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미·일과 수교해도 한국 외면 못한다
  • 李敎觀 기자 ()
  • 승인 1995.05.0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방 기업들 투자 꺼려 중·장기적으로 남북 경협 불가피
중국의 전국인민대표자회의 상무위원장 교석(喬石)이 최근 방한했다. 교석은 강택민 국가주석과 이붕 총리에 이어 서열 3위인 중국의 실력자다. 특히 개혁파와 보수파 어느 쪽에도 정적이 없어 등소평 사후 권력을 장악할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에 특별한 관심을 끌고 있는 인물이다.

교석이 갑작스레 한국에 온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방한 당시 국내 언론은 교석 방문의 정치적 배경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정부도 그의 방한 의미를 명확히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방문은 경수로 협상이 타결된 이후 전개될 북한과 미국간 수교에 대비하여 한국과 외교적 연대를 강화하려는 한국과 중국의 의도가 맞아 떨어져 이루어졌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교석 방한은 미·북한 수교 대비한 외교 포석

미·북한 제네바 합의에 따라 경수로 협상이 타결되면, 양국은 연락사무소를 설립하고 수교하게 된다. 교석의 방한은 바로 이런 정황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민족통일연구원 길정우 선임연구위원은 “중국은 북한과 미국의 관계 개선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의 대북 수교가 중국 견제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때문에 교석의 방한은 중국이 미·북 한 수교에 대비해 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교석의 방한과 관련하여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지난 4월12일 북경에서 강택민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한 사실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는 관측도 있다. 삼성그룹이 아무리 중국 투자를 대규모로 한다 해도 이회장이 강주석과 장시간 회담한 것은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 점 때문에 한국 정부가 교석의 방한과 발 맞추어 중국과 경제적 유대를 강화하려는 차원에서 사전에 이-강 회담을 ‘외교적으로’ 준비한 것이 분명하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건희 회장이 방중 일정을 끝낸 시점에서 이양호 국방부장관이 한국 국방장관으로서는 처음으로 5월에 중국을 방문하기 위해 중국과 협의중이라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국방부는 당시 이장관의 중국 방문 목적이 북한의 마지막 군사 지원 보루인 중국과 물꼬를 트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이장관의 방중 또한 최근 급격히 변화하는 동북아 정치 역학 구도와 맞물려 한국이 중국과의 관계를 군사적으로도 발전시키려는 외교적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미·북한 수교는 북·일 수교와 맞물려 이루어질 전망이다. 갈루치 미 국무부 차관보는 미국은 수교 이전에 북·일 수교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공식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 일본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에 참여시킨 미국은, 한반도와 일본을 자신의 품안에 묶어두고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포석을 분명히하고 있다.

동북아 정치 및 경제 역학 구도에 지각 변동을 몰고 올 미·북한 및 북·일 수교는 남북한 경제 협력 관계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분석이다. 북한이 미국·일본과 수교하려는 현실적인 목표는, 한국과 경제 협력을 하지 않은 채로 미국·일본 등 서방 기업들의 투자를 유치해 가사 상태에 빠진 경제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데 있다.

북한이 미국과의 수교에 매달리는 것도 경제적으로 서방 기업들의 북한내 투자 위험 부담을 덜어 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 2년여 동안 북한은 독일·핀란드·일본 등에서 투자 유치 세미나를 개최하면서 외국 자본을 도입하려는 치열한 노력을 전개했다. 그러나 과장된 언론 보도와 달리 실질 성과는 전혀 없는 실정이다. 서방 국가들이 북한에 투자하기에는 정치적으로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일본과 수교하면 북한은 일본 정부로부터 전후 보상금을 받을 수 있고 이 자금으로 부족한 사회간접자본시설을 건설할 수 있다. 지난 2월 평양을 방문한 일본 연립여당 대표단은 수교가 이뤄지면 그 때 1백20억달러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최근 밝혀졌다. 북·일 수교는 북한에게 조총련이 보유한 막대한 자본을 합법적으로 가져갈 길을 터주는 효과도 있다. 동산과 부동산을 합쳐 약 44조엔에 달하는 조총련 자본 중에서 북·일 수교가 이루어질 경우 20조엔을 가져갈 수 있을 것으로 북한 당국은 기대하고 있다.

이처럼 엄청난 보상금과 조총련 자금은 미국과 일본 등 서방 기업들의 북한 진출을 단기적으로 가속화시킬 것임에 틀림없다. 이는 북한 경제에 일단 숨통을 틔워 주는 결과를 가져다 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한은 일본의 보상금을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내 사회간접자본시설 건설 프로젝트를 발주하는 데 사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기업 가운데 북한 시장 조사를 마치거나 이미 투자 계약을 북한 당국과 체결한 회사로는 AT&T·코카콜라·IBM·제너럴 모터스 등이 있다. 특히 AT&T는 지난 4월11일 미국과 북한 간에 직통 전화 서비스를 개시해 눈길을 끌었다. 이는 미·북한 수교 이후 미국 기업들이 북한에 진출할 때 발생할 전화 수요에 미리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AT&T는 여기서 더 나아가 북한내 통신망이라는 중요한 사회간접자본시설 건설 프로젝트를 따내려 하고 있다. 이는 북한을 거점으로 해서 앞으로 수요가 예상되는 중국의 동북 3성에도 진출하려는 의도임을 보여 준다.

북한에 진출하려는 일본 기업들은 주로 종합상사·전자 회사·건설 회사 등이다. 특히 일본의 종합상사들은 조총련 인맥을 통하여 북한 고위 당국자들과 꾸준히 접촉해, 이미 여러 부문에 투자를 하기로 확정지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 종합상사들의 북한 투자는, 섬유를 비롯한 소비재 부문에서 위탁 가공 사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파악된다.
북한 도울 경제 동기·능력 갖춘 나라는 한국뿐

미·북한 및 북·일 수교로 미국과 일본 기업들의 투자가 본격화하면, 정치 체제를 위협할지도 모르는 한국과의 경제 협력은 물론이고 한국과의 정부간 대화도 피하려 할 것이다. 반면에 미국·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들어온다 해도 북한 주민들의 동요는 없을 것으로 보고, 북한은 서방과의 경제 협력에 주력할 것이 분명하다.

미·북한 및 북·일 수교에 따라 남북 경제 협력을 통한 남북한 관계 개선은 사실상 ‘루비콘 강을 건너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이 한국 정부와 국내 기업들 사이에 팽배할 수 있다. 국내 대북 강경 보수 세력들은 미·북한 및 북·일 수교에 대해 더욱 패배감을 느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 북한이 외자 유치를 통해 경제난을 타개하려면 한국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 국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미국·일본과 수교하더라도 서방 기업들에게 북한 투자 위험성은 여전히 높고 경제적 투자 매력도 과히 크지 않다. 서방 기업들이 거의 한결같이 한국 기업들과 동반해 북한에 진출하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한무역진흥공사 홍지선 북한 실장은 “특히 미국 기업들은 미·북한 수교가 이루어지더라도 북한에 대한 투자 위험이 크다는 것을 알고 한국 기업들과 동반해서 진출하려고 한다. 심지어 최악의 경우에는 한국이 서방 기업들의 대북 투자 안전을 위해 보증까지 서야 할 판국이다. 이 때문에 북한이 한국과의 경협을 배제할 수는 더욱 더 없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민족통일연구원 길정우 박사도 “북한은 시장성이 아직 없어 단기간에 투자 이윤을 낼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한국 기업들이 북한에 진출하지 못하는 한 서방 기업들도 투자를 꺼릴 것이다. 결국 북한이 한국 기업들과의 경협을 배제한 채 미국·일본 등 서방 국가 기업들로부터 본격적인 투자를 유치하기는 힘들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일본의 보상금과 조총련 자금이 들어간다 하더라도 북한으로서는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를 비롯하여 앞으로 개설될 경제 특구에 필요한 사회간접자본시설을 다 건설할 수 없다. 이러한 막대한 사회간접자본시설을 건설할 자금을 댈 수 있는 경제적 동기와 능력을 동시에 갖춘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한국 기업 중에서도 자체 자금으로 북한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할 수 있는 기업은 거의 없다. 한국 정부의 차관과 금융 지원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북한이 진정으로 경제 개발을 원한다면, 결국 한국 정부와 마주앉아 대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을 배제한 북한과의 경제 교류는 미국과 일본에게도 큰 의미를 갖기 힘들다.

국내 기업들은 미국과 일본 기업들이 한국보다 앞서 북한에 진출한다 해도 긴장하거나 국내 기업끼리 물밑에서 과당 경쟁을 벌일 필요가 없다. 정부도 법으로 규제하지 말고 기업에 맡겨 놓으면 된다. 경제 논리상 한국 기업들의 과당 경쟁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정부가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미국과 북한, 북한과 일본의 수교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긴장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