부의 ‘탄압’에 대해 경상도 사나이답게 대처하고 있는 전씨에게 후한 점수를 주는 듯하다. 전씨가 쿠데타를 일으켜 역사를 어지럽힌 장본인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김영삼 대통령이 과연 전씨를 단죄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강한 의문을 표시한다.

무소속 지지 70%대…젊은 인재 선호

신한국당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또 한 가지는 자민련의 거센 도전이다. 지난 지방 선거에서 자민련은 조직을 채 정비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선전해 가능성을 보였다. 자민련 후보들은 경북도지사 선거와 대구시장 선거에서 각각 2위를 차지했다. 대구 구청장과 경북 기초단체장 자리도 각각 1개씩 따내 일단 교두보를 마련했다. 신민당과 합당하여 대구·경북 출신 전·현직 의원을 다수 확보한 자민련은, 여권에 대한 이 지역의 반감과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를 무기로 삼아 이 지역의 대안 세력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 지역에서는 여당인 신한국당이 무소속과 자민련의 협공을 받아 수세에 몰리고 있는 양상이다.

대구에서는 무소속이 강세이다. 최근 이 지역 언론들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무소속 지지율은 70%대까지 치솟았다. 대구 유권자들이 기성 정치권에 넌덜머리를 내면서 젊고 참신한 인사들을 선호한다는 사실은 이미 지난 지방 선거에서 입증되었다.

대구의 이명규 북구청장은 35세이다. 영남대 강사를 지냈다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경력도 없으며, 지방 선거 때 제대로 선거운동을 한 기간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대구에서 행정 관료로는 가장 유능하다는 평을 받았던 민자당 후보를 물리치고 당당하게 구청장 자리에 올랐다. 남구청장인 이재용씨는 40세이다. 선거에 출마하기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치과의사였다. 하지만 그는 전직 구청장을 따돌리고 당선됐다. 시의원인 김인석씨는 31세이다. 경력은 대구 지역 경실련 청년분과위원장을 했다는 것밖에는 없다. 그러나 그는 1년 이상 준비해 오며 20억 가까운 돈을 썼다고 알려진 지역의 중견 건설회사 회장을 밀어내고 시의원이 됐다. 그들은 오직 젊고 참신하다는 이미지 하나로 돈 있고 경력이 화려한 경쟁자를 물리쳤던 것이다.
이들의 ‘신화’는 대구의 신진 정치 세력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자민련 박철언 의원의 비서관 출신이면서도 수성 을에서 무소속 출마를 준비하는 남칠우씨(37)는 “대구 지역에서만큼은 깜짝 놀랄 만한 결과가 나올 테니 두고 보라”고 장담한다. ‘아니 어떻게 이런 사람이?’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만한 젊은 사람들이 다수 원내에 진출할 것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이번 15대 총선 때도 과연 무소속 후보가 절대 강세를 보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이 많기는 하다. 워낙 무소속 후보가 난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구에서는 현재 두세 군데를 빼놓고는 지역구마다 10명이 넘는 인사가 출사표를 던져놓은 상태다. 그 때문에 일부 무소속 후보는 ‘유권자들이 쉽게 선택할 수 있도록’ 후보자를 선별해 ‘무소속 연대’를 만들 것을 검토하고 있다.

요즘 대구에서 가장 흔하게 듣는 말이 있다. ‘대구 정서는 이제 반YS가 아니라 증오 YS 수준이다’라는 것이다. 신한국당이 이 지역에서 얼마나 고전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강재섭 의원이나 최재욱 의원이 당 내에서 눈총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5·18 특별법에 반대했던 것은 이런 지역 정서 때문이었다. 청산 정국 전만 해도 이 두 사람만은 당선되지 않겠는가 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얘기를 입에 담는 사람마저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다. 총선 전 신한국당 의원들의 대거 탈당이 점쳐지기도 하지만 지역에서는 ‘이제 탈당해도 표를 얻기는 틀렸다’는 말이 나오는 판이다.

자민련은 대구에서 제1당을 꿈꾸고 있다. 박철언 김복동 구자춘 이의익 등 이 지역에서 지명도가 높은 인사들을 앞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구에서 JP가 별로 인기가 없고, 몇몇 간판급 인사 외에는 후보들이 참신성에서나 자질 면에서 떨어진다는 고민을 안고 있다. 총재의 개성과 후보의 면면이 전반적으로 세대 교체를 바라는 이 지역 정서와 배치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당 내에서는 후보 대폭 물갈이가 거론되고 있지만 인재 영입이 여의치 않아 지지부진한 양상이다. 그러나 현재 네 당 중에서는 이 지역에서 단연 독주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지역 유권자들은 신한국당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보이고 있으며, 국민회의는 아예 관심 밖이고, 민주당은 국민회의와 혼동하거나 신한국당의 2중대쯤으로 평가 절하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경북 휘몰아치는 ‘박정희 증후군’

경북은 그래도 신한국당이 기대를 걸고 있는 지역이다. 이번 개각에서 김대통령은 총리와 통일 부총리를 모두 경북 출신으로 임명했다. 여권이 이 지역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김대통령은 여당 대표와 행정부의 총리·부총리가 모두 이곳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경북을 집중 공략할 심산인 것 같다. 그러나 현지 분위기는 냉랭하기만 하다. “김대통령이 홀쿨라카는(홀리려고) 모양이지만 택도 없는 얘기”라는 말이 거침없이 나온다.

경북의 민심은 김윤환 대표의 당선도 낙관할 수 없을 정도로 흉흉하다. 전·노 씨가 구속되자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는 깊어만 간다. 지난 도지사 선거 때 박대통령의 조카인 박준홍씨는 자민련 후보로 나와 짧은 기간에 박대통령 육성 녹음을 틀고 다니면서 표를 모아 2위를 했다. 그가 김윤환 대표의 지역구인 구미 을에 출마하면 김대표도 고전할 것이 예상된다. 박씨가 나오지 않아도 김대표가 많은 표를 얻어 당선하기 힘들 것이라는 분석은 현지에서 이미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경북은 민주당 이기택 고문이 새 출발을 꿈꾸는 곳이다. 그는 그동안 태어난 고향인 포항과 정치적 고향인 부산을 놓고 저울질하다가 포항으로 기울었다. 또한 민주당은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 등을 영입해 경북 동부 지역에 이른바 KT벨트를 구성하려고 한다. 민주당은 경북 지역에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둘째 딸인 근영씨를 영입하려고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북은 죽은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 움직이는 현재의 정치권을 압도하는 묘한 형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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