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무 감독 "최선 다하고, 결과 책임지겠다"
  • 李哲鉉 기자 ()
  • 승인 1998.09.1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허정무 신임 국가 대표팀 감독 인터뷰
프랑스 월드컵에서 참담한 성적을 거두어 만신창이가 된 국가 대표팀이 다시 일어서고 있다. 그것도 21세 이하 젊은 선수들이 주축이 된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참가 연령이 23세 이하여서 올해 21세 이하인 선수들이 국가 대표로 선발되어 2년 동안 조직력과 전술 훈련을 받게 된다. 한국 축구 재건이라는 큰 책임을 맡은 이는 허정무 전남 드래곤스 감독이다. 허감독은 지금까지 대표팀 감독 선발 방식과는 달리 공개 경쟁을 통해 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었다. 그는 2002년 월드컵까지 대표팀을 이끌게 된다. <시사저널>은 21세기 국가 대표팀을 짜는 데 여념이 없는 허감독을 만나 대표팀 구성과 운영에 대해 물었다.

우리 국민은 축구 대표팀이 거둔 성적에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닌가?

축구만큼 민족주의가 강한 경기가 없다. 국가 대표팀들은 나라의 자존심을 걸고 경기를 치른다. 대표팀이 거둔 성적이 국민 정서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우리나라에 국한한 일은 아니다. 전세계 축구팬들은 대표팀의 활약에 환호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한다.

프랑스 월드컵 이후 만신창이가 된 국가 대표팀을 맡았다. 대표팀 감독이 된 후 바뀐 것은 무엇인가?

아주 바빠졌다. 요즘 대학 경기가 열리는 효창운동장에 나가 젊은 선수들의 기량을 직접 살피고, 감독들을 만나 조언을 구하고 있다. 게다가 전남드래곤스 감독으로서 지방 경기들을 치러야 한다.

우수한 선수들을 발견했는가?

걸출한 선수는 없는 듯하다. 나름으로 기량을 갖춘, 비슷한 실력을 가진 선수들이 많았다. 축구협회와 의견을 나누어야 하지만, 대표 선수 후보 명단에 40명 가량을 채웠다. 애틀랜타올림픽 때보다 선수 기량이 많이 떨어져 걱정이다. 애틀랜타올림픽 대표팀에는 최용수·윤정환·이기형·이상헌 같은 우수한 선수가 많았는데….

선수 선발 원칙은?

팀에 필요한 선수를 뽑는 것이다. 각 포지션에 요구되는 기량을 갖춘 선수를 선발하겠다. 또 포지션마다 균형 있게 인원 수를 맞추겠다. 프랑스 월드컵 대표팀은 포지션별 인원 구성이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 한 포지션에 선수가 많기도 하고 적기도 했다. 팀 전술에 적합한 선수를 선발하겠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개인기를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팀 전술을 소화하려면 뛰어난 개인기가 있어야 한다.

대표팀 운영 원칙은?

선수와 코칭 스태프가 가지는 목표는 승리이다. 이기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 하지만 성적이 시원찮게 나와도, 나름으로 최선을 다했는데 역부족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다만 상식적이고 투명하게 대표팀을 운영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겠다. 축구협회와 축구인들이 납득할 방식으로 선수를 선발하고 운용하겠다. 욕심이 있다면 한국 축구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말을 듣고 싶다.

전 국가 대표팀 감독들이 취임과 동시에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끝은 불명예스럽게 퇴진했다. 허감독에게 거는 기대가 언제 비난의 화살이 되어 돌아올지 모르는데 불안하지 않는가?

승부의 세계는 냉엄하다. 국가 대표팀 감독을 수락한 이는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좋은 성적을 거두면 찬사와 환호를 받겠지만 기대에 떨어지는 결과가 나온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

프랑스 월드컵에서 우리 대표팀이 참패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는가?

그 때 국가 대표팀이 보인 졸전은 축구인들이 늘 우려했던 상황이었다.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국민 기대가 부풀기 시작했다. 축구인들이 예선 경기 내용을 보고 보완점을 많이 제기했으나 반영되지 못했다. 월드컵 본선은 아시아 예선전과 달리 만만치 않다. 월드컵 참가 경험이 있는 고정운·신홍기·김주성·이기형 같은 선수들이 대표로 활약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쉽다. 차범근 감독은 축구인 대다수가 동의할 수 없는 방식으로 대표팀을 구성하고 운영했다. 그 결과가 좋았다면 그가 옳았다. 하지만 성적이 시원치 않았으니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 선수들의 기량이 뒤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기량마저 100% 발휘하지 못했다.

프로 축구 경기장을 찾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썰렁하기 그지없던 축구 경기장에 축구 팬들이 몰리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는가?

월드컵 열기가 아직 식지 않았다. 우리 국민들은 프랑스 월드컵에서 각국 응원단이 자국 축구팀을 응원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그대로 보았다. 또 월드컵 같은 국제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프로 축구가 발전해야 한다는 공감대도 어느 정도 형성되었다. 바로 그때 고종수·이동국같이 스타성과 기량을 갖춘 선수들이 나타난 것이 축구 열기를 달구는 데 일조했다. 이 분위기를 끌고 가고 싶다. 대표 선수 선발과 운영에서도 가능하면 프로 축구를 위축시키지 않도록 하겠다.

신세대 축구 스타인 고종수·이동국·안정환·김은중 선수의 자질과 기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개인기와 자질이 매우 뛰어나다. 인기에 어울리는 기량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지금이 중요하다. 자칫 자만심에 빠져 훈련을 게을리하기 쉽다. 그러한 함정에 빠지기 않기를 바란다.

중요한 경기에서 지고 돌아오는 선수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지도자 경력이 10년을 넘었고 산전수전 다 겪었다. 져도 상쾌한 경기가 있는 반면 이겨도 마음이 개운치 않은 때가 있다. 최선을 다해서 이겼지만 내용이 좋지 않을 때는 편치 않다. 선수마다 그릇의 크기가 있다. 자질이 못 미치지지만 자기 기량을 최대한 발휘했다면 칭찬한다. 하지만 기량이 훌륭한 선수가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면 혼을 낸다. 선수들에게 체벌을 가할 때도 선수가 자기 잘못을 깨닫게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는 선수와 감독 사이에 의사 소통에 문제가 생긴다. 이는 팀 전력을 손상시킨다. 따라서 감독과 선수 사이에는 끊임없이 의견 교환이 있어야 한다.

현역 선수 시절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면?

월드컵 본선에서 강호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 경기 때 골을 넣은 것도 잊히지 않지만 네덜란드 프로 리그에서 뛸 때 토털사커를 창시한 요한 크루이프라는 선수와 같은 포지션에서 같이 뛰면서 몸싸움을 벌였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당시 요한 크루이프와 험악한 상태까지 갔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와 같은 대선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뛰었다는 것이 흐뭇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