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대는 왜 이동국에게 미치는가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8.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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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스타 찾는 ‘젊은 마니아’ 급증…복장·말투·행동거지에서 동질감
프로 축구 경기가 끝난 뒤 이동국 선수를 만나기 위해 구단 버스를 에워싼 청소년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과, 2년여 침묵을 깨고 발표한 서태지의 음반을 사기 위해 CD 매장 앞에 줄지어 선 젊은이들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그들은 기업이 가장 까다롭다고 여기는 신세대이다. 기업들이 요즘 붙잡고 싶어 안달이 난 소비자 집단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무엇인가에 미쳐 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프로 축구의 성공을 이해하는 열쇠이자, 그것으로 상징되는 신세대 시장을 공략(신세대 마케팅)하는 비결이다. 제일기획 마케팅연구소 박재항 차장은 “최근의 프로 축구 열기는 신세대 마니아 문화로 이해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마니아(mania·어떤 것에 몰두해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라는 말은 최근에 나온 말은 아니다. 예전에도 각 분야에 마니아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최근의 마니아들은 과거와 달리 각종 매체를 통해 적극적으로 여론을 형성하는 강력한 소비자 집단이 되었다. 그들의 활동 공간도 음악을 비롯한 예술 분야에서 영화와 취미 활동, 스포츠 등으로 넓어지고 있다.

신세대, 축구 ‘소비’하며 ‘응원’이라는 상품 개발

더욱 흥미로운 것은 청소년들 사이에 마니아 문화가 널리 퍼지면서, 그들 사이에서 남보다 앞서려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연예인을 대상으로 한 경우를 예로 들면, 신인들을 좋아하다 나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미 스타가 된 그 신인들을 좋아하는 것을 보며 만족해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얘기다. 이른바 우월적 마니아(혹은 이탈자)인 이들은 늘 새로운 분야와 스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 부류인 셈이다. 다시 박재항 차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무엇엔가 몰두하려는 성향이 다분한 신세대들은 자신들을 매료시켰던 월드컵이 끝나면서 이동국과 고종수, 프로 축구라는 신천지를 발굴해 냈다.”

이들의 특성은 자신들이 찾은 멋진 신세계를 아주 적극 알린다는 점이다. 구전(口傳)이 되었건 PC통신이 되었건, 신세대 사이에서 일단 화제가 되면 그 다음부터는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한다. “축구 경기를 구경하러 온 여학생들 가운데 처음 온 사람이 의외로 많은 데 놀랐다. 대개는 스타 아무개를 보러 왔다는 식인데, 소문만 듣고 친구들과 함께 와보는 식이다.” KBS 축구 해설위원인 이용수 교수(세종대)의 경험담이다.

축구장에서 가장 열광하는 여학생 프로 축구 팬들 가운데에는 축구의 규칙, 예컨대 어떤 경우에 오프사이드가 선언되는지 정확히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고 이들을 가짜 축구팬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천만에, 기존 팬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축구를 사랑하는 것뿐이다. 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 플레이어 혹은 그 소속 팀에 맹목적인 응원을 함으로써 참여 의식을 느낀다. 그 선수가 많은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을 확인하면서 더욱 큰 만족감을 느끼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축구를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응원이라는 새로운 상품을 ‘생산’해 낸다. 앨빈 토플러가 미래 사회에 등장하리라던, 생산자와 소비자가 결합된 생비자(生費者·prosumer)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마니아들이 스스로 새로운 스타를 발굴하고 숭배하는 과정은 점점 더 연예계를 닮아가고 있다. 실제로 현재의 열기를 더욱 고조시키려는 구단들은, 그들이 보유한 스타 플레이어들에게 전문적인 매니지먼트팀을 붙여주고 있다. 일종의 매니저인 셈이다. 지난 8월21일 이동국 선수가 소속된 포항 스틸러스는 광고대행사인 (주)비베이와 매니지먼트 전담 계약을 맺었다. 매니저는 해당 선수의 이적과 연봉 협상을 제외한 모든 대외 활동을 대행한다. 비베이는 우선 자발적으로 형성된 팬클럽 20여개를 통합해, 공식 모임을 주선할 계획이다. 비베이의 성진경 실장은 “이동국 선수를 활용한 광고와 캐릭터 사업에 가장 큰 기대를 걸고 있다”라고 말한다.
신세대들의 프로 스포츠 스타 숭배 의식은 사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프로 야구나 농구, 심지어는 실업 배구만 해도 이른바 오빠부대가 존재했다. 그들과 현재의 신세대 프로 축구 팬들 간에 차이가 있을까. 신세대 마케팅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설명한다. “대중 가요의 오빠부대들을 생각해 보자. 이들의 처음 우상은 자신들보다 한참 나이가 위였던 조용필이었다. 그러다 전영록에 이어 서태지, 최근의 H·O·T에 이르기까지 오빠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점차 같은 세대로 옮아 왔다.” 삼성경제연구소 신현암 수석연구원의 말이다.

최근 프로 축구의 동갑내기 라이벌 스타로 떠오른 이동국·김은중 등은 하나같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 무대에 뛰어든 신세대. 신세대들은 이런 스타 플레이어들의 평상시 복장·말투·행동거지에서 강렬한 동질감을 느낀다. 이들보다 비록 나이는 많지만, 역시 관중을 몰고 다니는 고종수와 안정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고종수는 골을 넣는 순간 제 멋에 겨워 공중제비를 도는가 하면, 안정환은 무대에나 어울릴 법한 긴 머리 칼을 갖고 있다. 모두 신세대다운 자기 표현이다.

‘미치광이’들 붙잡으려면 경기 재미있어야

물론 마니아와 신세대 시장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한 취미 활동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니아들 가운데는 중장년층도 적지 않다. 마니아들을 위한 잡지로 꾸준한 인기를 모으고 있는 군사작전 전문지 <플래툰>과, 퍼즐 게임 전문지 <빅퍼즐> 의 경우도 상당수가 중장년 계층이다. 최근 마니아 마케팅 이벤트 가운데 가장 성공한 경우로 꼽히는 마티즈 시승 행사만 해도 그렇다. 이 행사는 PC통신의 자동차 동호회를 대상으로 시승해 보게 한 뒤, 구전이나 PC통신을 통해 소문을 내게 한다는 계산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이 행사의 주인공이 된 자동차 동호회 회원들은 자동차 마니아들로, 신세대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마케팅 전문가들에 따르면, 신세대들은 그 지지도의 격렬함과 전파력에서 마니아들 가운데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이다. 서태지 마니아들이 좋은 예다. 올해 발표한 서태지의 첫번째 개인 음반은 서태지의 얼굴 한번 제대로 나오지 않았음에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음반의 음악적 완성도가 뛰어나서만은 아니었다(물론 서태지 마니아들은 생각이 다르겠지만). 서태지 신화를 연구했던 삼성경제연구소 신현암 연구원은 “서태지라면, 그의 음악이라면 무조건 좋다는 그의 마니아들을 빼놓고는 그런 현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

신세대 마니아 마케팅에 가장 성공했다고 평가되는 것이 ‘쿠기 어드벤처’라는 브랜드다. 92년 출범한 이 회사는 의류업계의 전반적인 불황 속에서도 매출액 증가율이 매년 30%에 이른다. 현재 이 회사는 60여 점포에 7백억원의 매출을 기록 중이다. 그 주요 원인이 바로 이 브랜드만을 고집한다는 쿠기족(族), 쿠기 마니아 덕분이다.

신세대가 이 브랜드에 열광하는 이유를 기성 세대의 시각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이 브랜드의 의류는 어른이 보기에는 너무 튀는 데다가 검정색과 흰색 같은 단조로운 색상 일색이다. 신세대들은 기성 세대가 눈살을 찌푸리는 바로 그 점을 좋아한다. 독특한 모험과 실험 정신이 그들에게는 재미가 되는 것이다.

이런 분석은 현재의 프로 축구에도 그대로 통한다. 이용수 해설위원은 “현재 프로 축구가 신세대들에게 파는 상품 가운데는 스타말고도 경기가 있는데, 현재의 인기를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상품(경기)이 늘 지금처럼 재미가 있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만일 프로 축구계가 이 젊고 까다로운 ‘미치광이들’을 계속해서 붙잡을 수 없다면, 그들은 언제든 축구장에서 발길을 돌릴 것이다. 프로 야구가 좋은 예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프로 축구계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제 2, 제 3의 이동국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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